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60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3부 남로당의 궤멸/김영주 일제때 일본인 행세/소군 친일파 숙청하자 겁먹고 서울로 도망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는 자주 만났다. 그와는 술도,밥도 같이 많이 먹었고 이발소도 같이 가곤 했다. 그는 식당에 가나 이발소에 가나 반드시 허리에 찬 권총을 빼내 닦는 것이었다.

나를 보면 『박동지는 남조선 지하공작의 귀신인데 왜 문화선전성에서 헛밥만 먹고 있느냐?』며 자기와 같이 사업을 하자고 했다.

그러면 나는 『왜 김동지는 나를 죽이려 하오. 우리나라 속담에 「나무재주 잘하는 놈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고 물재주 잘하는 놈은 물에 빠져 죽는다」고 했는데 다시 내가 남조선 지하로 들어가면 죽어요. 지하운동때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소.

그러나 6ㆍ25때 북에서 내려온 동지들이 권력을 독점해 버리고 나를 완전히 허수아비같이 만들어 나를 도와준 사람들을 하나도 도와주지 못하고 배신하고 말았으니 내가 무슨 얼굴로 이남땅으로 가서 또 도와달라 하겠소?』라고 말하면서 농담조로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단념하지 않고 『나도 남조선 정세는 잘 알고 있소. 나도 서울에 있은 적이 있어요. 남대문시장도 잘 알고 있소』하는 것이었다.

나는 김영주가 언제 서울에 와 남대문시장에 돌아다녔는가 의심스러웠다. 남대문시장이 이북 사람들에게 유명해진 것은 해방후의 일이다. 그러면 그가 해방후에 서울에 왔다는 것이 된다. 나는 김영주의 경력을 조사하면 김일성의 경력도 해명될 것이라 생각했다.

1946년 여름부터 겨울동안 김일성집에서 식모를 하고 있던 소림화자라는 일본 여자가 1970년 발표한 『나는 김일성수상 집에서 남의 집살이를 했다』는 글에서도 김영주가 비로소 평양의 형 김일성집으로 찾아간 것이 1946년 10월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김영주는 1937년 봄에 만주의 안도에서 그의 형 김일성과 같이 있다가 체포되어 그후 신경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8ㆍ15때까지 있었다.

그동안 창씨개명해 일본인 행세를 하고 있던 김영주는 소련군이 진주해 친일파를 숙청하자 겁이 나 북조선으로는 가지 못하고 미군이 진주한 서울로 왔던 것이었다.

그는 46년 10월에야 평양의 김일성이 자기형 김성주임을 확인하고 뒤늦게 평양으로 찾아갔던 것이었다. 소림화자는 『김영주가 일본말을 잘 하더라』고 쓰고 있다.

소림화자는 만주에서 살고 있던 일본 처녀로서 일본에 돌아가는 도중 평양에서 다른 한 일본여자와 붙잡혀 김일성 집에서 일을 하게 됐다.

북한 첩보공작기관에서는 미군 포로와 한국군 포로에 대한 세뇌 포섭공작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부족했다. 내가 근무하는 구라파부에는 영어하는 사람이 몇사람 있었다.

하루는 인민군 총정치국 제7부(스파이공작)장이 나한테 찾아와 압록강변 벽동에 있는 미군 포로수용소에 일이 있으니 영어하는 사람 몇사람만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미군 포로의 스파이공작에 쓰려는 것이 뻔했다. 마침 우리사업에도 사람이 모자라는 때라 우리 일이 바빠 안되겠다고 거절했었다.

그랬더니 제7부장(대령)은 허정숙에게 가서 『구라파부장은 이 전시에 군사업에 협조하지 않으니 상(장관)지시로 구라파부장에게 명령해 달라』면서 나를 욕했다는 것이었다. 허정숙은 『여보! 당신이 나에게 명령하는 것이오. 자기일은 자기가 해야지. 구라파부장 당신일 하려고 있소?』하며 쫓아보냈다고 허의 비서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허정숙이 외국손님 만나러 갈 때에는 지프 앞칸 운전수옆에 자기가 타고 뒤칸에는 언제든지 나를 태우고 다녔다. 그녀는 영어도 잘했다.

6월23일 유엔 소련대표 말리크가 유엔본부에서 정전회담 개최를 제의해 7월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김일성은 곧 휴전이 성립된다면서 8월15일부터 평양에서 전승박람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 전승박람회의 한 전시관으로 국제성원관을 만드는 책임자로 문화선전성 구라파부장인 내가 임명되었다.

세계 각국의 좌익단체에서 의복류와 의약품 등 여러가지 생활필수품을 많이 기증해 왔으나 폭격 때문에 압록강을 넘지 못하고 거의 다 압록강 저편에 쌓여 있었다. 도저히 그것들을 운반해 올 수가 없었다. 휴전회담이 시작되어도 후방폭격은 더 심했다. 국제성원관의 건물은 아동궁전이었다.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