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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59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3부 남로당의 궤멸/최승희 망명우려 방일 저지/일 신문 공연초청… 후환두려워 남편도 반대
51년 여름에 독일 베를린에서 세계청년축전 제2회 대회가 열리게 되어 북조선에서도 참가하게 되었다. 민청을 중심으로해 중앙당 선전부ㆍ외무성ㆍ문화선전성ㆍ문예총 등에서 대표가 나와 준비회의를 구성했다.
문화선전성에서는 내가 출석했다. 그때 최승희 딸도 무용가로서 베를린에 가 이름을 날렸다. 그때 마침 일본 요미우리신문사에서 최승희를 일본으로 초청하겠다는 타진이 있었다. 이에 대한 회의가 문화선전성에서 열렸는데 내가 참가했다.
이 회의에는 최승희의 남편 안막도 참가했다. 만일 최승희가 일본에 초청되어 가면 일본이나 한국에 망명해 평양에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최승희는 수상 김일성,민족보위상 최용건,내무상 박일우 등 북조선 최고권력자들에게 여자로서 참을수 없는 치욕을 당하고 있었다.
안막은 고민 끝에 빼빼 말라 건강이 좋지 못했다. 최승희는 나의 대학선배인 안막의 부인일뿐 아니라 나의 동경유학 시대 그녀는 우리 조선의 자랑이었다.
당시 우리 조선유학생들은 최승희 무용공연 때와 조선에서 축구선수단이 올때에는 조선 사람이라며 기를 펴고 자랑할 수 있었다. 나는 평양과 만주에서 강도질하고 돌아다니던 악당들에게 욕당하고 있는 최승희를 일본이나 한국으로 망명시키기 위해 최승희의 일본파견을 적극 주장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인 안막이 최승희의 일본 공연을 절대 반대했다.
안막도 최승희가 일본에 가면 두번다시 평양에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녀가 망명하면 안막은 평양에서 마저 죽는 것이었다. 안막은 그때 평양음악대학 학장을 하고 있었다.
결국 최승희의 일본파견은 안하기로 결정됐다.
일제때 서울의 기생촌은 다동이고 평양의 기생촌은 경제리이며,진주의 기생촌은 옥봉동이었다. 그때 모란봉 밑 대동강변의 경제리에는 기생제도는 없어져도 그 잔재는 남아 있었다.
이남에서 평양에 간 친구들중 군복을 입은 자는 인민군 총정치국 제4부장(민청관계) 이환기(대령)이고 제7부(적진와해공작)의 설정식ㆍ김동석(이들은 소령군복)과 최고사령부 정찰국의 최상린(소령군복)이 있었다. 최상린은 경주사람으로 유진오의 처질서이며 와세다대학 법학부 출신이었다.
나의 1년 후배로 나와 친했었던 그는 평양시내에 나오면 같이 한잔 하자고 종종 나를 찾아왔었다. 그 관계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당시 인민군 총정치국 제7부소령)도 알게 되었고 그외 몇몇 군인들도 알게되어 술도 같이 마시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40세쯤 된 만년 소령 두사람이 있었다. 한사람은 1937년 함남 보천보를 습격한 진짜 김일성의 부하이고 한사람은 최용건의 만주시대 부하였었다. 이들 두 소령은 매일 아무일도 하지 않고 소주만 마시고 있었다.
일자무식이었으나 사람들이 너무 순진해 나는 흥미를 느껴 그들을 만나면 소주를 사주고 같이 놀게 되었다. 하루는 셋이서 술을 마시는데 김일성의 부하가 최용건 부하를 보고 술이 취해 『동무는 상부동무가 살아 있어서 좋겠다』는 말을 했다.
나는 즉석에서 이 말을 받아 『동무는 직속상부인 김일성 동지가 있는데 더 좋지 않소?』하고 물었다. 그는 슬픈 상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눈치를 알아챘다. 그후 나는 일부러 그 소령과 단둘이서 술을 마시며 보천보 습격사건의 진상을 물어봤다.
그 당시 만주에는 의복감이 아주 귀해 조선에서 무명베를 많이 구해갔는데 김일성 부대에서는 군복감을 충당하기 위해 보천보를 습격하게 되었다.
압록강 뗏목을 타고 건너와 밤중에 보천보 시오리 지점에 도착해 박달ㆍ박금철의 상세한 보고를 듣고 자기는 습격조가 아니고 약탈한 옷감의 운반조로서 등에다 옷감을 지고 달아나는데 일본인들의 추격이 심해 압록강을 겨우 건너 보니 등에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그해 1월 드디어 일본군에 포위되어 양목정자라는 곳에서 싸웠으나 자기는 달아나다 보니 김일성 사장은 피를 흘리며 밀림속으로 기어들어 갔는데 전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자기들 남은 대원들은 41년에 소련땅으로 넘어갔는데 자기는 글을 전혀 몰라 소련 군인 집에 있다가 8ㆍ15가 되어서 평양으로 왔다는 것이었다. 지금 평양의 김일성이라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진짜 김일성 부하들은 한사람도 군관학교에 보내주지도 않고 밥만 먹이고 놀리고 있어 답답해 못살겠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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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