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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그레첸을 위한 진혼곡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그레첸은 끝내 아들의 결혼식을 보지 못했다. 아들의 결혼식은 한 달 뒤 한국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젊은 시절 수술한 유방암이 화근이었다. 몇 년 전 재발한 암이 온몸을 삼켰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검사도 받지 않았다. 한 달쯤 전에는 죽음을 예견했던 것 같다. 가진 패물을 모두 팔았다. 딸에게 넘겨주라며 주변을 정리했다고 한다. 그는 지난 토요일(17일) 새벽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누구는 자랑, 누구는 시위하라고
수천만 무명씨가 참고 견뎠겠나
누구를 위한 K방역인지 답할 때다

그레첸의 아들 저스틴은 원래 지난해 결혼식을 하려고 했다. 코로나19가 가로막았다. 1년을 연기했다. 나아질 줄 알았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어머니 그레첸은 더 기다리지 못했다. 더 나쁜 일은 그가 필리핀에서 열리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저스틴과 그의 부모는 모두 필리핀 사람이지만 미국 시민권자다. 필리핀은 코로나 방역을 위해 모든 외국인의 입국을 사실상 금지했다.
 
한국인 아내와의 결혼식 준비를 위해 한국에 와 있던 저스틴은 어머니가 사망한 그날 저녁 비행기를 서둘러 예약했지만, 필리핀 항공사는 그의 탑승을 허가하지 않았다. 필리핀 정부가 요구하는 비자를 받아오라고 했다. 목놓아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항공사 직원도 안타까워했다. “(공식 비자가 아니라도) 무슨 서류든 들고 오면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가족관계나 출생 증명을 떼려면 출생지인 캘리포니아로 가야 했다. 서류 준비에만 한 달 넘게 걸릴 터였다. 주말을 뜬눈으로 지낸 그는 월요일 아침 10시 문을 열자마자 주한 필리핀 대사관 문을 두드렸다. 대사관 측도 “방법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그는 다시 필리핀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필리핀행 비행기는 목요일과 토요일, 일주일에 딱 두 번 뜬다. 그는 지금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서류를 준비했다. 그도 안다. 이런 것만으로는 비행기의 문이 쉽게 열리지 않을 것이란 걸. 그래도 두드릴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마지막이 거기 있으니.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귀국을 기다리며 아내의 장례를 미루고 있다.
 
그레첸의 사연은 코로나가 여전히 관혼상제부터 생로병사, 인류의 시간과 공간을 강하게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법적으론 필리핀과 미국인의 얘기지만, 한국인 며느리까지 얽혀 남의 일이 아니게 됐다. 어디 그레첸뿐이랴. 며칠 전엔 베트남에서 코로나로 사망한 한국인이 하루 만에 화장됐다. 가족에게 통보도 없었다. 베트남·필리핀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위안할 수는 없다. 벌써 잊힌 기억이 됐지만, 1년 전 3월의 대구는 생사별의 현장이었다. 시신은 무조건 화장, 장례식도 없었다. 50년을 함께 살아 온 노부부는 손 한 번 못 잡고 사별해야 했다. 대구의 의료진은 그날의 기록들을 한 권의 책(『그곳에 희망을 심었네』)으로 엮었다.
 
돌이켜보면 이런저런 아픔을 저마다 가슴 한 곳에 묻으며 만들어낸 게 K방역이다. 마스크 착용률 94% 세계 1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견디고 견뎌 이룬 성과였다. 코로나 4차 대유행이 봇물 터지듯 터진 오늘,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참고 견뎠을까. 대통령의 자랑거리나 민노총의 8000명 시위를 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참고 견디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노영민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광화문 집회 참가자를 “살인자”라 불렀을 때, 그 과격한 표현마저 국민이 참고 넘어가 준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코로나 버티고는 얼마든지 더 할 수 있다. 마스크도 두 겹, 아니 세 겹 네 겹 더 쓸 수 있다. 2인 모임도 안 할 수 있다. 조상의 DNA가 있는데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 먹으며 100일인들 못 버티겠나. 그러나 누군가의 자랑거리를 위해, 누군가의 초법(超法) 시위를 위해 동굴에서 계속 살 수는 없다. 그러다 어느날 필리핀의 그레첸처럼 기약 없이 기다리고 기다리다 그냥 잊힐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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