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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의 시선] 고개 끄덕여도 'OK'로 여기면 착각…문 대통령 '침묵 어법'의 참뜻

 #2014년 9월 11일. 한때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였다가, 박 정부의 실정에 실망해 등 돌린 이상돈 새누리당 전 비대위원이 조선호텔 커피숍을 찾았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의원과 박영선 원내대표가 만남을 청해 나온 것이다. 두 의원은 당시 지방·재보궐선거에서 저조한 성적을 낸 새정치연합을 쇄신하기 위해 이 전 위원에게 비대위원장을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이날,문재인 의원은 "도와달라"는 말 외엔 별말이 없었고, 대화는 박 원내대표가 주도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8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해 발언을 마친 뒤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8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해 발언을 마친 뒤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 소식이 흘러나가자 새정치연합은 발칵 뒤집혔다. "새누리당 비대위원으로 박근혜 집권에 공을 세운 인사를 어떻게 모시느냐"고 친문 의원들이 난리를 쳤다. 다급해진 박 원내대표는 안경환 교수(서울법대)를 공동 비대위원장에 앉히는 절충안을 던졌지만, 씨도 안 먹혔다. 

책임져야 할 사안엔 침묵으로 일관
말없이 경청하면 달갑지 않다는 뜻
이낙연 '박근혜 사면'도 무관치않아

 그러나 문재인 의원은 침묵했다. 언론엔 "문재인이 사전에 이상돈을 만나 비대위원장 추대에 동의하고도 입을 닫았다"는 보도가 나왔다. 친문 세력이 박영선-이상돈 체제가 되면 입지가 약화할까 봐 반발하자 입장을 뒤집고 침묵 모드로 선회했다는 분석이었다. 결국 '이상돈 카드'는 물거품이 됐고 상처 입은 박 원내대표는 20여일 뒤 물러났다. 이 전 위원은 "박영선이 문재인 말을 너무 믿은 게 잘못이었다"고 회고했다.
 #2013년 가을에도 이 전 위원은 문재인 의원을 만났다. 문 의원이 남재희·윤여준 전 장관과 이 전 위원을 북촌의 한정식집에 초대했다. 이 전 위원은 2012년 총선·대선에서 적진에 있었던 자신을 초청했다면 뭔가 할 말이 있어서일 거라고 기대했지만,저녁 내내 문재인 의원은 "만나고 싶었다"고 했을 뿐 말이 없었다고 한다. 자리를 만든 사람이 침묵하니 발언권은 재담가인 남재희 전 장관이 독점했다고 한다. 이 전 위원은 "문 의원이 (말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아있어 옆에 있던 나도 불편함을 느꼈다"고 했다. 
 이 전 위원이 최근 출간한 회고록『시대를 걷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전 위원은 "문 대통령은 두 번의 만남에서 똑같이 말이 없고 뻣뻣하게 앉아만 있더라. 그게 (문 대통령의 요즘 스타일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나?"고 했다. 올 초 이낙연 전 총리가 이명박·박근혜 사면론을 꺼냈다가 청와대가 침묵하자 황급히 덮은 사건이나 정세균 전 총리가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동시 사퇴를 청와대에 건의했다가 흐지부지된 해프닝도 문 대통령 특유의 '침묵 어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국민도 문 대통령의 선택적 침묵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배우 윤여정의 오스카 수상 같은 희소식엔 빛의 속도로 입장을 낸다. 반면 자신이나 집권 세력에 책임이 돌아가는 문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평소 페미니스트임을 강조하던 대통령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에 대해선 "안타깝다"는 말 한마디 외엔 입을 봉했다. 노무현 청와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인사에게 문 대통령의 침묵 어법의 의미를 물었다. 이런 답이 돌아왔다.  
"문 대통령이 상대방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을 때는 그 얘기가 달갑지 않고, 본인의 관심사가 아니란 뜻이다. 만일 본인의 관심사이고 얘기가 그럴듯하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한다. 그런데 입을 닫고 있는 건, 관심은 없는데 주변에서 '만나보셔야 한다'고 하니까 그냥 만난 것이다. 물론 침묵만 하는 건 아니다.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고 '그럴듯한 의견이네요' 같은 덕담도 해준다. 하지만 그게 상대방 말을 받아들여 최종 결정을 내렸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그러니까 '문 대통령이 내 말을 경청하더라. 내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여기고 언론에 발표했다가 망신당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물론 문 대통령만의 잘못은 아니다. 원래 문 대통령이 그런 스타일임을 고려해서 얘기해야 하고, 대답을 확실히 들어야 한다. 혹자는 '문 대통령 만날 땐 녹음기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녹음기 들고 가봤자 달라질 건 없다. 청와대는 '대통령이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다'고 나올 게 뻔하다. 논란만 가중될 거다." 
 문 대통령은 그제 이준석 국민의힘 신임 대표에게 축하 전화를 했다. 4·7 재·보선 참패에 담긴 민심을 받아들여 '개혁'을 외친 민주당 초선 의원 5명이 친문들에게 '5적'으로 낙인찍혀 곤욕을 치를 때는 침묵하던 대통령이 남의 당 청년 대표에겐 "큰일 하셨다"며 치켜세웠다. 앞뒤가 안 맞아 보인다. 
어쨌든 문 대통령은 '협치'를 제안했으니 조만간 이 대표를 청와대에 초청해 영수회담을 열 공산이 크다. 그런 순간이 온다면, 이 대표는 참여정부 인사의 '문 대통령 침묵 독해법'을 숙지하고 가면 좋겠다. 도움이 꽤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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