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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 위에 펼친 태극기, 6·25때 폭격 막은 숨은 비결

백성호 기자 사진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해인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은?

 
불교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 깨달은 사람인 불(佛ㆍ부처),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인 법(法), 깨달음을 향해 가는 수행자인 승(僧). 이걸 삼보(三寶)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는 불ㆍ법ㆍ승, 삼보를 모신 세 사찰이 있다. 통도사와 해인사, 그리고 송광사다.  
 
해인사는 부처님의 법이 담긴 팔만대장경을 모시고 있는 법보 종찰이다. 대장판전 내부의 모습이다.

해인사는 부처님의 법이 담긴 팔만대장경을 모시고 있는 법보 종찰이다. 대장판전 내부의 모습이다.

 
통도사에는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그래서 통도사의 주법당에는 불상이 없다. 부처의 진짜 몸을 모시고 있으니, 굳이 불상이 필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송광사는 일명 ‘스님 사관학교’로 불린다. 수행자를 양성하는 대표적인 사찰이다. 고려 시대에는 16국사를 배출한 역사도 있다. 그래서 송광사는 ‘선방’에 방점을 찍는다.
 
통상 사찰 경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가장 중요한 전각이 위치한다. 그 전각만 봐도 이 사찰에서는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대부분 사찰은 석가모니 부처를 모신 대웅전이나 빛을 뜻하는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이 주법당이다. 그래서 이 법당이 사찰 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는다. 그런데 송광사는 다르다. 주법당보다 더 높은 곳에 ‘설법전(說法殿)’이 있다. 송광사의 선원이다. 그래서 송광사를 승보 종찰이라 부른다.  
 
해인사의 주법당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이다. 그 뒤에 지붕이 살짝 보이는 전각이 팔만대장경을 모신 대장판전이다.

해인사의 주법당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이다. 그 뒤에 지붕이 살짝 보이는 전각이 팔만대장경을 모신 대장판전이다.

 
그럼 해인사는 어떨까. 해인사의 주법당은 대적광전이다. 화엄종 계통으로 창건된 사찰이라 주법당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신다. 그런데 대적광전 바로 뒤에, 훨씬 더 높은 언덕에 위치한 전각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이다. 그래서 해인사는 불보나 승보가 아닌 법보 종찰이라 부른다.  
 
팔만대장경은 해인사의 상징이다. 팔만대장경 목판은 국보이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전각인 대장판전(장경각) 역시 국보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지금껏 일반인은 팔만대장경 목판을 직접 보거나, 대장판전 안에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문화재 보존 등을 이유로 일반에 공개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해인사가 방침을 바꾸었다. 10일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만난 주지 현응 스님은 “해인사에서 국민 여러분께 팔만대장경을 개방하고 직접 참관하게 하는 결정을 내렸다”며 “팔만대장경의 국민적 개방은 실로 팔만대장경이 조성된 지 약 800년, 이곳 해인사에 봉안된 지 600년 만에 처음 시도하는 일이다”고 말했다.  
 
직접적 계기는 코로나19 사태다. 현응 스님은 “종단에서도 코로나 방역으로 지친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진을 위한 템플스테이를 많이 해달라고 요청했다”며 “팔만대장경이 모셔진 장경판전에 들어서면 참 고요하다. 호국안민의 영적인 기운도 느껴진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지친 국민 여러분이 위안과 치유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한적 개방을 결정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해인사에는 일곱 차례나 큰 불이 났다. 왼쪽에 보이는 주법당이 불에 타버릴 때도 있었다. 오른쪽 가파른 계단 위에 있는 건물이 팔만대장경을 모신 대장판전이다. 주법당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해인사에는 일곱 차례나 큰 불이 났다. 왼쪽에 보이는 주법당이 불에 타버릴 때도 있었다. 오른쪽 가파른 계단 위에 있는 건물이 팔만대장경을 모신 대장판전이다. 주법당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문화재 개방을 하는 건 아니다. 해인사는 지난해 11월부터 경남 지역 초ㆍ중ㆍ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20~30명씩 주 4회 시범적으로 개방을 실시했다. 장경판전을 둘러본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감동!”을 연발했다. 문화재 관리와 보존 차원에서도 별문제가 없었다. 이걸 보며 해인사는 큰 용기를 얻었다. 결국 확대 개방을 결정했다.  
 
해인사는 오는 19일부터 팔만대장경과 대장판전을 사전 예약한 한정된 인원을 대상으로 일반 공개를 실시한다. 해인사 총무국장 진각 스님은 "탐방 신청은 해인사 홈페이지(http://www.haeinsa.or.kr/) ‘팔만대장경 탐방 예약’ 배너를 통해 온라인으로 접수할 수 있다.장경판전 내부를 순례할 수 있는 탐방 프로그램을 매주 토ㆍ일요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 하루 2회 운영한다"고 말했다. 신청이 쇄도해 현재 7월 탐방까지 예약이 끝난 상태다. 국민개방을 앞두고 17~18일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대장판전 내부를 미리 둘러보았다.  
 

해인사에 일곱 차례 큰불 날 때도 팔만대장경은 안전해  

 
해인사로 가려면 굽이굽이 계곡 길을 거쳐야 한다. 계곡 옆으로 난 산책길인 소리길이 멋지다. 콸콸콸, 쉼 없이 쏟아지는 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줄곧 나란하게 걷는 숲길이다. 간단하게 걸으면 40분, 좀 길게 걸으면 1시간 20~40분가량 걸린다. 신라 시대 최치원이 이 소리길을 따라 시(詩)를 남겼고, 이 계곡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막상 가보면 “이래서 그랬구나!”란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온다.  
 
해인사 초입에 있는 큰 바위. 이곳에서 팔만대장경 국민개방 프로그램 안내가 시작된다.

해인사 초입에 있는 큰 바위. 이곳에서 팔만대장경 국민개방 프로그램 안내가 시작된다.

일주문을 지나 봉황문과 해탈문 등을 거쳐서 올라가면 해인사 경내가 펼쳐진다.

일주문을 지나 봉황문과 해탈문 등을 거쳐서 올라가면 해인사 경내가 펼쳐진다.

 
그렇게 소리길을 쭉 올라가면 해인사 일주문이 나온다. ‘팔만대장경 사전예약 국민개방’ 프로그램의 출발점은 해인사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바위다.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고려대장경 판전’이란 글귀가 바위에 큼직하게 새겨져 있다. 그 앞에서 해인사 승가대학 학감 법장 스님이 마이크를 잡고 안내를 시작했다.  
 
법장 스님은 “해인사의 ‘해인(海印)’은 절대 평등과 무차별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해인’은 글자 그대로 바다에 찍는 도장이다. 불교에서 하늘의 달은 진리를 상징한다. 그달이 땅 위의 강과 바다에 그대로 비쳐서 “쾅!”하고 도장을 내려찍는다는 의미다. 세종 때 지은 가사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도 마찬가지다. 하늘의 달이 천 개의 강을 비추며 도장을 찍는다는 의미다. 깨달음을 이루면 하늘의 달이 내 안에 들어와, 또 하나의 달이 되는 이치와 같다.  
 
해인사는 802년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됐다. 화엄종 계통의 천년고찰이다. 입구에는 창건 당시 심었다고 전해오는 아름드리나무가 고사목으로 남아 있다. 해인사는 산악 구조에다 올라가는 계단도 많았다. 사찰로 들어가는 계단이 108개란 얘기도 있지만, 실은 120개가량 됐다. 해인사 입구에서 봉황문-해탈문 등을 거쳐서 경내로 들어섰다. 가파른 오르막이라 아래쪽에 서 있을 때는 위가 보이질 않고, 막상 위에 도착하면 아름다운 경내 풍경에 “아!”하고 탄성이 터지는 식이었다.  
 
해인사에는 지금껏 일곱 차례의 큰 화재가 났다. 주법당이 불에 타 소실될 때도 많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대장판전은 단 한 번도 불에 탄 적이 없다. 주법당 바로 뒤에 대장판전이 있는데도 말이다.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 국민개방을 앞두고 부처님에게 아뢰는 고불식이 대적광전에서 열리고 있다.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 국민개방을 앞두고 부처님에게 아뢰는 고불식이 대적광전에서 열리고 있다.

 
 ‘팔만대장경 국민 개방’을 앞두고 대적광전에서 고불식(告佛式)이 열렸다. 주지 현응 스님은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전 몽고병들이 우리나라 강토를 침략해왔을 때, 이에 맞서 나라와 백성은 자비의 가르침으로 한마음 되어 국난을 극복했다. 그 어질고 강인했던 호국 정신의 결정체가 바로 ‘팔만대장경’이다”며 “팔만대장경에는 자비와 지혜의 가르침이 가득하다. 따라서 팔만대장경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인종과 민족, 그리고 여러 국가가 이해관계와 이념으로 빚어내는 각종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서 자유, 평등, 행복을 이루게 하는 정신이다”고 의미를 짚었다.  
 

대장판전에 습기가 차지 않는 비밀은?

 
고불식이 끝나고 해인사 스님들과 함께 대적광전을 나왔다. 바로 뒤 높다란 언덕 위에 장경판전이 우뚝 서 있었다. 아흔 살이 되신 노스님도 지팡이를 짚고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계단을 올랐다. 팔만대장경이 불러일으키는 신심(信心)은 그만큼 컸다.  
 
대장판전 주위에는 경비원들이 서 있었다. 20명이나 되는 인원이 24시간 3교대로 팔만대장경을 지킨다고 했다. 여기에 해인사 스님들의 야경 인원까지 합하면 경비는 더욱 삼엄하다.  
 
팔만대장경을 모신 대장판전으로 스님들이 올라가고 있다. 아래 사진은 대장판전 중 뒷동인 법보전.

팔만대장경을 모신 대장판전으로 스님들이 올라가고 있다. 아래 사진은 대장판전 중 뒷동인 법보전.

 
대장판전 입구에 섰다. 전각은 앞동과 뒷동으로 나뉘어 있었다. 앞동은수다라(修多羅)전, 뒷동은 법보(法寶)전이다. 수다라는 경전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인  ‘수트라(SUTRA)’에서 음을 빌려 쓴 한자식 표기다. 수다라전에는 주로 아함경 등 초기 경전이 보관돼 있고, 법보전에는 대승경전을 비롯한 대장경이 보관돼 있다.  
 
대장판전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확 다가온 건 ‘실감’이었다. 사진에서만 보던 경판을 직접 볼 때 밀려오는 감동의 파도는 컸다. 더구나 몽골과의 전쟁 중에 새겨진 경판이다. 그건 외침에 맞서 고려의 백성이 호국의 일념으로 새겨넣은 기도이기도 했다.  
 
합천 해인사에 모셔진 팔만대장경. 스님들이 대장판전의 법보전 내부를 돌면서 기도하고 있다.

합천 해인사에 모셔진 팔만대장경. 스님들이 대장판전의 법보전 내부를 돌면서 기도하고 있다.

 
당시 팔만대장경 조성은 첨단을 달리는 작업이었다. 대장경은 지식과 지혜의 최고 결집체다. 일일이 손으로 필사하던 시절에 인쇄용 목판을 대규모로 조성하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그야말로 고도의 하이테크 작업이었다. 이곳에 보관된 경판의 개수만 무려 8만1258장에 달한다. 앞뒤 양면에 새긴 경판 하나를 인쇄하면 책으로 4페이지 분량이 나온다. 경판 한 면을 인쇄해서 반으로 접으면 책으로 2페이지다. 8만1258장의 경판을 모두 인쇄하면 6791권의 책이 나온다.  
 
또 놀라운 건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판전 건물의 구조였다. 해인사는 해발 700m의 고지대에 있다. 판전의 안과 밖은 온도 차이가 났다. 바깥이 더우면 안은 시원하고, 바깥이 추우면 안은 따듯하다고 했다. 통상 3℃가량 온도 차이가 난다고 했다.  
 
전각을 살펴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판전 벽에는 아래에도 창이 있고, 위에도 창이 있었다. 그런데 창의 크기가 달랐다. 상부의 창은 큰데, 하부의 창은 작았다. 남쪽이 그렇다면 북쪽은 반대였다. 상부의 창은 작고, 하부의 창은 크다. 그런 구조 덕분에 바람이 잘 통하고, 습기가 안 차고, 환기가 더 잘된다고 했다. 나무와 바람과 흙의 조화를 이해한 우리 선조의 놀라운 슬기다.  
 
해인사 주지 현응 스님이 대장판전 내부에서 팔만대장경 경판과 국민개방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해인사 주지 현응 스님이 대장판전 내부에서 팔만대장경 경판과 국민개방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장판전의 벽에 만든 창. 위쪽의 창과 아래쪽의 창은 환기를 위해서 크기가 서로 다르다.

대장판전의 벽에 만든 창. 위쪽의 창과 아래쪽의 창은 환기를 위해서 크기가 서로 다르다.

대장판전의 위와 아래에 난 창의 크기가 서로 다르다. 바람이 더 잘들고, 습기를 막기 위해서다.

대장판전의 위와 아래에 난 창의 크기가 서로 다르다. 바람이 더 잘들고, 습기를 막기 위해서다.

 
박정희 대통령 때 팔만대장경을 현대식 건물로 옮기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다. 해인사에서 200m쯤 떨어진 곳에 콘크리트 건물을 짓고, 비상시를 대비해 지하에 수장고도 지었다. 문제는 습기였다. 아무리 해도 습기가 차는 걸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팔만대장경 이전 계획이 전면 취소됐다. 정부 소유인 해당 콘크리트 건물은 현재 해인사에서 선원으로 사용 중이다.  
 

한국전쟁 때 폭격 피한 숨은 이야기

 
해인사 스님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전쟁 때였다.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인민군이 나타나던 시절이었다. 당시 해인사보다 해발이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산속 암자에 인민군이 머물렀다고 한다.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만 되면 산밑으로 내려와 활동했다. 인적 없는 산속에서 해인사는 그들에게 좋은 아지트였다.  
 
국군과 연합군에는 골치였다. 해인사를 폭격해야만 인민군의 아지트를 없앨 수가 있었다. 문제는 팔만대장경을 모신 대장판전(장경각)이었다. 거기에 폭탄이 떨어지면 팔만대장경 경판과 대장판전이 모두 잿더미가 될 참이었다.  
 
퇴설당에서 만난 해인사 방장 원각 스님은 “그런 상황에서 해인사 스님들이 지혜를 모았다고 한다. 당시에 종이로 된 밀가루 포대 자루가 있었다. 미군이 밀가루를 나누어줄 때 쓰던 자루였다. 해인사 스님들이 그걸 붙이고, 또 붙여서 커다랗게 네모난 종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태극기를 그렸다”며 “그렇게 그린 태극기를 낮에는 팔만대장경을 모신 장경판전 지붕 위에 올라가 펼쳐놓았다고 한다. 연합군 폭격기가 그걸 보고서 폭격을 하지 않도록 말이다. 물론 밤에 인민군이 내려올 때는 그걸 치워서 숨겨야 했다”고 설명했다. 팔만대장경에 얽힌 숨은 뒷이야기였다. 원각 스님은 “연세가 아주 많으신 노스님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고 말했다.
 
해인사 방장 원각 스님은 "팔만대장경의 핵심은 한 마디로 중도다"라고 말했다.

해인사 방장 원각 스님은 "팔만대장경의 핵심은 한 마디로 중도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원각 스님은 팔만대장경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핵심을 간추려 설명했다. “팔만대장경은 방대하다. 그런데 그 핵심은 간결하다. 한 마디로 ‘중도(中道)’다”라며 “이것과 저것의 중간이 중도가 아니다. 이것도 내려놓고, 저것도 내려놓을 때 우리의 본래 바탕이 드러난다. 그 바탕에서 지혜가 나온다. 진보는 진보를 내려놓고 본래 입장으로 돌아가라. 보수는 보수를 내려놓고 본래 입장으로 돌아가라. 그럼 소통과 상생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그게 중도다”라고 강조했다.  
 
합천=글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사진 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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