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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오른손이 한 일, 어떡해야 왼손이 모를까

 

[백성호의 예수뎐]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마태복음 6장 9~10절)
 
 
예루살렘의 올리브 산 정상에는 ‘주기도문 교회(The Church of the Pater Noster)’가 있다. 교회 뜰에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가지에 앉은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지저귐을 뚫고 정적이 흘렀다. 2000년 전 예수는 이곳에서 기도를 했다.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하고, 제자들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일러주었다. 그게 ‘주님의 기도(주기도문)’이다. 제자들을 위해 따로 만든 기도문이 아니라 예수가 직접 읊었던 기도문 그대로이다.  
 
그러니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의 눈’이 담겨 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예수의 눈’을 만나고, 다시 그 눈을 통해 ‘하늘의 눈’을 만난다.
 
예수는 율법에 사로잡혀 기도의 본질을 망각한 이들을 향해 "위선자야!"라고 꾸짖었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중앙포토]

예수는 율법에 사로잡혀 기도의 본질을 망각한 이들을 향해 "위선자야!"라고 꾸짖었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중앙포토]

 

④오른손이 하는 일, 어떡해야 왼손이 모를까

 
예수는 왜 기도를 강조했을까. 마태복음에는 예수가 기도하는 위선자들을 꾸짖는 대목이 나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마태복음 6장 5절)
 
당시에는 그런 사람들이 꽤 있었다. 더구나 바리새인들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기도를 올렸다. 길을 가다가도 정해진 시간만 되면 멈춰 서서 기도를 했다. 그때는 왕이 인사를 건네도 소용이 없었다. 기도가 우선이었다. 기도를 마친 다음에야 왕에게 절을 했다.  
 
유대교에 정통한 유대인이자 개신교 신학자인 알프레드 에더스하임은 저서 『유대인 스케치(Sketches of Jewish social life)』에서 “바리새인들이 기도를 할 때에는 심지어 뱀이 발목을 타고 올라와도 내버려 두어야 했다”면서 “하루에 100번의 축복기도를 올리면 탁월한 신앙심을 보이는 표준으로 여겨졌다”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구시가지. 통곡의 벽 너머 솔로몬 성전이 있던 자리에 이슬람 모스크가 보인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구시가지. 통곡의 벽 너머 솔로몬 성전이 있던 자리에 이슬람 모스크가 보인다.

 
그러니 예수가 ‘기도하는 위선자’라고 공격한 이들은 바리새인들이 아니었을까. 당시 바리새인들은 기도는 길면 길수록 좋다고 여겼다. 에더스하임은 “(바리새인들은) 기도가 길면 반드시 하늘에 전달되고, 풍성한 기도는 수명을 늘려준다고 생각했다. 거룩한 이름으로 축복기도를 마칠 때마다 그 횟수만큼 특별한 종교적 공로가 쌓인다고 믿었다”라고 설명했다.
 
어쩌면 우리도 바리새인을 닮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특히 기도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따질 때 말이다. 그 기준은 유창함이다. 매끄러운 말투로 막힘없이 기도할 때 우리는 기도를 참 잘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긴 기도’를 ‘긴 축복’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바리새인들도 그랬다. 기도의 격식과 양을 중시했다.
 
우리나라 개신교 교회에서는 ‘40일 특별 새벽기도’, ‘100일 특별 새벽기도’를 종종 한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석 도장을 받고 나면 왠지 뿌듯해진다. 무언가 특별한 종교적 공로가 쌓이는 느낌을 받는다. 일부 교회에서는 단 하루도 결석을 하지 않은 이들에게 개근상으로 성경책을 주기도 한다. 표지에 ‘40일 특별 새벽기도’라는 문구가 찍혀 있는 성경책이다.  
 
일종의 훈장인 셈이다. 우리는 그런 성서의 표지를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적은 없을까. 다른 사람 눈에 띄도록 표지를 바깥으로 하여 들고 다닌 적은 없을까. 남들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아멘!”이나 “할렐루야!”를 외친 적은 없을까. 그런 행동이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는 바리새인들과 뭐가 다를까.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은 뱀이 발목을 타고 올라와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일화를 다룬 제임스 티소의 작품. [중앙포토]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은 뱀이 발목을 타고 올라와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일화를 다룬 제임스 티소의 작품. [중앙포토]

 
예수의 기도는 달랐다. 오히려 그런 이들을 “위선자”라고 불렀다. 그들의 기도는 마음을 뿌듯하게 한다. 그런 뿌듯함은 늘 문제가 된다. 그걸 먹고서 에고가 자라기 때문이다. 예수의 기도는 방향이 달랐다. ‘나’를 키우는 기도가 아니었다. 기도를 통해 ‘나’가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져서 결국은 그리스도 안으로 사라지는 기도였다. 예수는 그런 이들을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 불렀고,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럼 의문이 생긴다. ‘살다 보면 뿌듯함이 생길 수도 있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할 수가 있나.’ 맞는 말이다. 뿌듯함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대신 그때그때 ‘포맷’해야 한다. 마음에 뿌리를 내려 에고를 키우는 거름이 되기 전에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포맷을 할 수 있을까. 하느님을 향해 영광을 돌리면 된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으므로. 그게 ‘신을 향한 위탁’이다. 그때 비로소 포맷이 이루어진다.
 
자선을 베풀 때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복음 6장 3~4절)라고 했다.  
 
오른손도 나의 손이고 왼손도 나의 손이다. 어떻게 한쪽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쪽 손이 모를 수가 있을까. 여기에는 대체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
 
예루살렘에 있는 주기도문 교회를 찾은 순례객들이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벽면에 새겨진 주님의기도(주기도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예루살렘에 있는 주기도문 교회를 찾은 순례객들이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벽면에 새겨진 주님의기도(주기도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수도자들도 꽤 있다. 그런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한 뒤에 언론 인터뷰도 하지 않고 바깥에 이름을 알리지도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예수의 메시지를 소극적으로 해석한 게 아닐까. 오히려 문자주의적 해석이 아닐까.  
 
예수 메시지의 핵심은 ‘세상에 알리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내 마음에 남느냐, 남지 않느냐’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몰라도 내 마음에 뿌듯함이 남으면 어찌하나. 그 뿌듯함이 뿌리를 내리면 어찌하나. 그걸 먹고 에고가 자라면 또 어찌하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라고 할 때의 왼손은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 몰라야 한다. 기억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억에 달라붙어 있는 뿌듯함을 털어내라는 말이다. 예수는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라고 했다. 자선은 어떻게 숨겨둘 수 있을까. 내 마음이 그것을 틀어쥐고 있지 않을 때 자선이 숨는다. 내 안의 ‘뿌듯함’이 포맷될 때 비로소 자선을 숨겨두게 된다.  
 
기도도 똑같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복음 6장 6절)
 
예수는 왜 골방으로 들어가라고 했을까. 그리고 왜 문까지 닫으라고 했을까. 왜 그냥 ‘아버지께’가 아니라 ‘숨어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했을까. 바리새인들은 ‘회당’이나 ‘광장’에서 기도했고, 예수는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했다. 회당이나 광장은 바깥이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바깥을 향한다.  
 
르네상스 시대 독일을 대표하는 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의 '기도하는 손'. 뒤러는 '독일 미술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중앙포토]

르네상스 시대 독일을 대표하는 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의 '기도하는 손'. 뒤러는 '독일 미술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중앙포토]

 
예수의 기도는 다르다. 골방을 향한다. 그러면 그 골방은 어디일까. 그렇다. 나의 내면이다. 내 안을 향해 깊이, 더 깊이 닻을 내리는 일이다. 그럼 “문을 닫으라”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바깥을 봉쇄하라는 말이다. 기도의 방향은 내면을 향해야 하니 말이다. 그게 예수가 설한 기도다.
 
그러면 아버지는 어디에 숨어 계실까. 내 안이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 하느님이 창조했던 ‘아담의 속성’ 다시 말해 ‘신의 속성’이 숨어 있다. 예수는 그곳을 향해 기도의 닻을 내리라고 했다. 기도가 바깥을 향하면 흩어지고 만다. 내면을 향할 때 기도가 모아진다. 그래서 예수는 골방의 문까지 닫으라고 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가 ‘숨어 계신 아버지’를 향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통하기 때문이다.
 
주기도문 교회의 벽에는 ‘주님의 기도’가 새겨져 있었다. 한두 편이 아니었다. 100가지가 넘는 언어로 ‘주님의 기도’가 적혀 있었다. 돌판의 개수도 그만큼 많았다. 한국어로 된 기도문을 찾아보았다. 한참 걸려 회랑 안쪽에서 찾을 수 있었다. 뜻밖에도 두 개였다. 하나는 가톨릭의 기도문이고, 다른 하나는 개신교의 기도문이었다.
 
주기도문 교회에는 한국어로 된 개신교의 주기도문이 있다.

주기도문 교회에는 한국어로 된 개신교의 주기도문이 있다.

 
가톨릭의 주님의기도 역시 예루살렘 주기도문 교회에 있다.

가톨릭의 주님의기도 역시 예루살렘 주기도문 교회에 있다.

 
 
그 앞에 서서 눈을 감았다. 어느 종교에나 기도가 있고 신자들은 기도를 한다. 기도란 무엇일까. ‘바람’이다. 무엇을 바라는 걸까. 하나 되기를 바라는 일이다. 무엇과 무엇의 하나 됨일까. 땅과 하늘의 하나 됨이다. 이를 통해 나와 하늘이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그런 하나 됨이다.
 
〈5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짧은 생각
기도란 무엇일까요.  

 
마음을 던지는 일입니다.  
하늘을 향해 내 마음을 던지는 일입니다.  
그 마음이 하늘에 가 닿기를 바라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움직이기를 고대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던집니다.  
 
나의 바람,
나의 욕망,
나의 집착,  
나의 가짐을  
신의 이름을 빌어 하늘에 던집니다.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얼마 전 선종하신 정진석 추기경께 물은 적이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추기경님, 기도가 무엇입니까?”
 
정 추기경께서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진정한 기도란 무엇입니까?”
 
정 추기경님의 답은 이랬습니다.  
 
“사람들은 기도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간절히 구합니다. 그게 이루어지면 ‘하느님이 계시다’고 합니다.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느님이 안 계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는 겁니다. 지금 하느님께서 내게 뭘 원하시나, 그걸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도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찬찬히 짚어보면 그렇습니다.  
내가 원하는 걸, 하느님이 해주길 바랍니다.  
거기서는 내가 주인이고, 하느님이 종입니다.  
 
추기경님은 기도를 거꾸로 하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이 원하는 걸, 내가 하라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걸 통해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가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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