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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의 실크로드에 길을 묻다] 9세기 아랍 지리학자 “중국 맨 끝 너머에 신라가 있다”

한반도와의 오랜 인연

불과 한 세기 반 전만 해도 서양에선 우리나라를 ‘고요한 아침의 나라’ 혹은 ‘은자의 나라’라고 불렀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해 온갖 나라와 교역하고 있는 오늘날과 비교하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과연 한반도는 고대 이래로 유라시아 대륙을 이어준 실크로드와 단절된 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왔던 것일까.
 

삼국시대부터 지속적 문물 교류
서역 유리·금세공 기술 받아들여
몽골은 고려를 ‘솔랑가’로도 표기
마테오리치 지도에 ‘조선’ 첫 등장

중세 아랍 지리학자 이드리시가 만든 ‘이드리시 세계지도’(1154). 왼쪽 상단에 신라로 추정되는 나라가 표기돼 있다. [사진 미국 의회도서관]

중세 아랍 지리학자 이드리시가 만든 ‘이드리시 세계지도’(1154). 왼쪽 상단에 신라로 추정되는 나라가 표기돼 있다. [사진 미국 의회도서관]

실크로드 역사를 살펴보면 한반도는 유라시아 교류 네트워크에서 결코 고립된 지역이 아니었다. 실크로드 동쪽 끝에 있었다는 지리적 한계는 분명했지만, 서방으로부터 흘러들어온 문물이 부단히 한반도를 적셔왔다. 유럽이나 서아시아에서도 중국이라는 제국 너머에 있는 한반도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고, 우리도 중국 너머 서방 세계와 미약하나마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섬 6곳에 신라로 보이는 ‘(min) al-Sila’가 적혀 있다.

섬 6곳에 신라로 보이는 ‘(min) al-Sila’가 적혀 있다.

신라 도읍 경주에서 출토된 유물은 이런 사실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예를 들어 4~6세기 지배층 무덤에서 많은 유리 제품이 나왔는데, 재료나 제작기법 혹은 양식으로 볼 때 그 상당수는 지중해 동부 연안이나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진 ‘로만 글래스’가 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식 보검·금팔찌·금관 등 장신구의 금세공 기술과 모티프 역시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 전래한 것이다.
 
신라 처용은 서아시아 무슬림의 후예?
 
통일신라 시대에 들어서면 서구와의 접촉을 시사하는 문헌 기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삼국유사』에는 8세기 후반 하서국(河西國) 사람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현재 중국 간쑤성(甘肅省)에서 신장성(新疆省)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연변의 어느 지역으로 추정된다. 최치원은 ‘향약잡영(鄕樂雜詠)’이라는 글에서 ‘속독(束毒)’의 무용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는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부근의 지방인 소그드(Soghd)를 가리킨다. 이용범·정수일 같은 학자는 신라 설화의 주인공인 처용(處容)에 대해서도 9세기 말 서아시아 무슬림이 바다를 거쳐 신라에 도래한 사람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실제로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土俑)들은 얼굴 모양과 수염 모습이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인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곤여만국전도’(1602)에 등장한 조선.

‘곤여만국전도’(1602)에 등장한 조선.

서방에서도 신라를 알고 있었다. 9세기 무렵부터 아랍권 문헌에 신라에 대한 언급이 자주 보이기 시작한다. 아랍 지리학자인 이븐 후르다드비가 쓴 글에 “중국의 맨 끝 깐수라는 곳의 맞은편에 신라(al-Silla)가 있다”라는 대목이 나타난다. 그의 기록은 이후 많은 무슬림 지리학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됐는데, 흥미롭게도 신라는 중국 너머의 바다에 있는 섬으로 인식됐다. 알 이드리시(al-Idris)가 그린 세계지도에 신라가 여섯 개의 섬으로 표시돼 있다.
 
하지만 신라의 정확한 실체는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12세기 초 페르시아 지방의 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에 중국 연안에 있는 ‘바실라(Basila)’ 섬이 등장하는데, 이희수 교수는 이것이 신라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앞서 말했듯이 9세기 이래 신라를 섬이라고 여겼던 아랍인의 판단이 그대로 투영된 셈이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나온 유리병(국보 193호). 지중해 일대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나온 유리병(국보 193호). 지중해 일대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아랍-페르시아인은 신라라는 나라를 주로 해로를 따라 중국을 왕래한 상인을 통해 전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는 육로를 통해서도 서방에 알려졌다. 북방 초원 유목민 돌궐인들은 8세기 전반에 자신들의 문자로 비문들을 새겨서 남겼는데, 거기에 ‘뵈클리(Bökli)’라는 명칭이 보인다. 돌궐의 군주가 사망했을 때 여러 나라에서 조문 사절단을 보냈는데, 그중에 동쪽 해가 뜨는 곳에 있는 뵈클리의 군주(카간)도 사신을 보냈다는 내용이다. 이 말의 어원은 논란이 많지만 대체로 고구려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한반도 주민들은 몽골 초원 너머 중앙아시아까지도 알려졌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도시 외곽에는 몽골인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구도시, 즉 아프라시압 언덕이 있다. 그곳에서 7세기 중반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궁전 벽화가 발견됐는데, 한반도에서 간 것으로 추정되는 두 명의 사신이 묘사돼 있다. 머리에 새 깃털이 꽂힌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허리에는 환두대도(環頭大刀)를 차고. 또 손을 소매 안에 가지런히 모아 넣은 모습이다. 여러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고구려에서 파견한 사신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10세기 한반도에는 고려 왕조가 들어섰다. ‘코리아(Korea)’의 기원이 된 고려가 서방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방 문헌에 고려가 확인된 것은 이보다 조금 뒤늦은 13세기 중반부터다.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대부분을 정복하게 되자 위협을 느낀 유럽이 사신들을 동방으로 파견했다. 1240~50년대에 몽골리아를 방문한 수도사 카르피니(Carpini)나 루브룩(Rubruck) 등이 여행기를 남겼는데, 거기에 처음으로 ‘카울레(Caule)’ 혹은 ‘카울리(Cauli)’가 등장한다. 이들보다 20~30년 늦게 중국에 온 마르코 폴로의 글에도 ‘카울리(Cauli)’ 지명이 보이지만 아쉽게도 별다른 설명을 찾아볼 수 없다.
 
‘코리아’가 서방에 알려진 건 13세기
 
경주 용강동에 출토 된 토용. 얼굴과 수염 모습이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인을 닮았다.

경주 용강동에 출토 된 토용. 얼굴과 수염 모습이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인을 닮았다.

몽골이 지배한 13세기에는 ‘고려’ 이외에 또 다른 명칭이 사용됐다. ‘솔랑가(Solanga)’, 혹은 ‘솔랑기(Solangi)’다. 오늘날 몽골에서 우리나라를 ‘솔롱고스(Solongos)’라고 부르는 것도 여기서 비롯했다. 현대 몽골어로 ‘무지개’를 뜻하지만 13세기에도 그런 뜻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명칭은 당시 몽골인이 남긴 『몽골비사』를 비롯해 카르피니와 루브룩의 여행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카르피니는 몽골 제국 수도인 카라코룸에서 러시아와 조르지아의 군주 및 수많은 술탄과 함께 ‘솔랑기의 수령’도 보았다고 썼는데, 이는 고려에서 파견한 왕족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몽골제국 시대에는 한반도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카울리’와 ‘솔랑기’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채 혼용되고 있었다. 페르시아 역사가 라시드 앗 딘(1247~1318)의 글에도 이 두 가지 명칭이 동시에 사용됐다.
 
이처럼 한반도는 실크로드와 끊임없는 관계를 유지해왔다. 예컨대 근대 세계지도의 효시로 꼽히는 이탈리아 마우로 신부(Fra Mauro·1400~64)가 1459년 만든 지도가 있다. 한반도 모습이 막연하게 표현돼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반도로서의 형태는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16세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사정은 급변했다. 1550~60년대에 제작된 유럽 지도에서 한반도는 역삼각형 모양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테오 리치가 그린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1602)’에 한반도의 정확한 모습과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이 기록됐다.
 
실크로드 역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반도는 결코 고립된 은둔의 존재가 아니었다. 동서 문물 교류가 끊임없이 진행됐다. 한반도 국가와 주민도 어렴풋하게나마 서방에 알려졌다. 다만 우리가 스스로 나서서 서방과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모색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반도를 ‘발견’하고 그것을 세계지도 속에 분명히 자리매김한 것은 대항해 시대를 주도한 유럽인들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12세기 이슬람 세계지도에 등장한 신라
이드리시 세계지도(1154)라는 유명한 중세 지도가 있다. 북아프리카 모로코 출신의 아랍 지리학자 무함마드 알 이드리시(1100~65)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섬을 통치하던 로저왕(Roger II·재위 1130~54)의 부탁을 받고 완성한 지도다.
 
이 지도는 고도로 발달한 이슬람권의 지리 지식을 망라한 당시 최고 수준의 세계지도다. 지도에서 위쪽이 남방이고 아래쪽이 북방이다.  중세 이슬람 문명에선 성지 메카가 남쪽으로 처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방위를 반대로 정했다. 이드리시 지도 좌측 상단을 보면 중국 남부 연안에 섬 여러 개가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 6개에 신라로 추정되는 ‘(min) al-Sila’라는 이름이 표기돼 있다.
 
김호동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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