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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유상철을 기억하는 두 가지 키워드 ‘멀티’ ‘투쟁심’

 
 
고(故) 유상철은 한국 축구에서 의미 있는 캐릭터였다.  
  
그는 한국 축구 최초의 ‘멀티 플레이어’다. 유상철의 프로 기록을 보면 독특한 점이 눈에 띈다. 유상철은 K리그에서 세 차례 시즌 베스트11에 선정됐는데, 그때마다 포지션이 모두 달랐다. 1994년에는 수비수로, 98년에는 미드필더로, 2002년에는 공격수로 베스트11에 이름을 올렸다. 유상철이라는 선수는 골키퍼를 제외한 어디에 넣어도 플레이할 수 있었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축구에서 ‘멀티 플레이어’라는 개념은 낯설었다. 일부 지도자나 전문가는 유상철에게 “한 포지션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한때 ‘홈런왕 유상철’이라는 게임이 나온 적이 있다. 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에서는 빈틈이 날 때 공격에 가담하기 위해서는 중거리 슈팅을 날릴 수밖에 없고, 이 슈팅이 정확도가 다소 떨어지는 것인데 당시만 해도 포지션별 선수의 움직임과 활동 범위에 대한 자세한 이해가 부족했기에 나왔던 오해의 단면이다.  
  
유상철의 멀티 능력을 높게 사고 돋보이게 한 주인공은 거스 히딩크 전 대표팀 감독이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유상철은 수비가 강하고 역습을 주로 했던 당시 한국팀에서 큰 역할을 했다. 
전술 이해도가 높고, 멀티 능력을 갖춘 유상철은 히딩크 감독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8일(한국시간) 영국 ‘미러’는 유상철의 별세 소식을 전하면서 “그는 히딩크 감독에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아 2002년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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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은 2002년 한일월드컵 마스터카드 올스타팀에 선정됐다. 당시 월드컵 올스타는 팬 투표가 아니라 국제축구연맹(FIFA) 기술연구그룹이 논의해서 선정했다. 대회 4강에 오른 한국팀에서 수비수 홍명보와 미드필더 유상철이 올스타팀에 뽑혔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벨기에전에서 골을 넣은 유상철은 당시 FC바르셀로나의 입단 제의를 받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 직후에도 유럽팀의 러브콜이 있었지만, 결국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다. 한국 선수들이 유럽에 거의 진출하지 못했던 시기에 유럽 클럽들의 관심을 받을 정도로 클래스를 보여준 셈이다.  
  
유상철의 이름이 한국 축구 팬에게 남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또 있다.  
  
그는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강인한 미드필더, 투쟁심이 넘치는 선수였다. 이런 점은 오히려 기술적으로 더 낫다는 평가를 받는 요즘 대표 선수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유상철 만의 장점이다. 그는 당당한 체격과 강철 체력을 앞세워 상대 선수들을 부수는 듯 맹렬한 에너지의 플레이를 보여줬다. 
특히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8강전에서 일본을 상대로 결승 골을 넣은 이후 ‘한일전의 사나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후로 일본을 만날 때마다 유상철은 상대적으로 피지컬이 약했던 일본 선수들을 상대로 매우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유상철은 수비 능력이 좋은 데다 강력한 슈팅을 갖췄고, 세트피스에서 헤딩 능력도 뛰어났다. 투쟁심이 넘치고, 여러 포지션에 유연하게 기용할 수 있는 유상철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30대의 나이로 와일드카드 1순위로 선택됐다. 역대 대표팀 감독들은 유상철의 강인함을 신뢰했다. 유상철은 1994년 3월 미국전에서 A매치에 데뷔한 후 2005년까지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다.
  
8일 유럽축구 이적 전문사이트 ‘트랜스퍼마크트’는 유상철을 기리며 “한국 대표팀 역사상 최고의 미드필더로 꼽힌다”고 평가했다.  
 
 
이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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