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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사 이래 최대위기’ 이재용의 삼성이 처한 현실

 
 
삼성전자 관련, 묻힌 소식 중 하나. 지난해 10월 포브스 선정 ‘2020 최고의 고용주(World’s Best Employers)’ 1위에 올랐다는 뉴스다. ‘최고의 고용주’는 세계 58개국, 16만명 근로자를 대상으로 근무 여건, 만족도, 추천 여부, 성 평등, 사회적 책임 등에 대해 익명 설문하는 방식으로 순위를 가린다. 일하기 가장 좋은 직장을 뽑는 투표인 셈이다.
 
적극적으로 홍보할 뉴스지만, 의외로 삼성은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삼성이 처한 현실이 ‘창사 이래 최악의 위기’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재판을 받고 있었고, 이건희 회장은 포브스 발표 9일 뒤 타계했다. 지난해 6월 삼성은 “지금의 위기는 삼성으로서도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며 오너의 검찰 수사와 코로나 19로 인한 글로벌 경제 위기, 미·중 간 무역분쟁 등을 언급했었다.  
 
삼성이 백척간두에 서 있다. 포스트 코로나 대응에 따라 향후 10년이 갈릴 수도 있는 상황이다. 장진영 기자

삼성이 백척간두에 서 있다. 포스트 코로나 대응에 따라 향후 10년이 갈릴 수도 있는 상황이다. 장진영 기자

 
이런 위기는 1년이 지난 지금, 더 심각해졌다는 평가가 많다. 이재용 부회장이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수감 중인 데다, 미·중 분쟁은 격화일로에 있다. 코로나 19와 4차 산업혁명으로 세계 반도체 시장 전체가 재편되는 소용돌이 속에 있다. 삼성이란 거대 기업도 휘청이게 만드는 위기의 실체는 무엇일까. 
 

코로나 19가 몰고 온 반도체 대란

 
반도체 시장은 최근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일단 ‘코로나19’가 반도체 공급망의 위험성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점이 컸다.     
 
지난 2월 GMㆍ포드 등 미국 자동차 회사의 공장 가동이 연쇄적으로 멈췄다. 반도체가 필요한 양만큼 공급되지 않아서다. 자동차 센서ㆍ엔진ㆍ제어장치ㆍ구동장치 등 핵심 부품에 반도체 200~300개가 사용된다. 미국 포드는 반도체 부족으로 2분기 생산량이 반 토막 날 것으로 예상한다. 폭스바겐의 자동차 생산량은 1분기에만 10만 대가 넘게 빠질 전망이다.
 
사정은 유럽도 마찬가지다. 메르세데스 벤츠를 만드는 독일 자동차 회사 다임러도 최근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직원 근무시간을 단축했다. 반도체 수급 불균형이 세계를 덮친 것이다.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반도체 밖에 모르는 바보'가 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EPA=연합뉴스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반도체 밖에 모르는 바보'가 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EPA=연합뉴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은 “코로나19로 자동차 수요가 줄어들 줄 알고 (자동차 회사가) 반도체 주문을 줄였는데, 예상보다 수요가 줄지 않았다”며 “하지만 이미 반도체 회사들은 라인을 스마트폰·가전 쪽으로 돌린 상태라 반도체 물량을 다시 확보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 됐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공급망 → 국내 공급망

 
코로나19로 인한 반도체 수급 불균형은 각국을 긴장시켰다.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망'을 확보하지 않으면 자국 산업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이에 미국·유럽·중국 모두 자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싸고 효율 높지만 위기에 취약한 글로벌 공급망에 의존하기보다 시간이 들더라도 믿을만한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왕윤종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는 “반도체는 미래 산업의 경쟁력을 결정짓는 핵심 중의 핵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세계 반도체 기업을 불러 “미국에 공장을 지으라”고 압박하는 것도 그래서다. 반도체 분야에선 특출난 기업이 적은 유럽연합도 “10년 안에 세계 반도체 제품의 최소 20%를 EU 안에서 만들겠다”는 목표를 내놨다.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전기ㆍ정보공학부 교수)은 “반도체는 국가의 기간산업이자 전략적 자산으로 국제질서에 상당한 영향력을 주는 산업”이라며 “반도체 시장이 기업끼리 경쟁하던 형태에서 국가가 관여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이종호 소장은 또 “앞으로 반도체 강국일수록 국가 위상이 상당히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이 와중에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반도체 기업이 삼성전자와 대만 TSMC다. TSMC는 미국의 ‘러브콜’을 받고 사실상 중국과 ‘절연’을 선택했다. TSMC는 지난해 7월 미국 트럼프 정부 요청을 받자 매출의 14%나 차지하던 화웨이와의 거래를 과감히 종료했다. 이에 더해 120억 달러(약 14조원)를 들여 미국에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대만을 두고 미국과 중국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전쟁 위기설이 떠돈다. 얼티메이트 밀리터리 채널 유튜브 계정 캡처

대만을 두고 미국과 중국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전쟁 위기설이 떠돈다. 얼티메이트 밀리터리 채널 유튜브 계정 캡처

 
미국과 대만이 반도체 협력으로 밀착하면서 미·중 사이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대만에 대해 “독립을 지지하는 그 어떤 행동도, 외세의 간섭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표명해 왔다. 올해 들어 대만 근해에서 중국과 미국 항공모함이 출몰하는 것도 최근 반도체 산업에서 끈끈한 미국·대만 관계와 무관치 않다고 분석한다. 미국 하버드대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는 국내외 여러 인터뷰에서 “반도체는 미래 산업의 석유와 마찬가지인 산업으로 대만 TSMC를 둘러싼 미·중 분쟁이 실제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해 왔다.
 

미·중 사이에 끼인 삼성

 
문제는 전쟁 위기 수준으로 치달은 미·중 양국 모두가 삼성에겐 중요한 고객이라는 점이다. TSMC가 간단한 셈법으로 미국에 붙은 것과는 달리, 삼성은 복잡한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삼성은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1997년 반도체 공장을 지었지만, 시진핑의 고향 시안(西安)에도 2014년 당시 국내 기업 해외투자 사상 최고액인 7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공장을 준공했다. 당시 중국 매체에선 “이재용 부회장이 시진핑 주석에게 주는 즉위선물”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삼성의 반도체 분야 매출도 중국은 미국과 비슷한 30~40% 규모 혹은 그 이상으로 추정된다.
 
삼성은 미국과 중국, 두 나라 사이에서 고심 중이다. 아마 처음으로 '고래 사이 끼인 새우'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았을까. AFP=연합뉴스

삼성은 미국과 중국, 두 나라 사이에서 고심 중이다. 아마 처음으로 '고래 사이 끼인 새우'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았을까. AFP=연합뉴스

 
현재 상황만 놓고 보면 삼성은 미국 측으로 조금 더 기우는 선택을 했다. 지난 21일 삼성의 미국 투자 계획이 발표됐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김기남 부회장은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 행사에서 “미국에 19조원을 투자해 파운드리(위탁생산) 공장을 짓겠다”고 했다.
 
중국 투자 계획에 대한 언급은 아직 없다. 전문가들은 현재 삼성의 위치를 놓고 볼 때 적절한 전략이라고 평가한다. 왕윤종 교수는 “삼성 반도체는 사드 사태 때도 중국 정부가 건드리지 못한 산업이다. 아직은 삼성이 ‘갑’의 입장”이라며 “중국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되 추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벌어둔 시간 동안 시장 지배력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호 소장은 “미국은 첨단 기술과 큰 시장을 동시에 갖춘 데 비해 중국은 시장만 가진 상황”이라며 “다만 중국이 인프라 투자를 요구할 경우 거기 대응하는 방법을 마련하는 게 매우 까다롭다”고 말했다.
 

‘반도체 패권’ 흔들리는 삼성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면서 삼성전자는 반도체 분야 패권적 지위를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시스템(비메모리) 반도체 파운드리를 주축으로 하는 TSMC는 메모리 반도체 위주인 삼성전자 시가총액도 넘어섰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올해 4월 말 기준 TSMC 시가총액은 60조 9000억엔(약 623조원)으로 삼성전자의 53조 7000억엔(약 550조원)을 제쳤다.
 
 
AI·자율주행차 등 4차 산업혁명 핵심 산업에선 메모리 반도체(정보 저장)보다는 시스템 반도체(정보 처리)가 더 중요해진다는 점도 걱정거리다. 시스템 반도체는 설계를 맡는 팹리스(fabless)와 생산을 맡는 파운드리(foundry)로 나뉘는데, 팹리스는 미국회사가 주도하고, 파운드리는 TSMC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삼성 역시 파운드리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2030년까지 총 171조원을 투자하는 강수를 뒀다. 파운드리 기술력에서 TSMC를 앞질러 시장 지배 구조를 일거에 뒤엎으려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전략이다. 박재근 학회장은 “초격차로 앞서가던 메모리 반도체 기술 격차도 좁혀지고 있고 TSMC가 지배하는 파운드리는 중요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어 삼성으로서는 엄청난 위기 상황”이라며 “파운드리 등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얼마나 경쟁력을 보이느냐에 따라 다음 세대의 판도가 결정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삼성이 현재 글로벌 시장에서의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려면 정부의 지원과 소통이 절실하다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박재근 학회장은 “국가적으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반도체 분야 규제를 완화하고 인프라를 지원하는 특별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종호 소장은 “우리 반도체 산업은 미국·중국 시장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외교와도 연관이 있으므로 정부와 소통해 일관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정봉 기자 mole@joongang.co.kr
영상=김지선ㆍ정수경 PD, 김지현ㆍ이가진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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