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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 5000억 지갑 열었다···'소설계 넷플릭스' 韓청년 비결

래디시 창업자로 카카오에 4000억원 규모의 딜을 성공시킨 이승윤 대표. [본인 제공]

래디시 창업자로 카카오에 4000억원 규모의 딜을 성공시킨 이승윤 대표. [본인 제공]

 
카카오가 5000억원에 인수하는 미국 웹소설 플랫폼 래디쉬(Radish)의 창업자 이승윤 대표는 올해 31세다. 그를 처음 만났던 건 2013년. 당시 이 대표는 영국 옥스퍼드대 유학생으로, 중앙일보 객원기자인 꿈나무였다. 옥스퍼드의 학생 토론 동아리이자 토니 블레어부터 데이비드 캐머런 등 정치인의 산실인 옥스퍼드 유니언의 첫 한국인 회장을 역임한 직후였다. 그해 3월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한 해 예산이 20억원인 옥스퍼드 유니언 회장을 하며) 큰돈을 만져보니 경제에도 관심이 생겼다”며 눈을 빛내던 그였다. 강산이 변하기도 전인 8년 후, 그는 5000억원 규모 인수합병의 주인공이 됐다.  
 
꿈을 이루는 건 쉽지 않았다. 지난 7일 만난 그는 “열심히 하는 건 쉬웠다”며 “오래, 잘하는 게 어려웠다”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어린 청년의 마냥 해맑은 웃음이 아니라, 산전수전에 나름 공중전까지 겪은 이의 사연 많은 미소였다. 옥스퍼드 진학 당시 그의 꿈은 정치인이었지만, 유니언 회장을 거치면서 진로를 수정했다. 경제계에 뛰어들어 자수성가한 기업인이 되고 싶었고, 저널리즘 스타트업인 바이라인(Byline)을 2014년 시작했다. 기존 언론 매체와는 크라우드펀딩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일정 주제에 천착하는 방식을 취했다. 위키리크스 창립자 줄리안 어산지 단독 인터뷰부터, 미국의 저명한 언론학자 노엄 촘스키 인터뷰를 소화했다. 유니언 회장을 하면서 쌓은 글로벌 인맥도 소중한 자산이었지만 스스로가 발로 뛰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문제는, 의미는 컸지만 큰 돈은 되지 않았다는 점. 사업으로서의 바이라인은 그에게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그의 옥스퍼드 동기들은 유명 투자은행(IB)이나 로펌에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꿈을 접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다시 한 번 베팅을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소설과 영화, 언론 기사들을 많이 접하면서 콘텐트와 미디어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며 “‘실패하면 어쩌나’라는 질문을 스스로 끊임없이 던졌지만, 더 후퇴는 없다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말했다.  

 
지난 2013년 니콜라스 베르그루엔 인터뷰에 동행했던 이승윤(맨 오른쪽) 대표. 맨 왼쪽은 당시 중앙SUNDAY 칼럼니스트였던 다니엘 튜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 2013년 니콜라스 베르그루엔 인터뷰에 동행했던 이승윤(맨 오른쪽) 대표. 맨 왼쪽은 당시 중앙SUNDAY 칼럼니스트였던 다니엘 튜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콘텐트와 미디어에 대한 믿음으로 그가 고안하고 2016년 창업한 플랫폼이 래디쉬다. 영어 웹소설 공유 플랫폼으로, 영미권에선 때로 ‘소설계의 넷플릭스’라고 불린다. 흥미로운 포인트는 영상매체도 아니고 소설에 집중했다는 점과, 소설을 한 명의 작가가 쓰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돌아가는 공동 집단 창작 시스템의 도입이다. 콘텐트 제공 속도와 양을 함께 담보하는 시스템이다. 래디쉬 앱을 깔면 하루에도 3회 정도 “새 에피소드 등록” 알람이 뜬다.  
 
가까운 이익 대신 멀리 보는 전략도 주효했다. 수익을 5:5로 나누는 정책을 취하면서 작가들 사이에서 ‘착한 창업자’로 입소문을 타면서 양질 콘텐트 확보가 가능했다. 수익의 절반을 콘텐트 제작에 투자하면서 기업을 더 크게 키워낸 셈. 미국 웹소설 플랫폼 중 매출 기준으로 5위권, 연 매출은 지난해 말 기준 230억원을 기록했다. 래디쉬가 보유한 지적재산권(IP)을 핵심자산으로 하는 독자적 밸류 체인, 즉 장르를 넘나드는 콘텐트 제작 및 유통의 수익 생태계를 구축했다.  
 
역대 옥스퍼드 유니언 회장 명단. 왼쪽 상단 두 번째 줄에 이승윤 대표의 이름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역대 옥스퍼드 유니언 회장 명단. 왼쪽 상단 두 번째 줄에 이승윤 대표의 이름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시작은 미약했다. 이 대표는 “첫 5년간은 열심히 버텼고, 정성적 투자가 쌓이니 정량적으로도 폭발하는 시점이 왔다”며 “한때는 대출도 받을 수가 없어 친구의 도움을 받았고, 더 이상 나는 일반 기업엔 취업이 불가능한(unemployable) 사람이 돼간다는 현실이 두려웠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이재웅 다음 창업자나 ‘집 없는 억만장자’로 불린 니콜라스 베르그루엔과 같은 멘토를 찾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결국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디지털 사업도 결국은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는 명언을 몸소 실천한 셈이다.  
 
2013년 이 대표와 함께 한국과 북한을 연달아 방문했던 베르그루엔은 당시 중앙일보와 인터뷰 뒤, 기자에게 귀엣말로 “승윤을 눈여겨 보라, 크게 될 인물”이라고 말했다. 베르그루엔은 지난주 카카오 인수 소식을 전한 이 대표에게 “너에게 항상 믿음을 갖고 있었다”며 “이제 다음 계획은 뭐냐”는 연락을 취해왔다고 한다.  

 
다음 계획은 뭘까. 이 대표는 “일단 현업에 충실하되, 미래엔 미디어나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싶다”고 말했다. 
 
카카오는 래디쉬를 발판으로 북미 시장으로의 확장성이라는 날개를 달았다. 래디쉬는 인수 뒤에도 이 대표를 중심으로 한 독립 경영 체제를 유지한다. 동시에 이 대표는 카카오의 글로벌 전략 담당(GSO)로 카카오엔터의 북미 및 유럽 시장 진출을 지휘한다. 카카오가 5000억원이라는 대규모 자금을 들인 배경이다. 카카오엔터가 보유한 한국 콘텐트 역시 래디쉬를 통해 영문으로 서비스하며 쌍방간의 시너지를 극대화할 전략이다. 네이버 역시 웹소설 플랫폼 왓패드를 인수한 것에 대한 대응 성격도 있다.  
 
2013년 3월 중앙일보와 인터뷰할 당시의 이승윤 대표.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013년 3월 중앙일보와 인터뷰할 당시의 이승윤 대표.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될성부른 떡잎이었지만 이 대표의 2013년 인터뷰 중 일부를 발췌하면 이런 답이 있다. 영어를 처음부터 잘했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아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강남 모 영어학원 시험을 쳤는데 기초반에도 못 들어가고 떨어졌다. 중학교 평균 성적은 전교 50~60등 정도였다. (그러다 잠시 미국에 갔다가) 영어를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어에 재미가 붙자 성적도 덩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10년 후엔 또 다른 이승윤을 인터뷰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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