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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하교 후 화투 몇 판 맞상대 해야 자유시간 줘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11〉 어린 시절

조영남씨의 어린 시절 사진. 가운데 줄 왼쪽에서 둘째가 조영남씨다. 조씨는 1956년 삽교국민학교 졸업식 사진으로 기억했다. [사진 조영남]

조영남씨의 어린 시절 사진. 가운데 줄 왼쪽에서 둘째가 조영남씨다. 조씨는 1956년 삽교국민학교 졸업식 사진으로 기억했다. [사진 조영남]

내가 어렸을 땐 기쁨이나 슬픔 따위의 기복은 별로 없었다. 외롭다거나 권태롭다라는 의미조차 몰랐었다. 그저 밥 먹고 문밖으로 나가면 무슨 일이 생겼다.
 

술·담배 즐겼지만 교회 가기 권장
깡통 주고 개구리·뱀 잡아오게 해
어릴 적 화투 배워 훗날 그림 그려

우물가서 초가을 방귀 뀌기 대회
“몇 방이었지?” “쉰일곱 방” 깔깔

아침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고 저쪽 동네에서 의미 없이 컹컹대는 개소리가 들려 올 때면 우리 집과 지서방네 집 사이에 있는 널따란 타작 마당 한켠에는 옥분이네 갓난쟁이가 아무렇게나 똥을 지려놓을 때가 있었다.
 
할 일이 없는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것을 무심히 들여다본다. 그러는 동안 더운 김은 점점 사라지고 아침 햇살에 서서히 굳어간다. 이때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약간 말라서 꾸덕꾸덕해져 갈 때 고무신 발로 슬쩍슬쩍 밀면 신발에 묻지도 않고 제풀에 고운 흙가루를 뒤집어쓰기 때문에 그 모양이 꼭 콩고물 잘 묻은 떡처럼 된다. 그걸 손바닥에 올려놓아도 묻어나지 않고 냄새도 심하지 않다.
 
타작 마당서 매일 딱지·구슬치기
 
그때 옥분이나 재평이가 마당으로 나오면 “야! 떡 먹어라” 하면서 건네주고 아이들은 “웬 떡이냐” 하면서 입에 넣었다가 “퉤퉤퉤” 질겁을 하면 나의 작업은 성공한 거다.
 
어린 시절 우리의 모든 일들은 우리집과 지서방네 사이에 있던 타작 마당에서 이루어졌다. 타작 마당은 각종 곡식을 도리깨로 내려치기 때문에 늘 반반하고 딱딱하고 부드러워 요즘의 흙바닥 테니스장 비슷했다. 우리는 거기서 맨날 딱지치기, 구슬치기, 땅따먹기, 제기차기 등속의 놀이를 펼치곤 했다.
 
슬슬 해가 질 무렵이면 장마당 쪽에서 지서방네 할아버지가 구부정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러면 우리는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일제히 합창을 하는 것이다.
 
“할아버지 긴지 잡수셨시유?”
 
긴지는 먹는 밥의 충청도 발음이다. 할아버지가 우리의 인사를 받는다.
 
“잉! 장에 갔다오는 길이여!”
 
“아뉴! 할아버지 긴지 잡수셨나구유?”
 
“잉! 꽁치 두 마리.”
 
“할아버지 긴지 잡슈셨냐니께유?”
 
“잉! 가봐야 소용 음써. 파쟁(파장)이여.”
 
충남 예산군 삽교면의 고향집을 그린 조영남씨의 1996년 작품 ‘나의 그리운 옛 고향집’. [사진 조영남]

충남 예산군 삽교면의 고향집을 그린 조영남씨의 1996년 작품 ‘나의 그리운 옛 고향집’. [사진 조영남]

우리의 소통은 늘 이런 식으로 밑도 끝도 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그때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귀 작동이 원활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다.
 
재미있는 일은 도처에 있었다. 지서방네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우리학교 교장 선생님은 우리에게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우리 삽다리(삽교라는 지역의 오래된 별칭 같은 거다)에선 면장님과 교장 선생님이 제일 높으신 분이시다. 그런데 근엄하기 짝이 없는 교장 선생님이 거나하게 취해 장터에서 우리 마당 쪽으로 오시다가 “어이쿠” 하면서 심청이 아버지처럼 논두렁에 발을 헛디디시는 걸 우리가 달려가 구출해내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우리는 물론 그 사건을 끝까지 비밀로 지켜드렸다.
 
우리 교장 선생님은 말씀은 아주 재밌었는데 어느 해인가 1학년 입학식 날 운동장에 가득 찬 신입 1학년 학생과 학부모들(그땐 2000명이 넘었다) 앞에서 이런 말씀도 해주었다. 교장 선생님 훈시가 그날의 하이라이트였는데 이런 식으로 빠지기도 했다.  “에…우리 학생들은 다루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린 학생들이 심지어는 교실 바닥에 똥과 오줌을 지리는 학생꺼정 있어서….”
 
어린 내가 듣기에도 교장 선생님 입에서 똥오줌 얘기가 나오는 것이 민망하게 여겨졌다. 그 후 우리 삽다리 일대에서는 그 말이 대유행이 되었다. 우리는 높은 데 올라서기만 하면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한껏 거만한 자세로 “심지어 똥오줌을 지리는 학생까지 있어서”라고 흉내를 내며 낄낄대곤 했다.
 
뭐니뭐니해도 지서방네 할아버지나 우리 교장 선생님보다 더 재밌는 사람은 바로 우리 아버지 조승초(趙勝楚)씨였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골때리는 사람이었다. 술을 무척 좋아해서 아버지는 교회에 얼씬도 안 했지만 어머니를 포함, 우리 식구 전체가 교회에 나가는 걸 적극 권장했다. 아버지가 술 담배를 끊을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교회에 다닐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이상하게 여겨지질 않았다. 아버지는 정말 재밌는 분이었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나한테 일찍이 화투놀이를 가르쳐 내가 학교에 갔다 오면 반드시 록백꾸(‘육백’이라는 화투 놀이) 몇 판을 쳐야 밖에 나가 놀 수 있도록 규정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은 화투의 방식을 다 잊어버렸지만 그때 나는 아버지를 상대할 만큼 화투 실력이 막강했다. 양반을 자처하는 충청도에서 부자지간에 마주 앉아 화투를 친다는 건 엄청 웃기는 일이자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요즘 내가 화투를 그리는 화가로 재판까지 받는 유명세를 탄 것도 그런 우스꽝스런 역사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봄철이면 아버지는 양쪽 끝에 철삿줄을 맨 빈 깡통을 나와 동생 영수에게 들려주었다. 딱 거지 깡통 그대로였다. 그건 우리한테 메뚜기, 개구락지, 뱀 등을 잡아 오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잡는 방법이 다 달랐다. 메뚜기는 손으로 쳐서 잡고, 개구리는 반드시 휘청거리는 막대기로 정수리 부분을 정확하게 잡아채듯 급속도로 빠르게 가격해야 쫙 뻗어서 파르르 떨다 기절하게 된다. 햇살 좋은 날은 철길 따라 뱀잡이에 나서는데 말하자면 우리는 일일 ‘땅꾼’이 되는 것이다. 뱁잡는 전문가를 우리는 땅꾼으로 높여 불렀다.
 
꼬물꼬물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철길을 따라가다 보면 드디어 각종 돌멩이 틈에 동면을 막 끝낸 뱀식구들이 모두 나와 여기저기서 단체 선텐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한 녀석을 겨냥해 끝이 ‘Y’자 모양으로 된 긴 막대기를 높이 들고 뱀의 목 부분을 겨냥해 기습적으로 찍어 누르면 깜짝 놀랜 뱀이 후다닥 또르르 막대기를 휘감게 되고 나는 그걸 깡통에 획! 내려치고 뚜껑을 덮으면 성공적인 뱀 채집이 되는 것이다.
 
메뚜기, 개구리, 뱀 등이 그득 찬 깡통을 아버지한테 갖다 바치면 아버지는 즉시 선별해서 우리한테 구워주기도 하고 삶아주기도 했다. 먹고 남은 것들은 잘게 썰어 닭 모이로 섞어 주었다. 우리 집이 계란 좋은 집으로 소문난 이유가 바로 그런 때문이었고, 우리 형제가 지금까지 몸 건강히 잘 견디는 건 그때 먹었던 보양식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의 굳건한 리더셨던 아버지는 때때로 짓궂은 장난을 서슴지 않았다. 우리가 아버지의 지시대로 차돌멩이들을 주워가면 아버지는 공구를 이용해 잘게 자른 다음 그걸 하나씩 못 쓰는 갱지에 싸서 긴 볏짚 끈으로 질끈 묶는다. 옛날에는 빨랫비누 대용으로 얼음 모양의 양잿물 쪼가리를 한 덩어리씩 장터에서 구입, 옆구리에 차고 집에 돌아가는 풍습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시장에서 파는 양잿물과 흡사하게 만들어 우리들한테 길목에 뿌려 놓게 하고 우리는 판자 울타리에 숨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게 웬 떡이냐” 하며 슬쩍슬쩍 사방 눈치를 보며 집어가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훔쳐보는 것이다. 요즘의 몰래카메라처럼 말이다. 무려 60년 전에 몰래카메라 방식을 개발해낸 우리 아버지는 말 그대로 선각자셨다. 아버지 조승초, 어머니 김정신 권사님의 피를 물려받은 나는 아버지 어머니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노는 방법을 개발해 나갔는데 그중 대표적인 놀이가 소위 연례 방귀 뀌기 대회다.
 
친구 건옥이 오빠가 감리교 도건일 목사  
 
도건일 목사

도건일 목사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바람 소슬하게 불면 밭두렁의 콩잎들이나 고구마 줄기가 누리끼리한 갈색으로 변해가고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들 엉덩이에선 무상으로 뿡뿡뿡 방귀가 새어 나온다. 콩을 볶아 먹던가 고구마를 구워 먹으면 자연스럽게 방귀가 풍성하게 삐져나오기 마련이다. 이런 점을 착안하여 친환경(?)적으로 개발해 낸 것이 바로 방귀 대회다. 방귀를 의미 없이 남발사하지 말고 확 트인 야외에서 공식적으로 발사, 자연 속으로 되돌려 주는 것이 대회의 취지이다. 그것은 초가을마다 치러지는 대회였는데 나름 규제가 엄격했다. 남자만의 경기로 남존여비가 아니라 여자애들은 비밀유지가 안 되기 때문에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여자애들은 방귀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이 모자란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는 교장 아들 득운이부터 너무 샌님 타입이라 뺐고, 건옥이와 과수원 뒤편에 살던 길권이도 너무 기독교적이라 뺐다(건옥이 큰 오빠가 후에 대한 감리교회 거목이 되신 도건일 목사님이시다).
 
어둑어둑해지면 우린 개구멍을 통해 초등학교 뒷마당에 있는 웅장한 우물가로 간다. 거기가 바로 경기장이다. 꽤 큰 양철지붕으로 된 우물이라서 우리가 “우!” 하면 에코가 “우우우웅!” 울려 퍼지는 삽다리 최고의 오디오 시설이다.
 
우리는 비장한 표정으로 둘러서서 “누구 차례여?” “재평이 차례일껄” “몇 방이었지?” “쉰일곱 방” “그럼 시작히여. 각자가 시어가면서 말여” “잉! 알았어” 하며 작은 소리로 “쉰여덟, 쉰아홉, 예순” 짧게 짧게 끊어서 뀌는 게 기술인데 어떤 땐 너무 힘을 주어 실수를 하는 수가 있어 힘 조절에 각별히 주의해야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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