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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원 교수가 본 김민환 소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

김민환의 소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를 처음 접하였을 때 나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연상했다. 그러나 읽으면서 떠오르는 것은 최인훈의 〈광장〉이었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상당히 달랐다. 두 소설은 모두 분단 이데올로기를 다룬 것이다. 그러나 〈광장〉의 이명준과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의 봉강 정해룡의 이야기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으로 읽혔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명준의 이야기는 1960년대 작품이고 봉강의 이야기는 2021년이란 60년의 세월이 흐른 21세기의 작품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분단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배제’의 논리이었던 것에서 이제는 ‘관용’과 ‘통합’의 논리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봉강의 분단 이데올로기는 전체적으로 보면 전통과 문화에 오염된 것으로 그것의 오만한 주체성이 중심적인 것에서 주변화 된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덜 각박하게 아니 덜 불편한 마음으로 대면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데올로기 때문에 죽거나 죽이거나 할 것 까지는 없다는 것을 봉강의 추모비가 그의 사후 거의 20년이 지나 세워지는 이야기로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이해는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는 전언을 포함해서 말이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는 정치 이데올로기 소설이다. 그러나 그 이데올로기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고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관계이고 화엄불교의 여래(如來)이고 여거(如去)이다.        
 
1945년에서 출발하는 해방정국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의 역동적인 우리의 현대사에서 실패한(?) 한 정치인과 그 세력을 깊은 연민의 감성과 함께 열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봉강 정해룡은 해방정국에서 몽양 여운홍의 지지자로 남쪽도 북쪽도 아닌 중간노선의 정치인 이었다. 작가는 이런 봉강의 삶을 통해 실존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요약하면 그것은 한마디로 중도정치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를 작가는 어떤 때는 명료히 또 어떤 때는 넌지시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봉강의 삶에서 이를 발견한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의 주제는 정치이다. 좌나 우가 아닌 중간 혹은 중도라고 할 수 있는 소위 제 3 노선의 정치이다. 그것의 역사적 실체에 대해서 나는 무지하다. 그러나 관념적으로는 중도의 요체가 무엇인가를 조금은 말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그것은 근대의 2원론적 사고에 대한 안티테제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배제’의 논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선과 악, 진실과 허위,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구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나오는 중요한 정치적 가치는 관용이고 포용이고 연대이다. 봉강의 정치적 입장은 기본적으로 남과 북의 동거로 그것은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희생의 길이었다. 그러나 봉강은 그 길을 선택한다. 국회의원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낙선하기도 하고 보복 받을 것을 알면서도 전쟁 중에는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는다. 그의 아내 최승주의 말을 빌리면 그는 ‘대의를 따르는 일’을 자신의 규범으로 삼았다. 이것은 양반 출신으로 유교적 전통문화의 표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서구적 계몽인의 규범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리스만이 범주화한 전근대적 전통지향적 인간이면서 동시에 근대적인 내부지향적인 인간이다. 그러나 그의 중간노선이라는 정치적 입장은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탈현대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봉강에게는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란 현대의 전형적인 이중성이 그에게서 발견된다.
 
봉강의 중간노선 즉 제3의 길이란 자족적이고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1에서 10까지의 열 개 숫자가 있다하자. 그리고 이 각각의 숫자의 의미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지 보자. 3을 예로 든다면, 3은 나머지 아홉 숫자와 다른 것 이다. 그러나 3이 3으로 존재하는 것은 3 이외의 다른 1이나 2 같은 아홉 개의 숫자가 있기 때문이다. 봉강의 ‘중간’도 이런 것이다. 그는 이를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 삶에서 직관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관용’을 최고의 정치적 덕목으로 삼으면서 남 북 개별체의 절대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관용’이란 현실에서는 흔히 실패 한다. 봉강은 이를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한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의 정치는 문화로 오염(?)된 정치이다. 이 문제는 정치철학에서 논쟁적인 것이다. 이것은 근대적 정치는 아니다. 덕의 정치라고 하기도 어렵다. 권리의 정치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탈 근대적인 정치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제 3의 중도를 발견하게 된다. 소설 속의 이야기들, 인물들, 사건들, 이들은 모두 문화 지향적 이다. 저자는 이들을 남도의 창으로 표현하곤 한다.  
 
봉강의 삶을 서술한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는 한편의 ‘서사 시’ 이다. 그 속의 인물과 언어가 거의 시적(poetic)이다. 시 언어는 ‘존재자’(beings)가 아니라 '존재‘(being)의 언어이다. 봉강의 이야기는 모든 논리, 모든 이성, 모든 진리 그리고 사실의 증명과 같은 체계화된 논증의 무의미함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는 그의 세계를 숫자나 사물과 같은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의 생명에 대한 경외심, 재물에 대한 집착이 아닌 그렇다고 무시나 경멸이 아닌 그 존재에 대한 성실함, 인위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직한 대면, 주체의 오만으로도 보일 수 있는 용기와 자부심, 이런 모든 것들이 그렇다.      
 
조금 더 부연하겠다. 하나는 김민환의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는 한국어의 지평 확대에 의미있는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존재의 집’이라는 언어는 구조적으로 우리의 사고와 논리를 규제하고 억압한다. 언어구조 속에서 우리는 사고하고 놀이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남도의 사투리를 동원하고 사용하면서 우리  말의 자유를 확대한다. 이것은 우리 언어의 구조적 지평을 확대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언어도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근대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주변인 남도의 사투리가 중심이 되어 그 구조를 전도시키고, 아니 전도가 아니라 중심과 주변이라는 구분을 무력화 하고 있다.
 
또 하나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철학과 문학 사이의 경계 문제 이다. 유럽의 경우는 철학과 문학은 그 경계가 거의 없다. 사르트르, 카뮈, 보드레르 같은 경우 그들은 소설가, 시인, 문학 평론가 이면서 철학자이었다. 푸코도 그런 예의 하나이다. 그들의 시, 소설, 평론 문학은 철학 저술이기도 하다. 그들은 문학과 철학을 같이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경우가 드믄 것 같다. 굳이 말한다면-나 같은 문학 전공이 아닌 자가 거명하는 것을 용서한다면-김현이나 최인훈 그리고 김병익 같은 평론가가 떠오르지만 그러나 과문한 탓이겠지만 전체적으로는 아니다. 나는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를 읽으면서 그런 문학과 철학-정치철학-사이의 경계를 너머서는 작품과 담론의 가능성을 본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과거’가 ‘현재’에게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감동적인 사실은 인간은 처음부터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그 무엇의 한 부분으로 존재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죽으면 썩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영원히 남아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인간은 유한한 것이 아니라 무한하다는 위로의 말이다. 고대의 동굴 벽화, 투탕카멘의 무덤, 베르사이유 궁전도 이를 말하는 것이다. 봉강 정해룡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의 의미가 있다.
 
역작이다. 언론학 교수인 김민환이 자신의 학문 영역을 넘어선 업적이다. 잘 준비한 자료와 숙고, 뛰어난 필력 모두 흔치 않은 능력과 노고의 결과이다. 
 
 
임상원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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