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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렇게 잔인합니다" 20대 정진석의 가슴 아픈 이야기

백성호 기자 사진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풍경1
 
정진석 추기경은 한국전쟁 와중에 목전에서 죽음을 수차례 경험했습니다. 한 발만 빨랐어도, 혹은 한 발만 느렸어도 죽음은 자신의 몫이었습니다.  
 
국민방위군 소속으로 서울에서 경북 의성으로 후퇴할 때였습니다. 산길을 걷던 중에 앞에 가던 전우가 지뢰를 밟았습니다. 폭발과 함께 여러 명이 죽었습니다. 정 추기경의 코앞에서 말입니다.  
 
정진석 추기경은 "우리는 이론적으로 하느님이 나와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걸 안다. 그런데 전쟁과 죽음은 나에게 그걸 뼛속 깊이 느끼게 했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정진석 추기경은 "우리는 이론적으로 하느님이 나와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걸 안다. 그런데 전쟁과 죽음은 나에게 그걸 뼛속 깊이 느끼게 했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남한강을 건널 때는 바로 뒤에서 전우들이 죽고, 의성 산길에서는 바로 앞에서 죽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가 궁금해졌습니다. ‘전쟁 전의 정진석’과 ‘전쟁 후의 정진석’은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토록 참혹한 죽음을 목격한 후에 그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정 추기경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우리가 이론상으로는 하느님이 나를 창조하셨고,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하셨다는 걸 압니다. 이성으로 압니다. 머리로 압니다. 그런데 전쟁과 죽음을 통해 저는 그걸 뼛속 깊이 느꼈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나의 몸으로, 나의 체험으로 몸서리치게 느꼈습니다. 제 생명의 이유라고 할까, 제 생명의 목표라고 할까. 나는 이미 죽었으니 남을 위해 살라는 메시지를 절절하게 깨달았습니다.”
 
한국전쟁의 참혹함은 그에게 ‘삶의 이유’를 절감하게 했습니다.  
 
#풍경2
 
한국전쟁이 정전된 후에 그는 삶의 방향을 틀었습니다. 사제의 길을 가기로 작심했습니다.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뒤에 신학교를 가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나이 제한에 걸려서 신학교를 지원할 수가 없게 될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서울대를 포기하고 신학교에 갈 작정이었습니다.  
 
정진석 추기경는 어릴 적부터 외가에서 자랐다. 사제가 된 뒤 외조부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진석 추기경는 어릴 적부터 외가에서 자랐다. 사제가 된 뒤 외조부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천주교 서울대교구]

 
쉽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신학교에서는 외아들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명동성당에서 복사를 할 때 노기남(1902~84, 최초의 한국인 주교) 대주교가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그의 집안 사정을 노 주교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신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노 주교는 “안 된다. 그럼 홀어머니는 누가 돌보느냐”며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사제의 길을 꿈꾸던 그는 어머니에게 매달렸습니다. “주교님께 말씀을 드려 달라고 어머니께 부탁했습니다. 그걸 통해 어머니의 심정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잔인합니다. ‘주교님께 허락을 받으면 신학교에 가고, 못 받으면 단념할 작정입니다’라고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며 정 추기경은 “제가 그렇게 잔인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한 마디에서 참 많은 게 느껴졌습니다.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가야 하는 미안함, 동시에 어머니 당신의 도장을 받아야 하는 절박함, 그 모두가 어머니가 아닌 자신을 위한 결정이라는 죄책감. 그러한 정 추기경의 심정이 마주 앉은 저에게 파도처럼 밀려오더군요.  
 
정진석 추기경이 주교에 서임됐을 때 어머니 이복순 루시아 여사와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사진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진석 추기경이 주교에 서임됐을 때 어머니 이복순 루시아 여사와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사진 천주교 서울대교구]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물었습니다. “어머니께 말씀을 드려 달라고 부탁한 건 (어머니를 향한) 일종의 배려이기도 했나요?” 정 추기경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건 맞습니다. 어머니 마음을 조금은 달래 드리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드렸더니 어머니는 ‘(내가)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노기남 대주교에게 가서 떼를 썼습니다. 결국 허락을 받아서 돌아왔습니다. 정 추기경은 “지금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게 어머니 마음을 달래 드린 건지, 아니면 더 심하게 불효를 한 건지. 그런데 어머니의 마음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사제가 된 정진석은 훗날 노기남 대주교의 비서 신부가 됐습니다.  
 
#풍경3
 
혹자는 정진석 추기경을 향해 “보수적”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정 추기경의 보수는 단층적인 보수가 아닙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가 헤쳐 온 삶과 시대의 무게는 무척이나 복층적입니다.  
 
 
정진석 추기경은 "서울대 합격했을 때 호적초보을 떼고서야 아버지가 일제시대에 활동한 사회주의자였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정진석 추기경은 "서울대 합격했을 때 호적초보을 떼고서야 아버지가 일제시대에 활동한 사회주의자였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정 추기경은 어렸을 때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께 불평한 적은 없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일본으로 간 뒤에 연락이 끊겼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서울대에 합격했을 때 필요한 서류를 제출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호적초본을 뗐습니다.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정 추기경의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활동한 사회주의자였습니다. 일본으로 갔다가 해방 후 북으로 갔다는 이야기는 나중에서야 들었습니다. 정 추기경이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저는 질문을 잠시 망설였습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결국 물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원망했습니까?” 정 추기경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닙니다. 외가에서 저와 어머니를 돌봐줬으니까요. 만약 물질적으로 어려웠다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진 않았습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주교관에서 만난 정진석 추기경은 "저는 아버지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겪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바라본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서울 종로구 혜화동 주교관에서 만난 정진석 추기경은 "저는 아버지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겪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바라본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정 추기경은 담담하게 대답을 이어갔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개인의 문제에서만 보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이 겪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가피한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해석합니다. 아버지를 원망한 적은 없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지식인이었고,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건 당대의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겪은 시대적 조류이기도 했습니다.”
 
그건 ‘가슴 아픈 이야기’였습니다. 조금씩 망설였지만, 저는 아픈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아버지가 보고 싶진 않았습니까?” 정 추기경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때는 대학생이었습니다. 이미 컸으니까요. 만날 수 없는 상황이란 걸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그 시대를 살았던 지성인이란 사실은 한편 위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궁금해졌습니다. 그리스도교 정신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물과 기름’입니다. 둘은 양립할 수 없는 정신입니다. 사회주의는 영혼이 아니라 물질에 철학적 기반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는 어땠습니까?” 정 추기경은 잠시 창밖을 쳐다봤습니다. 그리고 답을 했습니다. “아쉬웠습니다. 아버지도 천주교 신자셨죠. 그런데 일본강점기 지식인의 조류에 휩쓸렸던 겁니다. 하느님을 통해서 진리를 찾지 않고,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진리를 찾으려 했던 건 참 아쉽습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주교관에서 만난 정진석 추기경은 "하느님 안에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서울 종로구 혜화동 주교관에서 만난 정진석 추기경은 "하느님 안에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풍경4
 
정 추기경의 하루 일과는 규칙적이었습니다. 명동성당에서 서울대교구장직을 수행할 때도, 은퇴 후에 서울 종로구 혜화동 주교관에서 생활할 때도 늘 그랬습니다. 매일 새벽 5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책상에 앉았습니다. 성경책을 편 뒤 읽고, 묵상했습니다. 그날 묵상에서 얻은 열매를 노트에 일일이 기록했습니다.  
 
아침 식사는 오전 8시였습니다. 새벽 5시부터 아침 8시까지, 정 추기경은 매일 묵상하며 글을 썼습니다. 물론 그 글은 꾸준히 책으로 나왔습니다. 한번은 이런 말씀도 했습니다. “어릴 때는 하루 한 권씩 책을 읽었는데, 이제는 매년 한 권씩 책을 쓴다.” 정 추기경은 지난해까지도 해마다 한 권씩 책을 출간했습니다. 지금껏 직접 쓴 저서는 51권, 번역서는 14권입니다. 모두 65권이나 됩니다.  
 
저서의 양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놀랐던 건, 묵상의 양과 깊이였습니다. 항상 차분하고, 조용하고, 담담하게 답을 했지만, 상대방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통찰의 눈’이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추기경 정진석’ 이전에 ‘수도자 정진석’을 만나곤 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6세와 만난 정진석 추기경. 당시에 그는 주교였다. [사진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황 요한 바오로 6세와 만난 정진석 추기경. 당시에 그는 주교였다. [사진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정진석 추기경이 만나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 출신이었다. [중앙포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정진석 추기경이 만나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 출신이었다. [중앙포토]

정진석 추기경이 프란치스코 현 교황을 만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 출신이며 이탈리아계다. [사진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진석 추기경이 프란치스코 현 교황을 만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 출신이며 이탈리아계다. [사진 천주교 서울대교구]

 
마지막으로 정 추기경에게 “기도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정 추기경은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진정한 기도란 무엇입니까?”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정 추기경은 울림 있는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사람들은 기도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간구합니다. 그게 이루어지면 ‘하느님이 계시다’,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느님이 안 계신다’며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는 겁니다. ‘지금 하느님께서 뭘 원하시나’. 그걸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도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정진석 추기경은 "기도는 내가 원하는 걸 구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걸 구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중앙포토]

정진석 추기경은 "기도는 내가 원하는 걸 구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걸 구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중앙포토]

 
서울 종로구 혜화동 주교관에는 늘 정진석 추기경이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그곳에 가더라도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차분하지만 용기 있고, 차분하지만 깊이 있으신 분. 자신의 눈보다 그리스도의 눈을 찾으시던 분. 정진석 추기경님의 영원한 평화를 기원합니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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