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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시진핑에 "아시아의 역할"…美 거북한 얘기 쏟아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일 “개발도상국에 대한 백신 기부와 같은 다양한 코로나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국 정부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이날 중국 하이난(海南)성에서 개최된 보아오(博鰲)포럼에 보낸 영상 메시지에서다.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2021년 보아오포럼 연차총회 개막식에 영상 메시지로 참석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메시지를 통해 세계가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고 포용적 회복을 이루기 위한 아시아의 역할과 글로벌 거버넌스의 강화 방안을 제안했다. 아시아 국가 간 협력과 교류를 통한 경제발전을 목적으로 2001년 출범한 비영리 민간기구인 보아오포럼은 올해 '글로벌 대변화'라는 대주제를 놓고 중국 하이난성 보아오에서 대면과 비대면회의를 혼합한 방식으로 열렸다. (청와대 제공 영상 캡처)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2021년 보아오포럼 연차총회 개막식에 영상 메시지로 참석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메시지를 통해 세계가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고 포용적 회복을 이루기 위한 아시아의 역할과 글로벌 거버넌스의 강화 방안을 제안했다. 아시아 국가 간 협력과 교류를 통한 경제발전을 목적으로 2001년 출범한 비영리 민간기구인 보아오포럼은 올해 '글로벌 대변화'라는 대주제를 놓고 중국 하이난성 보아오에서 대면과 비대면회의를 혼합한 방식으로 열렸다. (청와대 제공 영상 캡처)

보아오포럼은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판 다보스 포럼’으로 불린다. 코로나 상황을 감안해 대면·비대면 혼합 형식으로 진행된 올해 포럼의 주제는 ‘변화되는 세계(A World in Change)’다. 부제는 ‘글로벌 거버넌스와 일대일로(一帶一路) 협력의 강화’였다. 일대일로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제시한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 재편 계획을 뜻한다. 그러나 청와대가 공개한 보도자료에는 ‘일대일로’가 포함된 포럼의 부제는 빠져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영상에서 “아시아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아시아 국가들은 보아오포럼을 통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구동존이(求同存異) 정신을 실천해왔다”며 “구동존이는 포용과 상생의 길이며 인류 공동의 위기인 코로나를 극복하는 데도 중요한 가치이자 원칙”이라고 말했다. 구동존이는 시 주석의 외교정책을 상징하는 사자성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12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반도체 서밋’ 화상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책상 왼쪽에 반도체 웨이퍼가 놓였다. [EPA]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12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반도체 서밋’ 화상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책상 왼쪽에 반도체 웨이퍼가 놓였다. [EPA]

문 대통령은 이어 다자 무역, 코로나 대응, 신기술 문제 등과 관련한 발언을 이어갔다. 미국과 중국이 갈등을 빚고 있는 아슬아슬한 주제들인데, 문 대통령의 발언엔 중국의 입장을 배려하는 듯한 내용이 포함됐다.

 
문 대통령은 먼저 “RCEP을 통해 역내 경제 협력의 속도를 높이고 다자주의에 대한 신뢰 회복과 자유무역 발전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은 중국 주도의 세계 최대 자유무역협정(FTA) 체계로, 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RCEP 가입에 서명했다. 그러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에 맞서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복귀를 시사하면서 두 협정이 미·중 무역분쟁의 축이 될 수 있단 관측이 나온다. RCEP은 한국과 중국ㆍ일본ㆍ호주ㆍ뉴질랜드와 아세안(ASEANㆍ동남아시아국가연합) 10국이 참여하는 세계 최대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아세안 국가를 제외한 4개국 중 유독 한국과 중국만 CPTPP회원국이 아니다.
 
문 대통령은 “어떤 나라도 이웃에 대한 배려없이 코로나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며 개도국에 대한 중국의 백신 지원을 높이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월 27일 세계경제포럼 화상 연설 때는 “백신 선진국들이 자국민 우선을 내세우며 수출을 통제하려는 이기주의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고 날을 세웠는데, 백신 수출을 통제하는 곳은 미국과 유럽연합이다.
 
 문 대통령은 이어 “지난해 출범한 ‘동북아시아 방역ㆍ보건 협력체’를 통해 역내 협력을 내실화하겠다”며 북한을 포함한 동북아 협력체 구상을 백신과 연관지어 설명했다. 외교가에선 "정부가 7월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백신을 매개로 대북대화 재개를 시도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2011년 8월 중국 베이징을 방문한 당시 조 바이든 부통령과 시진핑 국가 부주석. [AFP=연합뉴스]

2011년 8월 중국 베이징을 방문한 당시 조 바이든 부통령과 시진핑 국가 부주석. [AFP=연합뉴스]

문 대통령은 특히 “신기술과 혁신 거버넌스 협력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며 “글로벌 가치사슬이 재편되고 생산ㆍ공급 시스템의 디지털화가 더욱 빨라지면서 기술 발전과 혁신에 대한 요구가 더욱 커지고 있다”고 했다. 사실상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염두에 둔 말로 해석된다. 바이든 행정부는 현재 중국을 반도체 공급망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이날 “아시아 국가 간 협력이 강화된다면 미래를 선도하고 위기에 대응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중국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움직임과 큰 온도차를 보였다.
 
외교가에선 문 대통령이 포럼에 참석한 시기와 친중(親中)으로도 비칠 수 있는 메시지에 대한 우려가 나왔다.
 
문 대통령은 이틀 뒤인 22일 바이든 대통령의 초청으로 화상 기후정상회의에 참석한다. 영상이긴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첫 대면 접촉이다. 한달 뒤인 5월 하순에는 워싱턴에서 첫 한·미 정상회담도 예정돼 있다. 결국 이날 포럼 참석은 한·미 정상간의 본격적 대면 접촉에 앞서 한·중 정상이 미리 의견을 공유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문 대통령은 바이든 행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 1월 26일에도 시 주석과 먼저 정상통화를 했다. 바이든 대통령과는 2월 4일에서야 첫 정상통화를 하면서 “동맹에 균열을 자초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특히 문 대통령이 영상으로나마 보아오포럼에 참석한 건 취임 후 올해가 처음이다. 지난해엔 코로나로 일정이 취소됐고, 2년 전에 이낙연 당시 국무총리가 참석했다.
 
박인휘 이화여대 교수는 “하필 바이든 행정부가 새 대북정책 발표를 앞두고 한국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을 분명히 한 시점에 나온 문 대통령의 메시지는 미국에 큰 오해를 줄 가능성이 크다”며 “특히 미·중 갈등이 반도체 등 구체적 기술패권 경쟁으로 전개되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중국의 입장을 반영한 발언을 한 것은 향후 한국의 반도체와 첨단기술 기업들의 운신의 폭을 축소시킬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26일 통화했다. 중국 관영 언론은 두 정상의 통화를 보도하며 청와대가 밝힌 시 주석 방한이나 북한 관련 대화를 언급하지 않았다. [뉴스1, 신화=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26일 통화했다. 중국 관영 언론은 두 정상의 통화를 보도하며 청와대가 밝힌 시 주석 방한이나 북한 관련 대화를 언급하지 않았다. [뉴스1, 신화=연합뉴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의 보아오포럼 참석 사실을 이날 오전 9시30분께 공지했다. 10시 30분 개막식을 불과 1시간 앞둔 시점이었다. 전날 중국 정부가 외교적 관례를 깨고 문 대통령의 참석 사실을 일방적으로 공개했음에도 청와대는 별도 대응을 하지 않았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에 대해 “회담이나 포럼 참석이 아닌 녹화 영상을 전송하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사전에 별도 공지 등이 이뤄지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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