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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대 曰] 주연보다 더 빛나는 조연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

영화 속에선 주연 배우보다 조연이 더 빛날 순 없다. 주연이 영화의 흐름을 이끌고 가는 역할이라면 조연은 말 그대로 이야기의 전개를 돕는 역할이다. 영화는 대본이라는 일종의 정해진 룰에 따라 움직인다.
 

현실도 영화 같은 윤여정 ‘장외 연기’
절묘한 웃음 동반 미나리 같은 생명력

현실은 좀 다르다. 정해진 대본대로만 움직인다면 우리 삶은 무척 지루할 것이다. 영화는 단지 한 편의 작품일 뿐이다. 그런데 현실이 또 하나의 영화로 보이기도 한다. 윤여정 배우의 반짝이는 ‘장외 연기’를 보며 든 생각이다.
 
현실은 정해진 대본이 없는 영화일 수 있다. 한 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했다고 그 영화 밖에서도 계속 주연인 것은 아니다. 영화 ‘미나리’에선 조연을 맡았지만, 영화 밖에서 세계를 들썩이는 주연 역할을 윤여정씨가 하고 있다.
 
올해 74세인 그는 연기 경험으로 치면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대배우에겐 영화와 현실의 구분이 없어 보인다. 연기와 현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고 할까. 최근 세계에 중계된 영국 아카데미 수상 소감은 압권이었다.
 
콧대 높은 영국인들에게 ‘스노비시(snobbish)’라는 한마디로 오래 기억될 만한 웃음을 선사했다. ‘고상한 척하다’ ‘우월한 척하다’는 부정적 뉘앙스를 가진 이 단어가 자그마한 체구의 동양 할머니에 의해 ‘유쾌한 농담’의 소재로 활용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우리는 놀라며 웃었고, 그들은 웃으며 놀란 것 같다.
 
윤여정이 ‘스노비시’ 대사를 거만하게 표출했다면 아마 한국 관객들의 비위마저 상했을 것이다. 국내는 물론 영국인들조차도 거기서 기분 나빴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근엄한 시상식의 허를 찌른 고도의 연기력이라고 할 만하다. 시상식 사회자가 ‘스노비시’를 듣는 순간 파안대소하는 모습이 그 순간의 모든 것을 대변했다. 그 장면에 참여한 모두가 웃음으로 하나가 된 듯하다.
 
언뜻 서툴러 보이지만 결코 서툴지 않은 영어로 또박또박 소감을 이어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여왕의 남편인 필립공의 타계에 정중히 조의까지 표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좋은 연기는 여유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러다가 슬쩍 ‘스노비시’를 끼워 넣는다. 그의 연기 인생 50여년의 내공이 자연스럽게 폭발하는 순간인 듯하다. 미나리 같은 삶의 굴곡과 생명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연기일 수 있겠다.
 
그 폭발이 분열과 비난의 파열음이 아니었기에 모두가 즐겁게 웃을 수 있었다. 무대와 관객, 영화와 현실, 너와 나의 이분법을 뛰어넘는 융합의 속삭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도대체 누가 ‘스노비시’한가, 영국인인가, 한국인인가, 이런 질문도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 던져 볼 수 있겠다. 그들은 그들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묘한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윤여정은 자신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별의 순간’을 잡아 멋지게 소화해 내고 있다.
 
오는 25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다. 미국 배우조합상과 영국 아카데미를 이미 받은 그의 수상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주최 측 초청을 받은 그가 노련한 연기로 다시 한번 통쾌한 웃음을 선물해주었으면 좋겠다.
 
오스카 시상식에 선다면 현재 미국에서 문제가 되는 ‘아시아계 혐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까? 영화 미나리의 행간에 숨어 있는 인종 차별 문제를 장외에서 수면 위로 올리는 시도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미국에 사는 그의 두 아들이 미국에 오는 엄마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대배우조차 피해갈 수 없는 인종 혐오 범죄에 대한 우려를 그라면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낼지 궁금하다. 그의 작은 어깨에 너무 많은 짐을 지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모자라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게 적당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뼈 있는 웃음’을 연기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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