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룽윈 “장제스에 복종했는데, 미군과 이간질 상상 못 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2〉

난징 탈출 후 홍콩에 머무르던 룽윈(앞줄 왼쪽 둘째)은 대륙으로 돌아갔다. 1954년 5월, 정치협상회의 좌담회를 마친 룽윈. [사진 김명호]

난징 탈출 후 홍콩에 머무르던 룽윈(앞줄 왼쪽 둘째)은 대륙으로 돌아갔다. 1954년 5월, 정치협상회의 좌담회를 마친 룽윈. [사진 김명호]

일본 투항 후,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중공과 선을 그었다. 연합군 중국전구사령관 자격으로 중공에 전문을 보냈다. “일본군 무장해제에 관여하지 마라.” 중공은 발끈했다. 8로군 사령관 주더(朱德·주덕)가 충칭(重慶)의 중앙정부에 보내는 서신을 당 기관지(新華日報)에 공개했다. “다시는 중앙의 지휘를 받지 않겠다.” 국제사회가 진동했다. “중국에 내전이 임박했다.”
 

장, 항일전 승리 후 중공과 선 그어
“룽, 국·공 회담 참석” 미 제안 거절

중앙군, 장 명령 따라 윈난군 공격
룽,우화산에 피신했다가 충칭으로

미 대통령 특사, 국·공 중재 나서
 
1945년 7월 7일, 항일전쟁 발발 7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룽윈(왼쪽 첫째). 왼쪽 다섯째가 두위밍. [사진 김명호]

1945년 7월 7일, 항일전쟁 발발 7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룽윈(왼쪽 첫째). 왼쪽 다섯째가 두위밍. [사진 김명호]

미국이 조정에 나섰다. 대통령 특사 패트릭 헐리가 중국을 찾았다. 중공의 의향을 떠보기 위해 충칭에 상주 중인 중공대표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를 만났다. 저우는 몸을 사렸다.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옌안(延安)에 있는 마오 주석의 의중이 어떤지는 나도 모른다.” 헐리는 옌안에 가서 마오를 직접 만나고 싶었다. 저우에게 동행을 요구했다. 헐리를 만난 마오쩌둥은 반색했다. “내전 반대라면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국·공 평화회담은 제3자의 중재가 필요했다. 백악관은 뒷구멍을 선호했다. 헐리에게 전문을 보냈다. “윈난(雲南)성 주석 룽윈(龍雲·용운)을 만나라.” 룽윈은 극비리에 쿤밍(昆明)에 온 헐리를 오밤중에 장남 집 구석방에서 만났다. 이튿날 장남 룽셩우(龍繩武·용승무)에게 이런 말을 했다. “간밤에 헐리를 만났다. 충칭에서 열릴 국·공 회담에 중재자로 참석하라기에 확답은 안 줬다.” 헐리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룽윈은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내 신분은 마오쩌둥과 다르다. 마오는 다른 조직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나는 국민정부가 임명한 성 정부 주석이다. 중앙 정치조직의 일원이며 국민당 당원이다. 충칭에 가려면 장 위원장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먼저 가서 위원장에게 당신 희망을 얘기해라. 오라고 하면 그때 가겠다.” 장제스는 룽윈을 회담에 참석시키자는 헐리의 건의를 무시해버렸다. 당시 쿤밍에는 미군 1만 여 명이 주둔 중이었다. 장은 헐리와 룽윈의 관계를 의심했다. 정보기관 군통(국민당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에 지시했다. “룽윈과 미군을 차단시켜라.”
 
시놀트(가운데)는 항일전쟁 시절 중국 공군을 지휘했다. 룽윈(왼쪽), 허잉친(오른쪽)과 친분이 두터웠다. [사진 김명호]

시놀트(가운데)는 항일전쟁 시절 중국 공군을 지휘했다. 룽윈(왼쪽), 허잉친(오른쪽)과 친분이 두터웠다. [사진 김명호]

쿤밍의 번화가에서 미군 소령이 괴한의 총격을 받았다. 갑자기 중국 헌병들이 나타났다. 왼쪽 팔에 총상 입은 미군을 중국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범인은 종적이 묘연했다. 윈난 군인이 미군을 저격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미군 장교는 입원을 거부했다. 미군 측의 요구로 미 군의관에게 수술을 받았다. 적출한 탄두를 세밀히 감정했다. 윈난군이 사용하는 것과 달랐다. 국민당 특무요원들이 쓰는 독일제 총탄이었다. 룽윈은 감정 결과를 믿지 않았다. 룽윈의 회고를 소개한다. “거리와 찻집, 술집, 오락실에 미군이 자취를 감췄다. 윈난군이 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창고를 접수한다는 밀고가 있었기에 계엄령 선포했다는 말 듣고 어이가 없었다. 미군과 우리를 무력 충돌시킨 후 윈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속셈이었다. 나는 장제스에게 무조건 복종했다. 미군과 이간질시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룽윈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윈난군 최정예를 월남에 보내라는 장제스의 명령에도 토를 달지 않았다. 사령관 루한(盧漢·노한)에게 은밀하게 지시했다. “후방에 일이 생기면 즉시 회군해라. 일본군에게 노획한 무기의 일부를 호치민에게 지원해라.”
 
일본 패망 6주 후, 1945년 10월 2일 밤, 윈난사변이 일어났다. 두위밍(杜聿明·두율명)이 지휘하는 쿤밍 주둔 국민정부 중앙군이 윈난군을 공격했다. 중앙군은 요지를 점령하고 교통과 통신을 차단했다. 두위밍은 군사적으로만 성공했다. 관저에서 휴식을 취하던 룽윈이 우화산(五華山)으로 피신하는 것을 막지 못 했다. 양군의 대치가 시작됐다. 당황한 장제스는 육군 총사령관 허잉친(何應欽·하응흠)을 파견했다. 룽윈은 허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다. 장은 행정원장 쑹즈원(宋子文·송자문)편에 자신의 전용기를 쿤밍으로 보냈다. 룽은 쑹과 친분이 두터웠다. 장제스의 인사명령을 받아들였다. “룽윈을 군사참의원 원장에 임명한다. 군사위원회 쿤밍 행영(行營) 주임과 육군 부총사령관 겸 윈난성 주석직을 면(免)한다. 윈난성 주석에 루한을 명한다.” 10월 4일, 룽윈은 쑹즈원과 함께 쿤밍을 떠났다. 공항에 출영객이 인산인해였다. 두위밍이 거수경례하고 고개를 숙였다. 룽도 화답했다. “네 잘못이 아니다. 너는 명령에 충실했다.”
 
룽, 군사참의원 원장 받아들여
 
일본 패망 직후의 쿤밍 교외. [사진 김명호]

일본 패망 직후의 쿤밍 교외. [사진 김명호]

장제스는 뒤처리에 골몰했다. 두위밍을 충칭으로 불렀다. “룽윈 문제를 잘 처리했다. 국가에 큰 공을 세웠다. 룽윈에겐 죄를 지었다. 룽윈은 18년간 윈난에 군림했다. 추종자들이 많다. 더 있다간 누구 손에 변 당할지 모른다.” 이튿날 두의 면직을 발표했다. “윈난에서 무리한 행동으로 실책을 범했다.” 4일 후, 멀리 떨어진 둥베이(東北) 보안사령관에 임명했다. 충칭에 온 룽윈은 포로나 마찬가지였다. 항일전쟁 시절 중국 공군을 지휘하던 시놀트의 도움으로 난징을 탈출할 때까지 공포에 떨었다. 자녀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장제스의 룽윈 제거는 여진이 만만치 않았다. 한 성(省)을 얻고 전 중국을 공산당에게 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계속〉

선데이 배너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