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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창] 암울한 시절에 꽃피운 우리 근대미술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역병(疫病, 코로나19) 속에 나날을 보내자니 만사가 우울하여 유난히도 일찍 찾아온 봄꽃의 축제를 맞이하면서도 심드렁하게 지낼 수밖에 없는 봄날이었지만 뜻밖에도 지금보다 훨씬 암울했던 시절 우리 선인들의 삶과 예술을 보여주는 두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적지 않은 위안이 되었다.
 

근대미술 100년에 보내는 경의
서화협회전은 근대미술의 여명
문학과 미술이 만났던 모더니즘
잊어서는 안 되는 우리의 근대

서울 강남 가로수길에 있는 예화랑에서는 ‘洄(회): 지키고 싶은 것들’이란 제목 하에 꼭 100년 전, 제1회 ‘서화협회전’ 당시 전시장을 채웠던 서화가의 작품 38점을 내보이고 있다(24일까지). 작가의 면면을 보면 심전 안중식, 소림 조석진, 위창 오세창, 해강 김규진, 우향 정대유, 소호 김응원 등의 작품과 이 분들에게 그림을 배운 소정 변관식, 무호 이한복 등 우리 근대 한국화의 선구들이다.
 
돌이켜 보건대 1921년 4월 1일부터 3일 간 중앙중학교 강당에서 열린 서화협회전은 한국미술사 최초의 대중전시회였다. 3·1독립운동 2년 뒤에 열린 이 전시회를 당시 언론에서는 “꿈속에 있는 조선 서화계를 깨우는 첫 소리”라며 감격적인 기사를 내보냈다. 아직 전시장도 없고, 미술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아 ‘서화’협회로 출발하였지만 온 국민이 여기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일제가 부랴사랴 이듬해(192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를 개최한 것이 우리 근대미술 초기의 상황이다.
 
예화랑이 이런 기획전을 하게 된 것은 화랑대표 김방은의 증조부인 규당 김재관이 서화미술회 선생님들께 이름까지 넣어 받은 쌍낙관 그림들을 이번에 모두 공개하게 된 것이다. 그림의 내용과 형식은 전통회화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근대미술 초기의 분위기를 한 분의 컬렉션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고맙고 신기했다. 특히 김재관이 1915년에 서화미술회 서과(書科) 우등생으로 받은 상장에 부상으로 화선지 두 묶음, 붓 한 자루, 먹 두 알을 수여한다고 쓰여 있는 것이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우리의 근대미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구본웅이 이상을 그린 〈친구의 초상〉 1935년, 캔버스에 유채, 62x5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구본웅이 이상을 그린 〈친구의 초상〉 1935년, 캔버스에 유채, 62x5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서화협회전은 일제의 탄압에 1936년, 제15회전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지만 이때가 되면 우리 근대미술은 그런 질곡에도 불구하고 자기 역량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는 1930년대 중엽 이후 우리 근대미술 화가들이 당대의 문인들과 어울리며 예술세계를 천착해 나가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5월 30일까지).
 
구본웅, 정현웅, 길집섭, 김용준, 김환기, 이중섭, 최재덕 등 개성적인 화가들과 박태원, 백석, 이상, 이태준, 김광균, 구상 등 전설적인 문인들 사이의 예술적 교감을 보여주는 문헌자료와 인쇄미술 200여 점, 사진 및 시각자료 300여 점, 그리고 미술작품 140여 점으로 마치 장편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스토리텔링으로 깊은 감동을 전해준다.
 
전시기획력이 뛰어나고 디스플레이가 멋질 뿐만 아니라 유족들이 소장해온 스케치북, 스크랩 북, 편지 등 새로운 자료들이 대대적으로 공개되어 있고 그동안 월북화가라는 이유만으로 작품을 볼 수 없었던 최재덕, 김만형, 길진섭, 김용준 등의 명작들이 다수 소개되어 전시회의 뜻을 더하고 있다.
 
역사적 체감으로 말하자면 일제강점기는 분명 암흑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 어둠을 해쳐나가는 선인들의 몸부림이 문학과 미술 곳곳에 절절이 나타나 있다. 1933년 ‘모던 보이’ 이상은 종로에 ‘제비’ 다방을 열었다. 이곳에서 화가와 문인들은 아방가르드를 표방하며 서툰 솜씨로 모더니즘을 익혀갔다. 구본웅이 그린 친구(이상)의 초상에는 그런 야수파적인 강렬함이 빛나고 있다.
 
김광균이 ‘와사등’에서 보여준 이미지즘은 빠른 속도로 신문화의 충격을 받아들이며 ‘시는 그림같이, 그림은 시같이’ 나아갔다. 그 역동의 문예사조가 암울한 시절에 이루어졌다는 것이 역설로 다가온다. 낭만도 있었다. 출판인 조풍연의 결혼을 축하하는 화첩에는 길진섭, 김환기 등 당대 화가들의 화사한 그림들이 행복을 노래하고 있다.
 
책 표지는 화가의 중요한 장르 중 하나였다. 괴석 옆에 진달래꽃을 그린 김소월의 ‘진달래꽃’부터 아무런 꾸밈이 없는 백석의 ‘사슴’까지 수많은 독서인의 심금을 울렸던 책들의 장정은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본격 미술이 아니라고 치부하기 쉬운 신문 잡지의 삽화들은 문학과 미술이 만나는 현장이었다. 당시 정현웅은 "틀을 깨고 인민 속으로 직접적으로 뛰어드는 가장 새롭고, 가장 강력한 미술양식은 인쇄미술”이라고 외칠 정도였다.
 
역병만 아니었으면 장사진을 이루었을 이 전시회는 우리에게 두 가지 메시지를 강력히 전하고 있다. 하나는 후손들이여, 근대를 무시하지 말라는 무언의 꾸지람이다. 오늘날 세태는 우리 근대미술을 상징하는 ‘한국화 6대가’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 존재조차 모른다. 근대가 없었으면 현대도 없는 것이다. 또 하나는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는 이상의 외침이다. 그 외침의 근저에 깔린 힘겨움을 생각하면 오늘을 살고 있는 내가 마냥 부끄러워진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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