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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가는 왜 칼로 자기 팔을 잘랐나, 달마가 알려준 마음의 정체

  
     

[ 명상 칼럼 ]

 
 
#풍경1
 
달마 대사는 인도 사람입니다. ‘달마도’를 보면 눈이 부리부리하고 이국적으로 생겼잖아요. 그가 인도인이기 때문입니다. 달마는 석가모니 부처에게서 내려오는 깨달음의 맥을 이었습니다. 그리고 인도를 떠나 중국으로 갔습니다. 사람 사는 땅에 깨달음의 이치를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소림사의 입설정에는 달마 대사(왼쪽)와 제자 혜가의 상이 모셔져 있다. 혜가의 상을 자세히 보면 잘린 왼팔은 소매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소림사의 입설정에는 달마 대사(왼쪽)와 제자 혜가의 상이 모셔져 있다. 혜가의 상을 자세히 보면 잘린 왼팔은 소매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중국 땅에서 대(代)를 이어 법을 전하려면 제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죽어도 법은 이어지니까요. 달마는 험하기로 유명한 허베이성쑹산(嵩山)에서 지냈습니다. 쑹산은 봉우리만 72개에 달합니다. 그만큼 바위가 많은 악산입니다. 달마는 쑹산의바위동굴에서 9년간 면벽수도하며 제자를 기다렸습니다.  
 
하루는 신광이라는 40대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달마의 제자가 되기를 청했습니다. 달마는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법을 이으려면 끈기가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신광은 날마다 찾아와 달마에게 청했습니다. 눈이 펄펄 날리는 겨울, 동굴 밖에서 신광은 사흘 밤낮을 선 채로 있었습니다.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그동안 꿈쩍도 하지 않던 달마가 드디어 입을 뗐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뭇 중생을 구해주십시오.”
 
“만약 하늘에서 붉은 눈이 내리면 법을 주리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하늘에서 어떻게 붉은 눈이 내릴 수가 있습니까. ‘지금은 너를 제자로 삼을 생각이 없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게 아닐까요. 신광의 마음도 떠볼 겸해서 말입니다.  
 
중국 선불교의 초조인 달마 대사와 2대 조사 혜가 선사를 기리는 소림사 안의 입설정 입구.

중국 선불교의 초조인 달마 대사와 2대 조사 혜가 선사를 기리는 소림사 안의 입설정 입구.

 
이 말을 들은 신광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그는 칼을 빼서 자신의 왼팔을 잘라버렸습니다. 그러자 주위의 눈밭에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습니다. 결국 하늘에서 붉은 눈이 내린 셈이었습니다. 그걸 본 달마가 한마디 했습니다.  
 
“부처나 보살도 몸으로 몸을 삼지 않는다. 목숨으로 목숨을 삼지 않으니 법을 구할 만하다.”  
 
달마는 신광의 마음가짐에서 ‘비움의 싹’을 본 것입니다. 마침내 신광은 달마의 제자가 됐습니다. 달마는 그에게 ‘혜가’라는 법명을 주었습니다.  
 
#풍경2
 
출가 당시 혜가는 마흔 살이 훌쩍 넘었습니다. 도교에도 일가견이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바깥세상에서는 ‘똑똑한 사람’으로 통했습니다. 그런데 달마와 함께하는 마음공부에서는 원하는 만큼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나이는 들어가고, 마음은 급한데, 진도는 느린 겁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했을까요. 그래서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 말을 들은 달마 대사가 답했습니다.  
 
“불안한 마음을 내놓아라. 내가 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겠다.”  
 
쑹산에는 달마의 거대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이 정상 바로 아래에 달마가 9년간 면벽 수행했던 바위 동굴이 지금도 남아 있다.

쑹산에는 달마의 거대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이 정상 바로 아래에 달마가 9년간 면벽 수행했던 바위 동굴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 말을 듣고 혜가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내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이 불안, 삶에 대해 깊이 뿌리 내린 이 불안을 스승께서 해결해 주겠다니 말입니다. 혜가는 곧장 불안한 마음을 찾았습니다.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지치게 했던 마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구석으로, 구석으로 몰아넣던 마음입니다. 그걸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내가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막상 손으로 쥐려니까 잡을 수가 없습니다. 불안함이 있던 정확한 위치도 모르겠고, 불안함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양도 모르겠고, 불안함을 거머쥘 수 있는 손잡이 같은 것도 보이질 않습니다. 조금 전까지 틀림없이 있었는데, 나를 콕콕 찔렀는데 말입니다. 당황한 혜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아무리 마음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솔직하게 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안의 덩어리를 잡고서 ‘툭!’하고 보따리를 앞에 내놓아야 스승이 없애줄 텐데, 그러질 못하겠으니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달마 대사가 한마디 했습니다.  
 
“네 불안한 마음이 이미 없어졌느니라. 너는 보는가.”
 
자신의 왼팔을 자른 뒤 이곳에 와서 치료를 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는 이조암. 초조 달마의 뒤를 이어 이대 조사가 된 혜가가 주석했던 암자다.

자신의 왼팔을 자른 뒤 이곳에 와서 치료를 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는 이조암. 초조 달마의 뒤를 이어 이대 조사가 된 혜가가 주석했던 암자다.

 
 
#풍경3
 
 불가(佛家)에서는 이 일화를 ‘안심(安心) 법문’이라 부릅니다. 편안할 안(安)자, 마음 심(心)자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을 편안케 하는 법문’입니다. ‘혜가의 마음이 불안했고, 그 마음을 편안하게 했으니 안심 법문이구나.’ 이렇게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 깊은 이치가 숨어 있습니다.  
 
혜가는 “마음이 불안하다”고 했습니다. 그게 혜가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혜가에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마음이 화가 납니다” “마음이 우울합니다” “마음이 외롭습니다” “마음이 괴롭습니다” “마음이 황홀합니다” “마음이 슬픕니다” 잠시만 짚어봐도 알 수 있습니다. 혜가의 물음이 곧 우리의 물음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러니 혜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달마에게 물은 셈입니다. “이 불안하고 괴롭고 슬프고 아픈 마음을 어떡해야 합니까?”
 
이 물음에 달마는 달콤한 위로를 건네지 않았습니다. “아프니까 인간이다” “불안하니까 사람이다” “누구나 다 그렇다” “그게 인생이다” 이런 식으로 쓰다듬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런 식의 위로를 통해서는 불안의 뿌리를 뽑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림사 뒤에 있는 쑹산에는 달마의 거대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1시간 가까이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소림사 뒤에 있는 쑹산에는 달마의 거대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1시간 가까이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이때 만약 달마가 혜가를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다독여줬다면 어땠을까요. 며칠 안 가혜가의 불안은 다시 올라왔을 겁니다. 그럼 달마는 또 안아주고, 얼마 후에 혜가는 또 불안을 호소했을 겁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끝이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일생을 다 보내겠지요.  
 
그런데 달마의 대응은 달랐습니다. 어떠한 위로도, 포옹도, 쓰다듬음도 없었습니다. 대신 적나라한 정답을 들이밀었습니다. “네 불안이 이미 없어졌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또 궁금증이 생깁니다. 이게 왜 정답이 되는 걸까요? 그 말을 듣고 혜가의 불안은 왜 사라졌을까요?
 
#풍경4
 
달마와 제자 혜가가 주고받은 이 대화는 불가(佛家)에서 아주 유명한 선문답입니다. 여기에는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마음이란 OO이다”라는 답이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달마는 여기서 ‘마음의 정체’에 대해 짚어주고 있습니다.  
 
달마 대사의 선맥과 무술을 잇는 소림사 정문. 지금도 소림사 주위에는 많은 무술학교가 있다.

달마 대사의 선맥과 무술을 잇는 소림사 정문. 지금도 소림사 주위에는 많은 무술학교가 있다.

 
만약 우리가 마음의 정체를 좀 더 알게 된다면 어떨까요. 일상에서 수시로 피고 지는 온갖 마음을 대할 때, 좀 더 지혜로워지지 않을까요. 좀 더 분명해지지 않을까요. 그래서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선문답 일화를 일부러 끌어와 봤습니다.  
 
가령 우리에게 찰흙이 있습니다. 그걸로 호랑이도 만들고, 토끼도 만들고, 개구리도 만들고, 늑대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은 찰흙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찰흙의 정체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찰흙 호랑이를 보면 ‘호랑이’만 기억합니다. 무서워합니다. 또 찰흙 토끼를 보면 ‘토끼’만 봅니다. 그래서 귀여워합니다. 그의 앞에 찰흙 호랑이가 나타날 때는 벌벌 떱니다. 반면 찰흙 토끼가 나타날 때는 무척 반가워합니다. A는 호랑이와 토끼만 알지, 찰흙은 잘 모르니까요.  
 
달마 대사는 ‘안심 법문’에서 이걸 지적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안한 마음이 올라오면 안절부절, 성난 마음이 올라오면 버럭버럭, 우울한 마음이 올라오면 축 처집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도 A처럼 호랑이와 토끼만 보지, 찰흙은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안과 성냄과 우울만 보지, ‘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달마의 조각상 맞은 편에 있는 산에 세워진 혜가의 이조암.

달마의 조각상 맞은 편에 있는 산에 세워진 혜가의 이조암.

 
#풍경5
 
달마는 혜가에게 찰흙 호랑이에서 호랑이를 보지 말고 찰흙을 보라고 말합니다. 불안한 마음에서 불안을 보지 말고 마음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럼 달라집니다. 찰흙은 무엇이든 원하는 걸 만들고, 다시 뭉개서 흙덩이로 돌아갑니다. 마음도 똑같습니다. 마음도 없다가, 생겨나서 다양한 꼴의 마음으로 작용하고, 그냥 두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빈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혜가가 ‘불안한 마음’을 찾을 수 없을 때, 달마는 “네 불안한 마음이 이미 없어졌다”고 말한 겁니다. 호랑이 모양을 하고, 늑대 모양을 하고 있는 찰흙의 정체. 다시 말해 마음의 정체를 일러준 겁니다. 세상 모든 마음은 생겨났다가, 작용하고, 다시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마음은 작용만 할 뿐, 본래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호랑이 꼴, 늑대 꼴을 해도 본래 찰흙이듯이 말입니다.  
 
달마 대사의 선맥을 잇는 소림사의 선원. 중국 문화혁명기 때 소실된 선맥을 다시 복구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달마 대사의 선맥을 잇는 소림사의 선원. 중국 문화혁명기 때 소실된 선맥을 다시 복구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달마 대사는 『무심론(無心論)』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어둠 속에서 나뭇등걸만 보고서 귀신으로 여기고, 새끼줄만 보고서 뱀으로 여긴다. 그래서 두려움이 일어난다.” 마음의 정체를 깨달은 혜가는 결국 달마의 뒤를 이어 중국 선불교의 2대 조사가 되었습니다.  
 
글·사진=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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