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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실리를 탐하다 ‘두터움’을 잃으면…

일러스트 김회룡

일러스트 김회룡

바둑은 집으로, 선거는 표로 계산한다. 최후엔 집과 표만 남는다. 바둑에서 집은 ‘실리’라고도 표현되는데 이 실리는 함정을 내포하고 있다. 실리를 탐하면 엷어지는데 엷어지면 필시 사고가 난다. 쫓기며 전전긍긍하게 되고 매수마다 고심해야 하고 그럼에도 실밥 터지듯 일이 터진다. 그러므로 좋은 바둑을 두어 승리하려면 ‘두터움’을 유지해야 한다.
 

바둑의 부득탐승. 선거에도 통해
김종인은 가장 바둑적인 정치인

두터움은 인생사로 비유하면 신뢰나 명분 같은 것으로 당장은 돈이 안 되지만 언젠가 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힘이 있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두터움을 상실했기에 쫓기고 쫓기다가 무너졌다. 조국 사태에 이어 위성정당을 만들어 명분에 눈감는 등 계속 엷음이 축적되었고 결국 분노의 폭풍을 몰고 온 사고가 잇달아 터졌다. 먼저 실리를 취하고 나중에 타개한다는 선실리후타개(先實利後打開) 전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타개의 방법은 월등한 힘으로 밀어붙이기, 그게 어려우면 임기응변,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새털처럼 가벼운 행마로 꼬리를 자르고 위기를 벗어난다. 더불어민주당은 형세판단이 늦어서 자기들이 어느 정도 위기인지 몰랐기에 타개도 중구난방에 그치고 말았다.
 
오세훈의 승리는 바둑 10결의 첫 번째인 부득탐승(不得貪勝)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는 처음에 안철수가 입당한다면 국민의힘 후보 자리를 양보한다고 말했는데 실제 양보할 의사가 있어 보였다. 이게 욕심 없는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큰 힘이 됐다. 이번 선거는 집권당의 위선에 대한 분노가 표면을 달궜다. 이면엔 집값이나 세금 같은 실리전쟁이 뜨거웠다. 후보는 상대적으로 욕심이 적어 보이는 것이 유리했다. 부득탐승이란 승리를 탐하면 얻지 못한다는 것으로 승부의 아이러니와 이율배반을 담고 있다.
 
프로기사들은 어떤 수를 놓고 “은근하다”는 표현을 한다. 묘수도 강수도 승부수도 아닌데 상대하기 쉽지 않은 수를 두고 하는 얘기다. 김종인 국민의힘 전 비대위원장은 바둑으로 치면 ‘은근한 수’를 잘 둔다. 그의 행보를 보면 몸은 보수에 있지만 머리는 어느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이 점에서 김종인은 가장 바둑적인 정치인이 아닌가 싶다.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이 세기의 대결을 벌일 때 당시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이던 김종인은 대회 현장을 찾았다. 그때 한 사람이 동행했는데 박영선 의원이었다. 두 사람이 기자들이 꽉 찬 해설장으로 걸어가던 모습이 기억에 또렷하다. 5년 후 그는 태연히 반대편에 서게 됐는데 신기하게도 어색하지 않다.
 
1년 후면 대통령선거가 있다. 큰 승부가 기다리고 있다. 누가 두터움을 회복하느냐. 바둑으로 치면 승부는 여기에 달려있다. 더불어민주당도 국민의힘도 엷어 터졌다. 한번 엷어지면 여간해서 두터움을 회복하기 어렵다.
 
알파고 이후 바둑 세상은 AI가 지배하고 있다. AI는 인간보다 월등한 고수로서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것이다. 바둑은 화점파나 소목파 같은 파벌은 없지만 실리 취향이나 세력 취향 같은 기풍은 존재했다. AI는 그마저도 벗어나라고 한다.
 
정치가 보수나 진보의 틀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이 순간의 최선’을 추구하는 바둑적 관점에서 보면 그게 다 덧없는 일이다. 자신의 선택의 폭을 제한하는 족쇄가 될 뿐이다. 조치훈 9단은 ‘석음(石音)’에 귀를 기울인다고 했다. 좋은 수를 찾아 헤매지만 그게 어려울 때는 평생 동고동락한 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간절하게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바둑 둘 때 흑을 쥐었다 해서 흑돌의 소리만 듣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두터움을 유지하려면 백의 소리도 들어야 한다. 내 진영의 요란한 스피커는 놔두고 저잣거리의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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