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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상’ 묘사 피카소 그림, 자유·공산 진영 모두 불평

[영감의 원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1951), ⓒ 2021-Succession Pablo Picasso-SACK (Korea).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1951), ⓒ 2021-Succession Pablo Picasso-SACK (Korea).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한국에서의 학살’이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전시된다(5월 1일~8월 29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거장이 한국전쟁을 소재로 삼은 그림인 데다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작품이라 화제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사실 미학적 차원에서 대표작으로 꼽히지는 못하지만,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피카소를 논할 때는 빠지지 않는 그림이다. 이 작품이 1951년 파리 살롱 드 메에서 처음 공개되었을 때의 반응을 미술사학자 정영목의 논문 구절로 보자. “양 이데올로기의 진영이나 일반인들의 관심은 냉담했다. 제2의 ‘게르니카’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우선 미학적으로 ‘게르니카’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평가였고, 프랑스 공산당은 공산당대로 학살의 주체가 선명하지 않다는 데에 불만을 품었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진영은 한국전쟁에 관한 공산주의자들의 프로파간다로서 피카소가 미국을 이 전쟁의 원흉으로 몰고 간다고 비난했다.”
 

공산당원이던 1951년 파리서 공개
스페인 내전 그린 ‘게르니카’ 못 미쳐

프랑스 공산당은 ‘유약하다’ 비난
미국선 ‘학살자=미군’ 암시에 불만
NYT “스탈린 프로파간다” 비웃어

즉 프랑스 공산당은 가해자를 미군으로 나타내지 않아 불만이었고 미국은 가해자를 미군으로 암시했다고 불만이었다. 왜 이런 생각들을 했을까? 그것은 피카소가 공산당에 가입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44년 파리가 나치로부터 해방되자 그는 공산당에 가입하며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나 소비에트 연방에서나 나의 조국 에스파냐에서나 (나치와 파시즘에 대항해) 가장 용감하게 싸웠던 것은 공산주의자들 아닌가요?”
  
예술의전당서 내달 1일 국내 첫선
 
이것은 당시 많은 프랑스 문화예술인이 공유한 생각이었고, 제2차 대전 당시 유럽 상황에서 틀린 말도 아니었다. 더구나 피카소는 37년 고국 스페인의 게르니카 지역이 우익 파시스트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 나치에 의해 무차별 폭격을 당한 후 분노에 차 걸작 ‘게르니카’를 그렸었으니 더욱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피카소와 여러 프랑스 지성인들은 스탈린이 장악한 공산주의 러시아 또한 파시즘 국가로 변모하고 있는 상황을 잘 모르거나 알면서도 애써 외면했다.
 
프랑스 공산당은 유명 인사 피카소의 입당을 대환영했지만, 사실 피카소 미술은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주의 예술의 이상에 맞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스탈린 정권은 일반 노동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림(북한 그림을 생각하면 된다)만이 참다운 예술이라며 전위 예술을 탄압했다. 공산혁명을 열렬히 지지한 추상미술의 선구자 말레비치도 탄압을 면하지 못했다. 한때 유럽을 선도한 러시아 전위예술은 몰락했다. 소련 미술사학자 케메노프는 피카소의 작품을 두고도 “퇴폐적인 부르주아 예술”이라고 욕했고, 심지어 ‘게르니카’에 대해서도 “영웅적인 에스파냐의 공화주의자들을 그리는 대신 그의 다른 작품에서와 같은 비참하고 뒤틀린 형태들만 그렸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프랑스 공산당은 피카소를 붙들어 놓고 싶어 비난을 삼갔다. 피카소 역시 자신의 작품을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구소련에서 일어나는 전위예술 탄압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자신이 속한 공산당의 의지에 좀 더 타협하는, 일종의 서비스 차원인 일련의 그림을 내놓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한국에서의 학살’인 것이다. 그러니 미국은 이 그림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전쟁의 가해자와 희생자를 완벽한 이분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림 오른쪽에 있는 군인들은 모두 성인 남성이며 갑옷과 헬멧, 총과 칼로 중무장한 데다가 그 형태가 각지고 기계적이다. 반면 그림 왼쪽에 있는 민간인들은 모두 성인 여성과 남녀 아이들이며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로 표현되어 무력함과 순수함이 강조된다. 군인들은 칼과 총을 모두 여인들과 아이들에게 겨누고 한 발을 대각선으로 뻗어 무자비한 침략자와 공격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마네 ‘막시밀리앙의 처형’(1868~9), 만하임 미술관 소장.

마네 ‘막시밀리앙의 처형’(1868~9), 만하임 미술관 소장.

그런데 이 단순할 정도로 명쾌한 대비와는 달리 다른 요소들은 애매모호하다. 일단 배경이 특별히 한국적이지 않고 희생자들의 얼굴도 특별히 동아시아인 같지 않다. 실제로 피카소는 한국에 한 번도 온 적이 없으며 한국이라는 배경에도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 군인들의 복장은 고대와 중세 유럽의 전사들을 섞어 놓은 모습이다. 사실 ‘한국에서의 학살’의 구도는 19세기 스페인 거장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그림 ‘1808년 5월 3일’과 프랑스 모던아트의 선구자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막시밀리앙의 처형’에서 따온 것이다.
 
고야 ‘1808년 5월 3일’(1814), 프라도 박물관 소장.

고야 ‘1808년 5월 3일’(1814), 프라도 박물관 소장.

고야의 그림은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 민중 봉기자들을 학살하는 장면이다. 마네의 그림은 프랑스가 멕시코를 점령할 야욕으로 꼭두각시 황제 막시밀리앙을 세웠다가 멕시코 공화주의자들에게 밀려나 퇴각한 후 프랑스에게도 버려진 막시밀리앙이 멕시코 공화국 군대에게 처형당하는 장면이다. 두 그림은 각각 전쟁의 폭력과 제국주의의 아이러니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나타내 칭송받고 있다. 반면에 ‘한국에서의 학살’은 이 그림들의 구도를 따왔으면서도 이 그림들의 생동감은 배제한 채 전쟁의 폭력과 희생자를 그저 원론적이고 단순한 대비 구조로 나타냈기에 미학적으로 크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 ‘자타공인 천재’가 이렇게 단순하게 원론적이고 생동감 없는 전쟁 테마 그림을 내놓은 것은 정치적 논란이 두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가해자 군인들의 모습이 그토록 모호한데도 미국이 극심한 거부 반응을 보이자 피카소는 설명했다. “전쟁이란 무엇일까?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하고 회상할 때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괴물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더구나 미군이나 어떤 다른 나라 군대의 헬멧이나 유니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미국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나는 인류의 편에, 모든 인류의 편에 서 있다.”
 
이 말에서 피카소의 진실한 인류애를 읽는 사람도 있지만, 냉소하는 사람도 있다. 의식 있는 사회주의자로 행세하되 생활과 비즈니스는 철저히 자본주의적이었던 피카소가 미국 시장에 그림을 팔아야 해서 이렇게 원론적이면서 디테일은 모호한 그림과 말을 남겼다는 것이다.
 
어쨌든 미국은 피카소의 입국을 금지했고, 정보 당국이 그를 사찰했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80년이 되서야 미네아폴리스와 뉴욕에서 처음 전시됐다. 이때도 뉴욕타임스는 이 작품을 “스탈린 프로파간다”라고 비웃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의 학살’은 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한국에서 더더욱 터부시될 수밖에 없었다. 2011년에는 이 그림이 교과서에 실리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신천 학살’ 모델로 했는지 논란도
 
특히 ‘신천 학살’을 모티프로 한 것인지를 둘러싼 논란이 거셌다. 신천 학살은 전쟁 중이던 50년 말 황해도 신천에서 전체 군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5000여 명이 살해된 사건을 말한다. 북한은 이 사건이 해리슨이라는 장교가 이끄는 미군에 의해 일어난 일방적 학살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내외 연구에 따르면 당시 미군은 평양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붙어 신천에 오래 머물지 않았으며, 신천에 진주한 미군 장교 명단에 ‘해리슨’이라는 이름도 없다. 미군과 상관없이 당시 한반도 내 좌우 대립과 상호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발생한 쌍방 살해라는 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견해다.
 
한국전쟁의 기원

한국전쟁의 기원

이 그림이 미국의 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981) 초판본의 표지로 사용되면서, 그리고 한국의 일부 운동권이 이 책을 ‘미국의 남침 유도설’ 혹은 ‘북침설’의 책으로 왜곡해 전파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더욱 정치적으로 민감한 그림이 되었다(참고로 커밍스의 주장은 한국전쟁 전부터 한반도는 내란 상태로서 한국전쟁은 단순히 그 확전이라는 것이었는데, 구소련 기밀문서가 해제되면서 김일성이 구소련을 설득해 지원을 받아 일으킨 철저한 계획 남침임이 밝혀진 후, 커밍스는 주장을 일부 수정했다).
 
어쨌든 피카소 자신은 그림 속 가해자가 미군이라고 말한 적도 없고, 신천 학살을 모델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한 적이 없다. 이 그림이 그저 보편적인 반전(反戰) 반폭력 그림으로 받아들여지면서 56년 헝가리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소련 공산정권의 무력 진압에 항의하는 의미로 그 복제판이 게시되기도 했다.
 
결국 예술을 받아들이는 것은 관람자의 몫이다.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은 한국전쟁 중에 인민군, 국군, 미군 등 양측 군대 모두에 의해 일어난 여러 민간인 학살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좌우 불문하고 이러한 민간인 학살은 지속적으로 진상을 밝혀 희생자들을 위로해야 한다. 그리고 이 참극의 근본 원인인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들, 즉 김일성과 북한의 여러 정치인들에 대해, 통일 후 그들을 전범(戰犯)으로서 엄정히 다뤄 평화를 위한 반면교사로 삼는 것이 이 그림을 보며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symoon@joongang.co.kr
미술전문기자. 서울대 경제학부 학·석사, 런던대 골드스미스컬리지 문화학 석사, 홍익대 예술학과 박사 과정 중. 저서로 『그림 속 경제학』(2014), 『명화독서』(2018), 『광대하고 게으르게』(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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