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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윈 배출한 윈난강무당, 청산리 영웅 이범석도 다녀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8〉

아들과 함께한 리페이롄(왼쪽)과 룽윈의 여동생. [사진 김명호]

아들과 함께한 리페이롄(왼쪽)과 룽윈의 여동생. [사진 김명호]

옛날부터 윈난(雲南)인들은 무(武)를 숭상했다. 글(文)은 잘해도 알아주지 않았다. 룽윈(龍雲·용운)도 일찌감치 무예의 길로 들어섰다. 1990년 10월, 장남 룽셩우(龍繩武·용승무)가 타이베이에서 구술을 남겼다. “부친은 어릴 때부터 독서를 싫어했다. 기마와 궁술, 무예에만 열중했다. 윈난은 궁핍한 변방이었다. 아편 재배 외에는 돈 될 것이 없었다. 절약을 위해 옷도 거의 입지 않았다. 잘 때도 옷이 해질까 봐 애 어른 할 것 없이 벌거벗고 잤다. 도둑이 들면 온 마을 사람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뛰쳐나와 볼 만했다. 나도 말로만 들었지 본 적은 없다.”
 

한국 청년들, 군사학 교육 받아
신규식 선생은 초대 교장과 친분

룽, 민주의 보루 윈난 18년 통치
비판적인 지식인들에게도 관대
교사 출신 리페이롄 내조의 공 커

윈난은 내세울 것이 없었다고 하지만, 국방력 하나만은 빠지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청나라 말기 황실은 인도차이나(베트남)와 버마(지금의 미얀마)의 국경 지역인 윈난에 2개 국방사단을 신설했다. 서구의 편제를 모방한, 포병 여단까지 갖춘 신식 군대였다. 대포도 140여 문이 있었다. 군관 양성을 위해 윈난강무당을 신설하고, 조폐창과 병공창도 만들었다. 별도의 화폐를 주조하고, 군 장비도 직접 생산해 비축했다. 청 말 윈난에서 제조해 쌓아둔 복장과 신발은 훗날 쓸모가 있었다. 중일전쟁 8년간 중국군 장교와 사병들이 입고 신었을 만큼 충분한 양이었다.
 
윈난, 청 말부터 국경 수비 요충지
 
룽윈을 스케치하는 윈난 주둔 미군 종군화가. [사진 김명호]

룽윈을 스케치하는 윈난 주둔 미군 종군화가. [사진 김명호]

윈난왕 룽윈을 배출한 윈난강무당은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이 설립한 동북강무당,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텐진(天津)에 세운 북양육군강무당과 함께 청 말의 3대 군사학교였다. 중국혁명의 요람 황푸군관학교도 초창기 교관은 윈난강무당 출신이 즐비했다. 졸업생들도 볼 만했다. 독일 유학 떠나기 전, 윈난군헌병사령관과 경찰청장을 역임한 중국 홍군의 아버지 주더(朱德·주덕)와 마오쩌둥 사망 후 4인방 몰락에 결정적 역할을 한 예젠잉(葉劍英·엽검영), 국·공전쟁 말기 천껑(陳賡·진갱)에게 투항한 마지막 윈난왕 루한(盧漢·노한) 등이 윈난강무당에서 군사학을 익혔다.
 
윈난강무당 초대 교장(監督) 리건위안(李根原·이근원)과 교관 탕지야오(唐繼堯·당계요)는 한반도와도 인연이 많았다. 탕은 예관 신규식 선생과 친분이 두터웠다. 윈난의 군·정을 장악하자 한국 청년들에게 군사학을 습득할 계기를 마련해줬다. 한국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룽셩우의 구술에 이런 내용이 있다. “탕지야오는 인상이 좋았다. 온화한 유장(儒將) 분위기에 의표가 당당했다. 병적일 정도로 야심도 컸다. 윈난 성장시절, ‘동대륙(東大陸)의 주인’으로 자처하며 윈난대학의 전신인 둥루(東陸)대학도 설립했다. 윈난강무당은 동린(東鄰)인 한국 학생들에게 영향을 줬다. 훗날 윈난항공학교를 졸업한 한국인들이 ‘윈난파’를 형성할 정도였다. 김일성이 굴기하자 거의 숙청당했다.” 암울했던 시절, 청산리에서 기개를 떨친 이범석 장군과, 한때 북한의 2인자였던 차수 최용건도 윈난강무당을 다녔다. 그 외에도 많았다. 이범석은 연령 미달이었다. 탕이 “나이가 대수냐”는 한마디에 입학이 가능했다.
 
윈난성은 다른 성과 접촉이 거의 없었다.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후방기지로 변하면서 외부와 왕래가 시작됐다. 쿤밍에 진입하는 국민당 중앙군. [사진 김명호]

윈난성은 다른 성과 접촉이 거의 없었다.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후방기지로 변하면서 외부와 왕래가 시작됐다. 쿤밍에 진입하는 국민당 중앙군. [사진 김명호]

중국인들에게 윈난강무당의 상징은 누가 뭐래도 룽윈이었다. 룽윈은 숫기가 없었다. 생도 시절 어느 구석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운동회에서 거대한 체구의 프랑스 장사를 날려버린 발차기 한방은 조용한 개천에서 솟아오른 용의 트림이었다. 윈난을 들었다 놓을 정도로 반응이 요란했다. 삼삼오오, 모였다 하면 룽윈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당대의 재녀 리페이롄(李培蓮·이배련)과구잉치우(顧映秋·고영추)와의 인연도 발차기 덕분이었다. 리페이롄은 윈난의 내로라하는 명문 출신이었다. 명의(名醫)로 소문난 부친은 물론이고, 오빠들도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윈난 제1의 미녀”로 명성이 자자하던 구잉치우와는 학교 동문이었다. 운동회 구경 갔던 오빠는 “윈난 최고의 영웅을 봤다”며 손짓 발짓해가며 룽윈 얘기로 침이 말랐다. 윈난 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리페이롄은 호기심이 많았다. 옷깃은커녕, 눈길 한 번 스친 적 없는 소수민족 청년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이튿날 학교에서도 온통 룽윈 얘기뿐이었다. 활달한 여학생이 엉뚱한 의견을 냈다. “영웅에게 경의 표하는 것이 도리다. 대표단을 구성해서 룽윈을 방문하자. 꽃다발만으론 부족하다. 시, 서, 화에 능한 리페이롄이 멋진 선물을 준비해라. 전달은 제일 예쁜 구잉치우가 맡아라.” 다들 박수로 화답했다. 방문단을 만난 룽윈은 구잉치우의 미모에 홀딱했다. 리페이롄이 밤을 새워 마련한 작품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리는 룽윈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룽, 구잉치우 미모에 홀딱 반해
 
사범학교을 마친 리페이롄은 초등학교 교사로 나날을 보냈다. 구잉치우는 넓은 세상으로 가겠다며 베이징으로 갔다. 쿤밍(昆明)을 떠나기 전 룽윈을 찾아갔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장담 못 한다. 중국은 난세다. 난세의 군인에겐 대담하고 지혜로운 여자의 내조가 절실하다. 리페이롄과 좋은 인연 맺기 바란다.” 퇴근길의 리페이롄은 교문 건너편에 말쑥한 군복차림의 룽윈을 보고 멈칫했다. 고개를 반쯤 숙이고 다가갔다. 부동자세로 말 한마디 없이 내미는 룽윈의 손을 덥석 잡아버렸다.
 
룽윈은 부인 복을 타고났다. 중국의 군인정치가 중 최고라고 해도 부인하는 사람이 없었다. 리페이롄은 문화 수준이 높았다. 서예는 힘이 넘치고, 그림은 정교했다. 시도 일품이었다. 사상이 개방적이고 문화인들과 교류 폭도 넓었다. 민주인사들과도 접촉이 빈번했다. 상대가 누구건 겸손했다, 아는 척하며 훈계하거나, 촐랑대는 법이 없었다. 룽윈은 18년간 윈난을 통치하면서 비판성 발언 일삼는 지식인들에게 관대했다. 중일전쟁 시절 윈난이 민주의 보루가 되기까지는 리페이롄의 영향이 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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