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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5] 단종·금성대군 유배지 가른 고개, 50㎞ 거리 둘은 못 만났다

왕은 어인 일인가 물었다. 사약을 갖고 내려온 금부도사는 엎드려 울기만 했다. 노산군(魯山君)으로 신분이 내려간 단종은 그날, 죽었다. 세조실록은 단종의 죽음을 간단하게 알린다. 
 소백산 고치령(760m)은 경북 영주와 강원 영월을 잇는 고개다. 영주는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이유)가, 영월은 단종(이홍위)가 세조(수양대군, 세종의 둘째 아들)에 의해 유배된 곳이다. 김홍준 기자

소백산 고치령(760m)은 경북 영주와 강원 영월을 잇는 고개다. 영주는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이유)가, 영월은 단종(이홍위)가 세조(수양대군, 세종의 둘째 아들)에 의해 유배된 곳이다. 김홍준 기자

‘노산군이…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1457년, 세조 3년 10월 21일).’ 단종은 왜 갑자기 죽었을까. 정말 스스로 목을 맸고, 왕실에서 예로써 장사 지냈을까.

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5> 경북 영주 고치령

단종, 영월 청령포서 유배 생활
옮긴 거처 관풍헌서 생 마감

금성, 안평 이어 수양의 타깃 돼
125리 떨어진 영주서 귀양살이


 

# 고치령 산령각에 모신 단종·금성대군
고치령(760m). 단종과 그의 숙부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 아들)은 이 고개 앞뒤 너머에 있었다. 강원 영월과 경북 영주는 그들의 유배지였다. 
 
실록은 온통 양녕대군과 영의정 정인지의 ‘단종과 단종 편’에 대한 탄핵(처벌 요구)으로 일관하다가 느닷없이 ‘노산군의 졸’이 등장한다. 뜬금없다고 할 정도다. 몰려난 권력의 비보는 간결할수록, 세상이 모를수록 몰아낸 현 권력에 좋다. 또 다른 혁명의 부싯돌이 될 수 있으니까.

 
경북 영주 고치령.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경북 영주 고치령.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단종과 금성대군 사이는 125리(50㎞), 하루면 넉넉히 갈 거리다. 그 둘은 만나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단종이 영월 청령포로 유배 가는 도중 금성대군이 역모했다며 조정이 들썩였다. 조카를 다시 왕위에 앉히려 했다는 것. 금성대군이 사약을 받았다. 고개 넘어 단종도 이 일로 죽음에 몰렸다. 둘의 사망일은 정확하지 않다.
경북 영주와 강원 영월을 잇는 고치령 정상의 산령각. 소백산신과 태백산신을 모시는 이곳은 영월에 유배된 단종(이홍위)과 고개 너머 영주에 유배된 단종의 숙부이자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이유)도 기린다.단종이 폐위된 뒤 그들은 결국 다시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김홍준 기자

경북 영주와 강원 영월을 잇는 고치령 정상의 산령각. 소백산신과 태백산신을 모시는 이곳은 영월에 유배된 단종(이홍위)과 고개 너머 영주에 유배된 단종의 숙부이자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이유)도 기린다.단종이 폐위된 뒤 그들은 결국 다시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김홍준 기자

고치령은 '접혔다'고 할만큼 구불구불하고도 '숨 토할' 정도로 가파른 길을 냈다. 눈이 조금이라도 내리면 통행 금지다. 고치령 정상에는 산령각(山靈閣)이 있다. 

 
김기진 영주문화원장은 “산령각은 소백산신과 태백산신을 모시는데, 그 산신 중에 단종(태백산)과 금성대군(소백산)이 있다”며 “매년 정월 열 나흗날에 제를 지낸다”고 밝혔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는 “보통 산신각은 불교에 흡수돼 사찰의 한 부분을 이루는데, 고치령 산령각처럼 독립적으로 산신을 모시는 경우는 드물다”고 전했다.  
 
2월 중순의 바람이 거셌다. 텐트 폴이 부러지면서 날아갈 정도였다. 고치령을 넘은 차량은 이날 오후 내내 단 세 대. 쓸쓸한 고개다.  
고치령 정상의 산령각 내부. 소백산신과 태백산신을 모시는 이곳은 영월에 유배된 단종(이홍위)과 고개 너머 영주에 유배된 단종의 숙부이자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이유)도 기린다. 김홍준 기자

고치령 정상의 산령각 내부. 소백산신과 태백산신을 모시는 이곳은 영월에 유배된 단종(이홍위)과 고개 너머 영주에 유배된 단종의 숙부이자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이유)도 기린다. 김홍준 기자

# 종친과 신하들의 거센 탄핵  
단종과 금성대군(이유·李瑜)에 대한 탄핵은 이날 자 실록뿐만 아니라 앞선 날들에도 줄기차게 등장한다. 금성의 백부인 양녕대군·효령대군이 탄핵했고, 넷째 형인 임영대군도 그러했으며, 신하인 정창손·신숙주 등도 그랬다. 
 
문종이 죽고 5일 뒤, 단종 즉위(1452년 5월 14일) 때부터 이미 편이 갈려 있었다. 단종 편에는 숙부 안평대군·금성대군, 할아버지 세종의 후궁이자 단종의 유모인 혜빈 양씨와 그녀가 낳은 한남군·영풍군과 단종의 매형인 정종 등이 섰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와 청구리를 잇는 제월교(霽月橋). 퇴계 이황이 ‘장맛비가 걷힌 뒤 맑은 하늘같은 선비의 기운이 감돈다’는 뜻으로 이름 붙였다. 본래는 '청다리'라 불렀는데, 사람들이 이곳에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 키웠다고 해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단종복위 운동이 발각되면서 금성대군을 비롯한 순흥의 유림들이 참형을 당하자 그들의 아이들이 이곳에 피신해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김홍준 기자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와 청구리를 잇는 제월교(霽月橋). 퇴계 이황이 ‘장맛비가 걷힌 뒤 맑은 하늘같은 선비의 기운이 감돈다’는 뜻으로 이름 붙였다. 본래는 '청다리'라 불렀는데, 사람들이 이곳에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 키웠다고 해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단종복위 운동이 발각되면서 금성대군을 비롯한 순흥의 유림들이 참형을 당하자 그들의 아이들이 이곳에 피신해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김홍준 기자

세종~세조와 대군들 가계도

세종~세조와 대군들 가계도

민심은 불안했다. 후일 선조 때의 이정형은 동각잡기(東閣雜記)에 ‘왕은 어렸고, 대군은 강성하다’고 전한다.  

 
수양대군은 이미 세종 때부터 ‘때’를 기다린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실책을 범했다. 둘째 아들 수양을 국정에 참여시켰다. 종친은 국정에서 멀어져야 ‘딴 마음’을 먹지 않는다. 
 
세종은 또 분경(奔競, 인사 청탁) 금지의 해제를 언급했다. 이는 후일 수양이 단종 즉위 때의 분경 금지 조치를 와해하게 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1452년, 단종 즉위년 5월 19일). 수양에게 사람이 몰려 세를 불릴 수 있었다. 세종은 세자인 문종이 아프다며 수양에게 명나라 사신을 맞게 했다. 
 
수양은 단종의 즉위를 명나라에 알리는 고명사은사를 자청했다. 고명사은사는 권력을 위한 본격적인 물밑작업이었다. ‘명분’의 단종이냐 ‘현실’의 수양이냐. 주변은 그렇게 갈렸다.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이 먼저 손쓴다. 계유정난(1453년, 단종 1년 10월 10일). 모반을 꾀했단다. 주요 타깃은 영의정 김종서. 수양의 하인 임어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쓰러뜨린다. 황보인도 죽인다. 사실상 수양의 세상. 김종서 등과 결탁했다는 안평대군은 강화로 유배 가자마자 사약을 마시고 죽으니, 단종에게 남은 이는 금성이었다. 
 
종친은 권력의 경쟁자였다. 동시에 권력을 내려놓아야 할 자리였다. 김종서가 세종 10년 1월 16일 양녕을 비판한 내용은 이를 잘 보여준다. ‘선대를 계승한 임금은 아버지의 형제와 자신의 형제를 신하로 삼는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는 조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돼 죽임을 당한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 이유를 기리는 금성대군 신단(錦城大君 神壇)이 있다. 금성단(錦城壇)이라고도 부른다. 그와 뜻을 함께한 순흥부사 이보흠과 유림들도 추모하는 곳이다. 김홍준 기자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는 조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돼 죽임을 당한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 이유를 기리는 금성대군 신단(錦城大君 神壇)이 있다. 금성단(錦城壇)이라고도 부른다. 그와 뜻을 함께한 순흥부사 이보흠과 유림들도 추모하는 곳이다. 김홍준 기자

경북 영주시 순흥면의 순흥향교. 1457년(세조3)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순흥도호부와 함께 폐지됐다가 1683년(숙종9)에 복원됐다. 김홍준 기자

경북 영주시 순흥면의 순흥향교. 1457년(세조3)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순흥도호부와 함께 폐지됐다가 1683년(숙종9)에 복원됐다. 김홍준 기자

수양은 사람들이 따른 안평과 금성을 늘 경계했다. 유동완 작가는 『단종의 비애, 세종의 눈물』에서 “안평은 사대부들이 좋아할만한 시·서·화에 능했고, 금성은 베풀어주길 좋아해 사람들이 따랐다”며 “안평은 정치세력화 의지가 없었고, 금성은 역모를 꾀할 위인이 못 됐다”고 적었다.   
 
하지만, 실권을 장악한 수양의 레이더망이 풀가동됐다. 걸렸다. 영의정 수양과 도승지 신숙주 등이 단종에게 고한다. “화의군(세종과 영빈 강씨 사이의 아들로, 단종 측)과 최영손·김옥겸 등이 금성대군의 집에서 사연(射宴, 활 쏘면서 벌이는 잔치)을 벌이는 걸 숨겼습니다(1455년, 단종 3년 2월 27일).” 그러면서 유배를 보내고 고신(告身·직책)을 거두길 청한다. 
 
이렇게 금성에 대한 견제는 쉼 없었다. 버티던 단종은 숙부 금성을 유배 보낸다. 금성대군은 삭녕(연천·철원), 경기도 광주를 거쳐 경북 영주 순흥으로 갔다. 혜빈 양씨와 그의 아들들도 귀양간다. 이후 이들은 차례로 죽음을 맞이한다. 이날 왕위가 수양에게 넘겨진다(1455년, 세조 1년 6월 11일). 
 
앞서 밝힌 대로,  금성대군에게는 역모죄가 씌워진다.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일으켰다는 게다. 이미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에 의한 한성에서의 단종복위운동은 발각돼 피를 불렀다. 그러나 실록(세조 3년 10월 15일)에서도 ‘오합지중’이라 썼듯, 순흥부의 그들이 새 왕을 갈아치울 병력이나 지략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순흥에도 피바람이 불었다. 세조는 순흥부를 찢어 근처 군현에 욱여넣었다. 1457년, 정축지변(丁丑之變)이었다.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조선 시대 동헌인 관풍헌은 단종이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근처 청령포에서 유배 중이던 단종은 홍수를 피해 이곳에 머물렀고 금부보다 왕병연이 사약을 갖고 내려왔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조선 시대 동헌인 관풍헌은 단종이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근처 청령포에서 유배 중이던 단종은 홍수를 피해 이곳에 머물렀고 금부보다 왕병연이 사약을 갖고 내려왔다. 김홍준 기자

# “가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 물 위에…”

단종은 같은 해 청령포로 유배 간다. 왕에서 상왕(上王, 생존 중 물러난 임금)으로, 그리고 추락해 노산군이 된 채. 단종이 생을 마감한 곳은 청령포가 아니다. 근처의 관풍헌(觀風軒)이다. 홍수를 피해 거처를 옮겼다. 이때 금부도사가 사약을 갖고 내려왔다. 위의 세조실록 내용과 다른 기록들이 전해진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 하였다. 통인(通引, 관아의 잔심부름꾼) 하나가…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통인이 미처 문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연려실기술).’
 
단종이 유배된 강원도 영월군의 청령포(淸冷浦). 남한강 상류의 서강이 휘돌아 삼면이 물이고, 한쪽으로는 육륙봉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다. 김홍준 기자

단종이 유배된 강원도 영월군의 청령포(淸冷浦). 남한강 상류의 서강이 휘돌아 삼면이 물이고, 한쪽으로는 육륙봉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다. 김홍준 기자

이 내용은 숙종실록(숙종 25년 1월 2일)이나 『영월군지』에서도 흡사하게 나온다. 문헌설화는 이처럼 단종의 타살에 방점을 둔다. 구비설화는 다르다. 한국구비문학회는 『단종 죽음 관련 설화에 담긴 전승의식 연구(이승민)』를 통해 구비설화는 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음’에 방점을 찍고 있다고 한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신하가 차마 사약을 바칠 수 없어 청령포 앞 물에 던지고, 그 물에 몸을 던졌다. 단종이 이러다 신하가 다 죽을 것 같다며 자신이 죽어야겠다고 생각해 목에 올가미를 걸고 부엌데기에게 잡아당기라고 했다.’ 논문은 ‘타살 이야기에는 잔인한 권력에 대한 비판이, 자살 이야기에는 단종의 의연함에 대한 포용과 애도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분석했다.
단종이 유배된 강원도 영월군 남면의 청령포(淸冷浦)에는 그가 한양을 그리워 하며 쌓았다는 망향탑이 있다. 김홍준 기자

단종이 유배된 강원도 영월군 남면의 청령포(淸冷浦)에는 그가 한양을 그리워 하며 쌓았다는 망향탑이 있다. 김홍준 기자

영월에는 단종과 관련된 수많은 유적과 이야기가 남아있다. ‘옥체가 강물에 둥둥 떠서 빙빙 돌다가 다시 돌아오고는 했는데, 가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물 위에 떠 있었다(연려실기술).’ 영월 호장(戶長)이었던 엄홍도가 단종의 시신을 정중히 모셨고, 관직을 버리고 숨어 살았다고 한다. 노산군은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왕이 됐고 단종으로 부르게 됐다. 그가 묻힌 장릉(莊陵)도 이때 이름이 붙었다.    

 
단종이 머물던 청령포에 들어가기 위해선 배를 타야 한다. 그리 깊지 않은 물이지만, 단종에게는 헤어날 수 없는 깊이였다. 다시 바람이 분다. 단종이 머물던 청령포 어소(御所). 그로 분한 인형의 갓끈이, 소매가 움직인다. 읽고 있던 책이 펄럭 넘어간다. 단종은 아직 우리에게 살아있는 존재다. 
 
야사는 다시 단종의 죽음을 전한다.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연려실기술).’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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