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 바이러스 최초 발원지였던 우한 화난수산물시장. 지난 3일 철문으로 막힌 틈 사이로 문 닫은 가게들의 황량한 모습이 보인다. 박성훈 특파원
[코로나 팬데믹 1년 下]
유가족이 1년 만에 알린 우한 실상
‘우한 영웅’ 뒤엔 ‘3000 위안’의 죽음
폐 섬유화 나온 장모, 집에 되돌아갔고
확진 장인, 은행 비밀번호 주며 신변정리
#0 만남

지난 2~3일 우한에서 장인과 장모를 코로나19로 잃은 왕첸(가명)을 만나 7시간에 걸쳐 얘기를 들었다. 박성훈 특파원
#1 비극의 시작
“전염병이 돈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식구들 중 그 얘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부 발표도 없었고, 독감 같은 게 유행하는 정도라 생각했다. 리원량 의사 얘기도 돌았지만 다들 믿지 않았다. 유언비어로 처벌됐다고 정부가 밝혔으니까.”
![우한시 보건당국은 지난해 1월 18일 우한에서 ‘정체불명 폐렴환자가 17명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우한 위생건강위 홈페이지 캡처]](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3/09/58fbb26a-d1c5-4c87-950d-20fb160c6a88.jpg)
우한시 보건당국은 지난해 1월 18일 우한에서 ‘정체불명 폐렴환자가 17명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우한 위생건강위 홈페이지 캡처]
이틀 뒤, 장인이 집 근처 시장에 명절 음식을 사러 다녀왔다. 장인장모는 아들인 처남 내외, 손녀와 같이 살았다. 다음날 우한을 봉쇄한다는 소식이 타전됐다. 봉쇄 당일인 23일 아침, 처남에게서 급히 연락이 왔다. 장인이 기침을 하고 열이 난다고 했다. 불안한 아내가 계속 병원에 가보라고 했지만 장인은 감기약을 먹으면 된다고 했다. 지병인 고혈압이 있지만 평소 아픈 데 없이 늘 건강했다.
#2 굳어가는 폐

왕첸이 그린 장인 장모가 거주하던 아들(처남)의 집 구조. 오른쪽 위의 부모(父母)라고 쓰인 방에 서 장인 장모가 머물렀다. 기침과 발열이 시작된 뒤 장인과 장모는 방 안에서 격리를 시작했다. 박성훈 특파원
왕첸이 나섰다. 정부 사람에게 부탁을 했다. 그래도 닷새가 더 걸렸다. 1월 31일, 왕첸은 간신히 통행 허가를 얻어 자신의 차를 몰고 처가에서 노인을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우의를 입고 모자와 안경과 마스크, 장갑으로 무장을 했다. 겨울이었지만 차의 창문도 모두 열었다. 기침을 하면 감염될 수 있었다. 장인 장모의 얼굴은 수척했고 아무 말도 없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슬펐다. 도로에는 사람도 차도 없었다.
“접수하고 의사를 만났더니 핵산검사 진단 시약이 없다고 했다. 수량이 제한돼 정부가 통제하고 있으니 사흘 뒤 다시 오라는 말 뿐이었다. CT를 보여주며 입원시켜 달라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모친의 폐는 이미 CT상 섬유화가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였다.”
주민위원회가 병원에서 돌아온 장인 장모를 임시 격리시설로 옮기라고 했다. 그런데 격리시설 담당자는 두 노인의 기록지를 본 뒤 “도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기저질환이 있으면 사망률이 높으니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들(처남)이 듣고 전한 얘기다.
#3 참담한 임종
시신을 실어가는 차량이 온 건 이날 밤 10시, 사망 22시간여가 지난 뒤였다. 그 사이 장인은 방안에서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고 계셨으리라. 시신처리팀은 아들에게 방역복을 건넸다. 이 옷을 입고 어머니의 시신을 정돈해 보내드리라는 의미였다. 방역복을 입은 그는 어머니의 마지막 온기조차 느낄 수 없었다.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아들은 그렇게 어머니를 떠나 보냈다. 2월 3일.
이날 중국 국가위생건강위는 하루 사망자가 57명이 늘어 누적 사망자가 361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장모는 이 집계에 포함되지 않았다. 핵산 검사 결과가 없는 의심환자였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코로나19의 위험성을 폭로한 우한 중심병원 안과 의사 리원량이 지난해 2월 7일 사망했다. [웨이보 캡쳐]](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3/09/93415dd0-8ddb-4ae2-98c9-9d8b978d3795.jpg)
처음으로 코로나19의 위험성을 폭로한 우한 중심병원 안과 의사 리원량이 지난해 2월 7일 사망했다. [웨이보 캡쳐]
장인은 2월 8일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았고 13일 우한제3의원에 입원했다. 병원에 들어가기 전 처남에게 당신이 죽고 난 뒤 처리해야 할 일과 재산 목록, 은행 비밀번호까지 적어 남겼다. 홀로 병원에 실려 간 장인은 그로부터 나흘 뒤인 2월 17일 숨졌다. 병원 측은 사망 다음날 화장까지 마친 뒤에야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다. 이날 중국의 코로나19 확진자는 5만 1606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사망자는 2442명이었다.
#4 위로금 3000위안
![시진핑 주석이 지난해 3월 10일 코로나 사태 이후 처음으로 우한을 방문해 사실상 ‘전염병과의 전쟁 승리’를 선언했다. [CGTN 캡처]](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3/09/af599419-e59b-4cdf-8b6a-5b725f32632d.jpg)
시진핑 주석이 지난해 3월 10일 코로나 사태 이후 처음으로 우한을 방문해 사실상 ‘전염병과의 전쟁 승리’를 선언했다. [CGTN 캡처]
3월 21일, 주민위원회에서 연락이 왔다. 화장장에서 유골을 가져 가라고 했다. 24일이 차례라고 날짜도 정해줬다. 23일 묘지를 구한 뒤 24일 새벽 6시 우창 화장장에 도착했다. 중국에선 매장을 오전에 하는 관습이 있어 서둘렀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나와 있는 유족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5시간을 기다려 두 분의 유골을 받을 수 있었다. 이날 집 근처 묘지에 안장했다.

지난해 2월 3일과 17일 장모와 장인이 코로나19 감염으로 잇따라 숨졌다. 묘지에 안장한 건 한달 여 뒤였다. 묘비 사진 속의 노부부는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박성훈 특파원

우한 황릉묘원. 우한이 봉쇄됐던 지난해 1~4월 사이 사망한 시민들이 상당수 안장됐다. 우한=박성훈 특파원
지난달 춘절, 처가 가족이 다시 모였다. 돌아가신 부모님에 제를 올렸다. 아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해마다 하던 마작은 하지 않았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사람들이 옆에서 죽어가는 걸 보면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저 역시도 돕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5 지금, 우한

지난 2일 우한 공항에 설치된 '영웅도시 우한' 전시시설. 오른편에 “우한시민들은 영웅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시진핑 주석의 발언이 새겨져 있다. 박성훈 특파원

지금 우한은 코로나19가 언제 있었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왔다. 3일 우한의 역사를 기념한 강한관(江漢關) 박물관 앞. 예비 신혼부부들의 웨딩 촬영이 한창이다. 박성훈 특파원

3일 화난수산물 시장은 높이 2m가 넘는 펜스로 외부의 접근을 막았다. 박성훈 특파원

임시 환자 수용 시설이던 우한의 레이션산(雷神山) 병원은 이용이 되지 않고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박성훈 특파원
지금 우한은 코로나 극복을 칭송하고 있지만 고통받고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위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리원량 의사가 사망한 우한중심병원에 그의 흔적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 병원에서만 의사 4명이 코로나19로 숨졌다. 하지만 병원은 마치 1년 전 무슨 일이 있었냐고 말하는 듯 했다.
우한 거리에 벚꽃이 하나둘 피기 시작했다. 코로나19라는 못은 뺐지만 못에 파여나간 살점은 결코 되살아나지 않고 있었다.
우한=박성훈 특파원 park.seonghun@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