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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 굳어가던 장모, 검사도 못받고 떠났다···中공산당원의 눈물

코로나19 바이러스 최초 발원지였던 우한 화난수산물시장. 지난 3일 철문으로 막힌 틈 사이로 문 닫은 가게들의 황량한 모습이 보인다. 박성훈 특파원

코로나19 바이러스 최초 발원지였던 우한 화난수산물시장. 지난 3일 철문으로 막힌 틈 사이로 문 닫은 가게들의 황량한 모습이 보인다. 박성훈 특파원

우리는 가끔 과거로 돌아가면 그러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한다. 현실이 고통스러울수록 후회도 커진다. 가족을 잃은 경우라면 더 그렇다. 전화부터 만남까지 7차례. 그가 공개한 지난 1년의 삶은 코로나19 발원지 중국 우한(武漢)의 ‘자화상’이었다. 그의 이름은 왕첸(53·가명). 우한에서 나고 자랐고 지난해 2월 장인과 장모를 코로나로 잃었다. 
 

[코로나 팬데믹 1년 下]
유가족이 1년 만에 알린 우한 실상
‘우한 영웅’ 뒤엔 ‘3000 위안’의 죽음
폐 섬유화 나온 장모, 집에 되돌아갔고
확진 장인, 은행 비밀번호 주며 신변정리

#0 만남

정부 감시가 심한 중국에서 희생자 유가족을 찾아 인터뷰하기는 쉽지 않았다. 지인의 지인까지 동원해 여러 유가족을 접촉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는 우한에서 만남이라도 허락해 준 마지막 사람이었다. 지난 2일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을 때 그는 무엇을 쓰려고 하는지 물었다. 직접 겪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다. 그는 공산당원이다. 가명을 전제로 응하기로 했다. 7시간에 걸쳐 얘기를 들었다. 경계를 풀고 나니 그는 마음 속에 아픔을 숨긴, 우리와똑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우한 시민들이 겪은 고통과 좌절이 얼마나 컸는지 그를 통해 비로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지난 2~3일 우한에서 장인과 장모를 코로나19로 잃은 왕첸(가명)을 만나 7시간에 걸쳐 얘기를 들었다. 박성훈 특파원

지난 2~3일 우한에서 장인과 장모를 코로나19로 잃은 왕첸(가명)을 만나 7시간에 걸쳐 얘기를 들었다. 박성훈 특파원

 

#1 비극의 시작

지난해 1월 19일, 춘절을 닷새 앞두고 11명의 처가 식구가 왕첸의 집에 모였다. 1년에 한 번 있는 가족 행사였다. 식사를 하고 늘 그랬듯 마작도 했다.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을 하다 정년 퇴임한 장인(74)은 마작을 즐겼다. 마스크를 낀 사람은 없었다. 

 
“전염병이 돈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식구들 중 그 얘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부 발표도 없었고, 독감 같은 게 유행하는 정도라 생각했다. 리원량 의사 얘기도 돌았지만 다들 믿지 않았다. 유언비어로 처벌됐다고 정부가 밝혔으니까.”
 
우한시 보건당국은 지난해 1월 18일 우한에서 ‘정체불명 폐렴환자가 17명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우한 위생건강위 홈페이지 캡처]

우한시 보건당국은 지난해 1월 18일 우한에서 ‘정체불명 폐렴환자가 17명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우한 위생건강위 홈페이지 캡처]

전날 우한시 보건당국은 ‘정체불명 폐렴환자가 17명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리강 우한질병통제센터 이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전파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했다. 반면 영국 런던의 MRC 글로벌질병분석센터는 우한 폐렴 환자가 중국 당국의 발표보다 훨씬 많은 수천 명에 이를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틀 뒤, 장인이 집 근처 시장에 명절 음식을 사러 다녀왔다. 장인장모는 아들인 처남 내외, 손녀와 같이 살았다. 다음날 우한을 봉쇄한다는 소식이 타전됐다. 봉쇄 당일인 23일 아침, 처남에게서 급히 연락이 왔다. 장인이 기침을 하고 열이 난다고 했다. 불안한 아내가 계속 병원에 가보라고 했지만 장인은 감기약을 먹으면 된다고 했다. 지병인 고혈압이 있지만 평소 아픈 데 없이 늘 건강했다.  
 

#2 굳어가는 폐

왕첸이 그린 장인 장모가 거주하던 아들(처남)의 집 구조. 오른쪽 위의 부모(父母)라고 쓰인 방에 서 장인 장모가 머물렀다. 기침과 발열이 시작된 뒤 장인과 장모는 방 안에서 격리를 시작했다. 박성훈 특파원

왕첸이 그린 장인 장모가 거주하던 아들(처남)의 집 구조. 오른쪽 위의 부모(父母)라고 쓰인 방에 서 장인 장모가 머물렀다. 기침과 발열이 시작된 뒤 장인과 장모는 방 안에서 격리를 시작했다. 박성훈 특파원

열이 하루하루 올랐다. 식구들 전부 집안에서 마스크를 끼기 시작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방에 따로 모셨다. 이틀 뒤(25일) 장모(71)도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는 연락이 왔다. 장모는 당뇨병이 있었다.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봉쇄 후 교통편이 모두 끊겼고 주민위원회에 신청을 해 이동 차량이 배정돼야 병원에 갈 수 있었다. 26일, 처음 병원에 도착했다. 의사는 흉부CT 결과를 보고 “폐 일부에 섬유화 현상이 보인다”고 했다. 전형적인 코로나19 중증 확진자의 증상이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의심환자로 분류한 뒤 “큰 병원에 가서 핵산 검사(코로나19 검사)를 받아 보라”며 집으로 돌려 보냈다. 아들은 부모를 모시고 집까지 걸어 돌아왔다. 차량이 없었다. 입원 치료를 받기 위해 핵산 검사부터 받아야 했다.  
 
왕첸이 나섰다. 정부 사람에게 부탁을 했다. 그래도 닷새가 더 걸렸다. 1월 31일, 왕첸은 간신히 통행 허가를 얻어 자신의 차를 몰고 처가에서 노인을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우의를 입고 모자와 안경과 마스크, 장갑으로 무장을 했다. 겨울이었지만 차의 창문도 모두 열었다. 기침을 하면 감염될 수 있었다. 장인 장모의 얼굴은 수척했고 아무 말도 없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슬펐다. 도로에는 사람도 차도 없었다.  
 
“접수하고 의사를 만났더니 핵산검사 진단 시약이 없다고 했다. 수량이 제한돼 정부가 통제하고 있으니 사흘 뒤 다시 오라는 말 뿐이었다. CT를 보여주며 입원시켜 달라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모친의 폐는 이미 CT상 섬유화가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였다.”
 
주민위원회가 병원에서 돌아온 장인 장모를 임시 격리시설로 옮기라고 했다. 그런데 격리시설 담당자는 두 노인의 기록지를 본 뒤 “도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기저질환이 있으면 사망률이 높으니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들(처남)이 듣고 전한 얘기다.  
 

#3 참담한 임종

장인 장모는 집으로 돌아온 뒤 이때부터 다시 같은 방을 쓰기 시작했다. 핵산검사를 받기로 한 2월 3일 새벽 1시, 휴대폰이 울렸다. 처남이었다. “어머니가…” 다른 말은 없었다. 울음소리만 들렸다. 왕첸도 처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내는 밤새 울었다. 나중에 들었다. 장인은 저녁부터 누워 있던 장모가 인기척이 없어 흔들어 보고는 호흡이 멎은 걸 알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아버지는, 옆옆방에 있는 아들에게 휴대전화로 전했다고 했다.  
 
시신을 실어가는 차량이 온 건 이날 밤 10시, 사망 22시간여가 지난 뒤였다. 그 사이 장인은 방안에서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고 계셨으리라. 시신처리팀은 아들에게 방역복을 건넸다. 이 옷을 입고 어머니의 시신을 정돈해 보내드리라는 의미였다. 방역복을 입은 그는 어머니의 마지막 온기조차 느낄 수 없었다.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아들은 그렇게 어머니를 떠나 보냈다. 2월 3일.  
 
이날 중국 국가위생건강위는 하루 사망자가 57명이 늘어 누적 사망자가 361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장모는 이 집계에 포함되지 않았다. 핵산 검사 결과가 없는 의심환자였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코로나19의 위험성을 폭로한 우한 중심병원 안과 의사 리원량이 지난해 2월 7일 사망했다. [웨이보 캡쳐]

처음으로 코로나19의 위험성을 폭로한 우한 중심병원 안과 의사 리원량이 지난해 2월 7일 사망했다. [웨이보 캡쳐]

 
장인은 2월 8일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았고 13일 우한제3의원에 입원했다. 병원에 들어가기 전 처남에게 당신이 죽고 난 뒤 처리해야 할 일과 재산 목록, 은행 비밀번호까지 적어 남겼다. 홀로 병원에 실려 간 장인은 그로부터 나흘 뒤인 2월 17일 숨졌다. 병원 측은 사망 다음날 화장까지 마친 뒤에야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다. 이날 중국의 코로나19 확진자는 5만 1606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사망자는 2442명이었다.  
 

#4 위로금 3000위안

시진핑 주석이 지난해 3월 10일 코로나 사태 이후 처음으로 우한을 방문해 사실상 ‘전염병과의 전쟁 승리’를 선언했다. [CGTN 캡처]

시진핑 주석이 지난해 3월 10일 코로나 사태 이후 처음으로 우한을 방문해 사실상 ‘전염병과의 전쟁 승리’를 선언했다. [CGTN 캡처]

 
3월 21일, 주민위원회에서 연락이 왔다. 화장장에서 유골을 가져 가라고 했다. 24일이 차례라고 날짜도 정해줬다. 23일 묘지를 구한 뒤 24일 새벽 6시 우창 화장장에 도착했다. 중국에선 매장을 오전에 하는 관습이 있어 서둘렀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나와 있는 유족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5시간을 기다려 두 분의 유골을 받을 수 있었다. 이날 집 근처 묘지에 안장했다.

 
지난해 2월 3일과 17일 장모와 장인이 코로나19 감염으로 잇따라 숨졌다. 묘지에 안장한 건 한달 여 뒤였다. 묘비 사진 속의 노부부는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박성훈 특파원

지난해 2월 3일과 17일 장모와 장인이 코로나19 감염으로 잇따라 숨졌다. 묘지에 안장한 건 한달 여 뒤였다. 묘비 사진 속의 노부부는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박성훈 특파원

본지는 유족 동의 하에 묘지를 직접 찾아갔다. 사진 속 두 분은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평범하고 다복했던 노부부였다. 주변 묘지엔 1~4월 우한 봉쇄 기간 중 사망한 묘비가 수두룩했다. 우한 봉쇄 해제 6개월 뒤인 지난해 10월, 중국 정부는 사망자 1명당 3000 위안(51만원)의 위로금을 지급했다. 장모는 포함되지 않았다.
 

우한 황릉묘원. 우한이 봉쇄됐던 지난해 1~4월 사이 사망한 시민들이 상당수 안장됐다. 우한=박성훈 특파원

우한 황릉묘원. 우한이 봉쇄됐던 지난해 1~4월 사이 사망한 시민들이 상당수 안장됐다. 우한=박성훈 특파원

“정부가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좀 더 빨리 알렸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많은 사람이 감염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달 춘절, 처가 가족이 다시 모였다. 돌아가신 부모님에 제를 올렸다. 아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해마다 하던 마작은 하지 않았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사람들이 옆에서 죽어가는 걸 보면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저 역시도 돕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5 지금, 우한

지난 2일 우한 공항에 설치된 '영웅도시 우한' 전시시설. 오른편에 “우한시민들은 영웅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시진핑 주석의 발언이 새겨져 있다. 박성훈 특파원

지난 2일 우한 공항에 설치된 '영웅도시 우한' 전시시설. 오른편에 “우한시민들은 영웅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시진핑 주석의 발언이 새겨져 있다. 박성훈 특파원

우한에 도착한 지난 2일,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공항에 설치된 ‘인민영웅 도시 우한’이란 전시 시설이었다. “우한 시민들은 영웅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시진핑 주석의 발언이 전면에 걸렸다. 코로나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선전물이다.
 
지금 우한은 코로나19가 언제 있었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왔다. 3일 우한의 역사를 기념한 강한관(江漢關) 박물관 앞. 예비 신혼부부들의 웨딩 촬영이 한창이다. 박성훈 특파원

지금 우한은 코로나19가 언제 있었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왔다. 3일 우한의 역사를 기념한 강한관(江漢關) 박물관 앞. 예비 신혼부부들의 웨딩 촬영이 한창이다. 박성훈 특파원

우한 시내는 활력을 되찾고 있었다. 시내 중심가에선 결혼을 앞둔 커플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웨딩 촬영을 진행했다. 오후가 되자 쇼핑센터는 사람들로 붐볐다. 거리에서 만난 한 직장인 커플은 “우한이 이제 중국에서 제일 안전한 도시인 것 같다”며 웃었다.
 
3일 화난수산물 시장은 높이 2m가 넘는 펜스로 외부의 접근을 막았다. 박성훈 특파원

3일 화난수산물 시장은 높이 2m가 넘는 펜스로 외부의 접근을 막았다. 박성훈 특파원

임시 환자 수용 시설이던 우한의 레이션산(雷神山) 병원은 이용이 되지 않고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박성훈 특파원

임시 환자 수용 시설이던 우한의 레이션산(雷神山) 병원은 이용이 되지 않고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박성훈 특파원

하지만 코로나의 상처는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처음으로 퍼져나간 화난 수산물 시장은 을씨년스러웠다. 높이 2m가 넘는 펜스가 접근을 차단했다. 임시 환자 수용 시설이던 레이션산 병원은 벽면이 녹슬어 흉물스럽게 변해가고 있었다. 주변엔 ‘위험, 접근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취재진이 접근하자 경비원이 가라고 소리쳤다.  
 
지금 우한은 코로나 극복을 칭송하고 있지만 고통받고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위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리원량 의사가 사망한 우한중심병원에 그의 흔적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 병원에서만 의사 4명이 코로나19로 숨졌다. 하지만 병원은 마치 1년 전 무슨 일이 있었냐고 말하는 듯 했다.  
 
우한 거리에 벚꽃이 하나둘 피기 시작했다. 코로나19라는 못은 뺐지만 못에 파여나간 살점은 결코 되살아나지 않고 있었다.
 
우한=박성훈 특파원 park.seongh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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