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2〉 ‘쎄시봉’과 첫 인연
![1960~1970년대 음악다방 쎄시봉은 청바지·통기타로 상징되는 청년 문화의 상징 같은 곳이었다. 숱한 스타가 이곳을 거쳐 갔다. 왼쪽부터 윤형주·김세환·조영남(앉은 이)·송창식·조동진·이장희씨. 1986년 미국 LA 슈라인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쎄시봉 공연 당시 모습. [사진 조영남]](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3/08/fa570867-c2b6-41f1-b2b7-51108bc7851a.jpg)
1960~1970년대 음악다방 쎄시봉은 청바지·통기타로 상징되는 청년 문화의 상징 같은 곳이었다. 숱한 스타가 이곳을 거쳐 갔다. 왼쪽부터 윤형주·김세환·조영남(앉은 이)·송창식·조동진·이장희씨. 1986년 미국 LA 슈라인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쎄시봉 공연 당시 모습. [사진 조영남]
고교 콩쿠르 1등, 성악도로 촉망
오페라, 돈 안되고 재미없다 판단
대학·교회에 반감 탓 쎄시봉 발길
이북 사투리 주인, 데뷔 당일 OK
입장권 안 내고 프리패스 멤버로
송창식·윤형주·이장희 등 뒤따라
친구 아버지 다방서 팝음악 심취
글쎄, 쎄시봉엘 내가 왜 갔을까. 추측은 몇 가지 남는다.
첫째 추측은 그때 다니던 대학과 교회에 대한 노골적인 반발이다. 나는 실제로 두 곳의 대학을 찔끔찔끔 다녔다. 한양음대 주최의 고교음악 콩쿠르에서 1등을 하는 바람에 당시 김연준 총장님으로부터 전액 장학생으로 스카우트되어 들어갔던 것이고, 잘 다니다가 2학년 초 1년 아래 못 말리게 예쁜 여학생과의 뜨거운 염문으로(당시 그 여학생은 약혼자가 있었다) 급기야는 자진 퇴학을 결정하고 벼락치기로 공부를 다시 해 서울음대에 들어갔던 터였다.
![용문고 시절 트럼펫을 부는 조영남. [사진 조영남]](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3/08/3afb4dec-1f6c-4574-9474-974cb4f5c6a7.jpg)
용문고 시절 트럼펫을 부는 조영남. [사진 조영남]
학교에 대한 불만도 컸지만 교회에 대한 불만도 컸다. 나는 소위 모태신앙의 표본으로서 교회는 그냥 무조건 다녀야 하는 곳으로 알고 그냥 줄창 다녔다. 나는 지금도 가수 지망생들에게 교회에 다닐 것을 적극 권장하곤 한다. 왜냐하면 나는 교회에서 음악의 기초를 잘 다졌기 때문이다. 성가를 잘 소화하는 것은 노래하는 사람에겐 결정적인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당시 나는 교회로부터 엑소더스(탈출)를 감행해야만 했다. 내 깐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다녔던 동대문 근처 동신교회에서 나는 같은 성가대원 출신의 이단열(성신여대 음대 교수가 됐다)과 트럼펫 이중주를 하게 됐었고, 같은 교회 성가대원이었던 경기여고를 다니는 여학생 동료에게 빌렸던 은빛 나는 보면대(악보를 펼치는 대) 두 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비가 많이 오는 날 보면대를 들고 탔던 버스에서 나는 트럼펫만 달랑 들고 내렸다. 믿거나 말거나 용문고교 밴드부 시절 나는 트럼펫 주자였다. 얼마 안 있어 교회에선 “조영남이 보면대 두 대를 팔아먹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나는 그 일로 교회를 뛰쳐나오며 “교회는 여기서 끝이다”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이런 교회에 대한 불만의 표출로 교회 대신 쎄시봉을 택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한가지 추측이 더 남는다.
서울음대 연극반에서 미국 극작가 손톤 와일더의 그 유명한 연극 ‘아워 타운’, 즉 ‘우리 읍네’라는 제목의 연극을 하면서 눈이 맞은 키가 훌쩍 큰 최시현과의 사랑의 도피처로 말로만 듣던 쎄시봉을 갔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 너저분한 세 가지 추측 중에 어느 게 맞는 건지는 나도 모른다.
쎄시봉은 종로 무교동 근처 공안과 병원 뒤편 골목에 있던 카바레 코파카바나와 스타더스트 사이 골목에 움푹 들어가 있던 평범한 음악감상실이었다.
쎄시봉은 프랑스어로, 영어로 치자면 ‘It’s so good’ 정도 되는 ‘괜찮아! 멋져’쯤 되는 의미다. 바로 이 쎄시봉이 그때 막 일기 시작한 소위 청년 문화의 산실이었다. 특히 청바지 세대의 선두주자였던 최인호(2013년 세상을 떠났다)가 머물렀던 장소다.
피아노 치며 부르자 열광적 찬사
![쎄시봉 입구. [사진 한국대중가요연구소]](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3/08/e61373d3-c116-4212-994b-1ad3b0b1d80b.jpg)
쎄시봉 입구. [사진 한국대중가요연구소]
며칠을 다니다 보면 문지기 용출이의 경상도 사투리 섞인 중얼대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용출이는 정말 용출이처럼 생겼다. 마치 노영심이가 영심이처럼 생겼듯이 말이다.
“(경상도 사투리)아! 이거 상규 히야(형)가 새로 산 내 웃저고리를 갖다가 무교 여관에 팔아뿌렸다 아이가!”
그리고 또 한 가지, 소를 훔쳐서 파는(소도둑) 사람처럼 생기신 덩치 큰 쎄시봉 주인아저씨의 맨날 똑같은 레퍼토리. 이번엔 지독한 이북 사투리다.
“(이북 사투리)야, 갸들! 덩말 찡땅거리는구나. 야! 거 볼륨 좀 줄이라우! 볼륨 좀!”
이 소리는 지금까지도 이상벽이 내는 흉내가 압권이다.
그럼 나는 어찌하여 이 전설적인 쎄시봉에 정식 멤버가 될 수 있었나? 이름 없는 아마추어가 대뜸 쎄시봉 대표가수로 올라선 것은 아마도 내 경우가 최초였을 것이다. 그다음 한대수, 송창식, 윤형주쯤으로 이어졌을 것이지만 말이다.
![쎄시봉의 신청곡 용지. [사진 한국대중가요연구소]](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3/08/ab853ce0-819b-4315-8038-345e6ddc42ef.jpg)
쎄시봉의 신청곡 용지. [사진 한국대중가요연구소]
그날 즉시 주인아저씨가 “야! 나오라우! 밥 먹으러 가자우!” 해서 나는 일약 정식 쎄시봉 멤버로 군림하게 된 거다. 주인아저씨의 “야! 나오라우!”가 입장권 안 내고 프리패스하는 특별 멤버가 되는 ‘싸인’이었다.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한대수 등이 그런 식으로 “야! 나오라우”의 멤버가 됐을 것이다. 어느 날 주인아저씨가 사주셨던 골목집 비지찌개에서 나는 모처럼 왕건이를 발견해 얼른 입에 넣어 씹었는데 헐! 그건 고기가 아니라 된장 뭉치였던 것이다. 그 기억만은 또렷이 남아 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