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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예타’ 살해 사건의 전말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내 이름은 예비타당성 조사, 줄여서 ‘예타’야. 왜 사람 흉내냐고? 내 탓이 아냐. 필자 탓이지. 가끔 필자가 사람도 아닌 것을 사람처럼 꾸밀 때는 다 이유가 있어. 대놓고 자기 입으로 말하기엔 겁나거나, 껄끄럽거나, 재미없거나 중 하나야. 아무래도 내 경우엔 셋 다인 것 같아.
 

“삽질 안 하겠다”고 큰소리치더니
떼 쓰면 통하는 나라 만들어 놓은
파렴치 가덕도 정치꾼 죄 물어야

나는 1999년 3월생이야.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들 기억하지? 외환위기 직후야. 공적자금을 많이 쓴다고 국민 걱정이 컸어. 게다가 95년 본격 시작된 지방자치제로 전국에 우후죽순, 삽질 광풍이 불었지. 지자체 공사라도 일단 시작되면 나랏돈이 끌려들어 가게 돼 있어. 내가 없던 시절엔 ‘타당성 조사’ 혼자 북 치고 장구 쳤어. 94~98년 33건의 타당성 조사 사업 중 울릉공항 1건을 제외한 32건이 ‘타당성 있음’으로 결론 났어. 말이 돼? 정부 스스로 자기반성을 했어.
 
이래선 안 된다, 허투루 나랏돈을 쓰지 않게 하자. 나라 살림을 맡은 기획예산처가 총대를 멨어. 그래서 나온 게 ‘공공건설사업 효율화 종합대책’이야. 주요 낭비 사례로 경부고속철도를 꼽았어. 6조원이면 된다더니 결국 20조원을 쏟아부어야 했지. 그런 낭비를 다시는 하지 말자. 대책의 핵심은 ‘500억원이 넘는 사업엔 먼저 예비타당성 조사를 거쳐야 한다’야. “나라 살림을 지켜야 한다”는 우국충정이 나를 만들어낸 거지.
 
성적은 괜찮았어. 나를 담당하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그때부터 2019년까지 20년간 내가 약 144조원을 절감했다고 추산했어.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열 번은 줄 어마어마한 돈이야. 내가 아니었으면 다 삽질로 날렸을 돈이지. 덕분에 칭찬도 많이 받았어.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순조롭기만 하겠어.
 
모두 알다시피 문제는 정치였어. 정치인들이 나를 흔들어댔지. ‘예타가 경제성만 주로 따지다 보니 잘사는 수도권이나 영남권만 주로 편든다’ ‘전라도를 소외시킨다’며 지역 정서에 불을 붙였어. 결국 2001년부터 지역 균형발전 항목이 추가됐어. 처음엔 15~25%였는데 나중엔 25~35%로 확대됐지. 그래도 성에 안 찼는지 나를 아예 배제하는 규정을 만들기도 했어.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사업 같은 거야.
 
한번 덧씌워진 프레임 정치는 덫과 같더군.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 꽁꽁 조였어. 나는 어느새 지역차별의 주범이 됐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할 때는 내심 기대가 컸어. 문 대통령은 토건 경제에 무척 비판적이었어. “경제가 어렵다고 토건(삽질) 하지 않겠다”고도 했지. 망가졌던 내 삶에도 다시 볕이 뜨겠구나, 그런데 웬걸 기대하지 않느니 못했어.
 
2021년 2월 26일. 스무두 살의 나는 공식적으로 사망했어. 정확히는 살해당했지.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이 나의 살해 도구요, 여야 정치꾼들이 범인이야. 사실 나는 진작 운명을 예감했어. 2년 전 24조원의 예타 면제 사업을 문 대통령이 발표했을 때,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어. 대통령은 총선을 앞두고 각 시도에 한 건씩 숙원사업을 해결해 준 거야. 당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그 고약함을 몇 가지로 정리했는데 첫째, 나랏돈 쓰는데 검증이 필요 없어졌다. 둘째, 떼를 쓰면 통하는 나라가 됐다. 지역 숙원사업이기만 하면 어떤 대형 SOC 사업도 예타 면제를 해줄 수밖에 없게 됐다. 셋째, 나랏돈을 함부로 쓰고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나라가 됐다. 경실련은 그러면서 “4대강보다 고약하다”고 했어. 내 생각도 같아.
 
이제 역사에서 사라지는 신세가 됐지만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할게. 유언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줘. 어느 서양인의 책에서 빌려온 말이야. “의지가 약한 국민은 장래를 현실화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지금 말도 안 되는 돈을 펑펑 쓴 대가를 내 아들딸이 지게 될 텐데, 망하는 나라 국민은 그런 미래에 대해 질끈 눈을 감는다는 뜻이야. 나의 죽음이 그렇게 꼭 감은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신호가 됐으면 좋겠어. 시작은 이번 선거야.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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