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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권력자가 꾸는 꿈이란?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

김영민의 생각의공화국 그래픽=신용호

김영민의 생각의공화국 그래픽=신용호

사회과학 용어 중에 소프트 파워(soft power)와 하드 파워(hard power)라는 것이 있다. 따지고 들자면 꽤 복잡한 뜻과 용례를 가진 개념이지만, 거칠게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하드 파워는 강제적인 수단을 통해 상대에게 영향을 끼치는 역량이고, 소프트 파워는 비강제적인 수단을 통해 상대에게 영향을 끼치는 역량이다.
 

정치는 파워를 지향하고
파워는 소프트 파워를 지향하고
소프트 파워는 ‘생각 없음’을 지향
결국 정치적 정당화는 추종자의 몫

아직 서로 간의 우위가 정해지지 않았을 때, 혹은 딱히 공존을 위한 질서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을 때, 사람들은 종종 하드 파워에 의존한다. 즉, 싸움박질을 해대는 것이다. 특히 생존을 위한 재화가 한정되어 있을 때, 혹은 상대가 자신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고 판단될 때, 사람들은 기꺼이 전쟁에 돌입한다. 다시 말해 배는 고프고 빵은 한 덩어리에 불과할 때, 사람들은 그 빵을 차지하기 위해 총칼을 들곤 한다.
 
19세기 중반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갱스 오브 뉴욕’은 토착 갱들과 아일랜드 갱들 간에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헤게모니 싸움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요즘 뉴욕 거리에서는 보기 힘들 도끼질과 칼질이 당시에는 난무했다. 이게 어디 뉴욕만의 일이었겠는가. 20세기 전반 종로의 패권을 두고 벌어졌다는 김두한 대 구마적의 한판 대결을 생각해보라. 그 전설의 싸움은 한국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여서 한 번쯤 그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드물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이 하드 파워의 격돌을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가 간의 전쟁이든, 개인 간의 싸움이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이는 대개 자신의 최고 역량을 뽑아내려 들기 때문이다. 작년 한 해 동안만 일본에서 8000만권이 팔린 만화 ‘귀멸의 칼날’에서 무사들은 자신을 향상시키고자 강적과 목숨을 건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죽음의 문턱을 슬쩍 엿본 생물은 더욱 강해진다.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 평소에는 쓰지 않았던 감각과 힘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싸움의 전리품은 승자의 것이다. 싸움에서 이긴 이들은 권좌에 오르고 영광된 순간을 기록한다. 패배한 자는 오욕의 기억과 함께 사라진다. 종로의 싸움에서 승리한 김두한은 권좌에 오르지만, 패배한 구마적은 쓸쓸히 종로 거리를 떠난다. 승자라고 해서 마냥 싸움질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싸움질은 피곤하고 힘들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절세의 주먹 김두한인들 날이면 날마다 싸우고 싶겠는가. 평생 매일 결투를 벌여야 한다면 피곤해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어렵게 쟁취한 권력을 누려볼 여가조차 없을 것이다. 매일 싸우다가 자칫 지기라도 하면 어쩌란 말인가. 어렵사리 이겼을 때 그 여세를 몰아 자신의 승리를 공고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하면 매일 싸우지 않고도 자신의 승리를 공고히 할 수 있을까. 싸움박질에 걸어야 하는 목숨, 자유, 권리 같은 것들은 다 가격이 비싼 것들이다. 경제적 동물로서 인간은 비용과 편익의 면에서 에너지 사용의 최적화를 추구한다. 어떻게 하면 적은 비용과 에너지로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아마 그래서 김두한은 자신이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유난히 널리 알리고 다녔는지 모른다. 사람들이 존경하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점은 김두한에게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광휘를 선사한다. 그 광휘로 인해 사람들이 알아서 복속해 준다면, 김두한은 구태여 매일 싸움을 하지 않아도 우두머리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리하여 김두한의 출생 배경은 이른바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데올로기는 총칼처럼 강제력을 가진 게 아니라 사람들의 흠모를 끌어내는 매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소프트 파워다. 이 소프트 파워가 없었다면 김두한은 한때의 주먹왕으로만 기억될 뿐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김두한의 소프트 파워로 인해 김두한과 싸워보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도 싸울 일이 없는 이들마저도 김두한의 위상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김두한의 우두머리 입지는 당연한 것이 된다.
 
소프트 파워로 자기 입지를 다졌다고 해서 그 입지가 영원한 것은 아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하드 파워의 강자가 소프트 파워에 의존한 결과, 기존의 약자는 새로운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 주먹질이라는 하드 파워로는 도저히 김두한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을 약자들도 이제 소프트 파워를 통해 역전극을 노려보는 것이다. 자기도 집에 돌아가 족보를 뒤져 김좌진 장군 못지 않은 그럴싸한 조상을 찾아내 보는 것이다. 운좋게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을 가르친 적이 있는 당숙이라도 찾아낸다면, 그만큼 그의 위상도 올라갈 수 있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회고하는 두목 김두한에게 자기 당숙 이야기를 꺼내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소프트 파워는 ‘약자의 무기’가 된다.
 
오늘날 멀쩡한 국가라면 정부가 폭력을 독점한다. 적어도 법제상으로는 돈이 많다고, 혹은 권세가 드높다고 사병(私兵)을 쓸 수는 없다. 정부가 물리적인 폭력을 독점하게끔 되어 있는 현대 국가에서, 사람들은 이제 너나 할 것 없이 어느 정도는 소프트 파워를 사용한다. 회식 자리에서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자기 마음대로 메뉴를 선택하는 시대는 지났다. 왜 하필 저 음식을 주문하는 것이 좋은지를 상대에게 납득시켜야 한다. ‘오늘 회식은 삼겹살로 통일한다’고 외치며 주먹을 휘두르면, 사람들은 회식 자리에서 박차고 떠나 버릴 것이다.
 
맛에 관해 권위를 획득하고 있는 사람, 저 사람이 시키는 음식은 늘 맛있더라는 명성을 축적해 온 이가 완력이 센 사람보다 식탁에서 영향력이 있다.
 
실제로 나는 음식 주문에 관한 한 놀라운 소프트 파워를 가진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다. 그는 자기 음식 주문을 알아서 할 뿐 아니라, 내 음식 주문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게 제철 음식인데, 이게 혈액순환에 좋은데, 이게 감칠맛이 있대.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덧 그가 먹고 싶은 것을 주문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먹어보아도 결과적으로 맛이 있으므로, 나도 그의 주문에 큰 불만을 갖지 않게 된다. 실로 그는 식탁의 지배자다.
 
음식 주문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그는 인플루언서다. 그가 식탁의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 요리 솜씨가 뛰어나다는 사실도 작용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의 주문 결과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는 기억이 큰 몫을 한다. 음식 주문에 관한 제반 사항을 그에게 외주를 주고 나면, 주문에 써야 할 내 에너지도 절약할 수 있다. 그뿐이랴. 시킨 음식이 맛이 없으면 그 사람 탓을 하면 된다. 현대인들은 남의 탓 중독자들 아닌가. 일이 잘못되었을 때 남탓을 못하게 하면 그만 돌아버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인플루언서는 그 소중한 남탓을 하게끔 해준다.
 
궁극의 인플루언서는 전문성이 있어서 인플루언서가 되는 게 아니라, 인플루언서이기 때문에 인플루언서가 된다. 이 단계가 되면, 그는 명함에 자신의 전문분야를 적는 대신에 그냥 인플루언서라고 적으면 된다. 그가 시킨 음식은 맛이 있기에 인플루언서가 되는 게 아니라, 그가 시킨 음식이기에 그 음식이 맛이 있게 느껴진다. 궁극의 달변가는 달변을 통해 그가 달변가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가 어눌하게 말하면, 진정한 달변이란 눌변을 포함하기 마련이라고 달변의 정의가 바뀌게 된다.
 
이래서 소프트 파워는 약자의 무기일 뿐 아니라 강자가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강자는 자신이 파워를 가지고 있기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파워로 여겨지기에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경지를 꿈꾼다. 그가 단순히 파워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가 파워의 동의어가 되고 나면, 그는 따질 거 없이 그저 동경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정치는 파워를 지향하고, 파워는 소프트 파워를 지향하고, 소프트 파워는 생각 없음을 지향한다. 진짜 소프트 파워는 먹음직스러운 소프트 아이스크림과 같다. 저걸 왜 먹어야 하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혹은 생각할 틈이 없다. 당신은 이미 먹고 있다! 다 먹고 나서 제정신이 돌아 오고 난 뒤에야, 자신이 왜 먹을 수밖에 없었는지 비로소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정당화는 소프트 아이스크림 제조업체의 몫이 아니라 소비자의 몫이다. 마치 궁극의 정치적 정당화가 권력자가 아니라 추종자의 몫인 것처럼.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정말 정신 건강에 좋아.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하면 되는 거야!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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