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장흥 해동사 앞에서 펄럭이는 태극기와 손바닥 탁본기. 약지가 짧은 손바닥 탁본 깃발에서 해동사가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사당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3월 2일 비밀결사 ‘단지회’를 조직하고 손가락을 잘라 이토 이로부미 암살을 맹세했다.
핏줄은 질기다

장흥 만수사는 죽산 안씨 가문의 사당이다. 안향 선생을 비롯한 조상과 성현을 배향하는 공간에서 안중근 의사를 모시는 별도 사당 해동사를 두고 추모했다.
1955년 죽산 안씨 가문의 유림 안홍천 선생이 안중근 의사 제사를 지내는 곳이 없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직계는 아니라도 뿌리는 같으니 안중근 의사를 모시자고 문중을 설득했고, 나라에도 알려야 할 것 같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간다. 죽산 안씨 유림의 뜻을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흔쾌히 친필 휘호를 써 준다. ‘해동명월(海東明月).’ 대한민국을 비추는 곳이라는 뜻이다(이승만 대통령과의 일화는 죽산 안씨 문중 기록에 전해온다). 해동사 현판에 이 글씨가 걸려 있다.

해동사 현판에 걸린 '해동명월'이란 글씨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휘호라고 한다. 문창살 아래 태극 문양이 이 사당이 순국선열을 모신 장소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멈춰 선 시계

해동사 제단에 놓인 안중근 의사 영정과 위패. 모두 유족이 직접 건넨 것이다. 위패 옆에 걸린 괘종시계가 9시 30분에 맞춰 서 있다.
해동사는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현충 시설이다. 하여 여느 사당과 분위기가 다르다. 해동사 앞에서 깃발 세 개가 펄럭인다. 태극기와 장흥군기 그리고 안중근 의사 손바닥 탁본기다. 약지가 짧은 예의 그 손바닥이다. 해동사 문창살 아래는 태극 문양이 장식하고, 해동사 안 제단은 안중근 의사 영정과 위패가 자리한다. 위패 오른쪽 벽에 걸린 낡은 괘종시계가 눈에 띈다. 바늘이 9시 30분에 멈춰 서 있다. 오전 9시 30분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시각이다(김미순(67) 장흥군 문화관광해설사).

해동사 전경. 맞배지붕을 얹은 세 칸짜리 건물이다.

드론으로 촬영한 만수사와 해동사 전경. 왼쪽 아래 건물이 해동사다.
불우한 가계

해동사 앞에 세운 안내판. 1955년 안중근 의사 유족이 영정과 위패를 안고 행렬하는 장면을 담았다.
안중근 의사는 부인 김아려(김마리아·1878∼1946) 여사와 2남 1녀를 두었다. 1910년 하얼빈 의거 이후 유족은 긴 세월 중국을 떠돌며 어려운 생활을 했다. 장남 분도(1905∼1911)씨는 일곱 살 나이에 중국에서 급사했다. 독이 든 과자를 먹고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중국에서 근근이 살던 차남 준생(1907∼1952)씨는 끝내 일제의 회유에 넘어갔다. 1939년 10월 17일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신사 ‘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히로쿠니와 함께 참배하고 아버지 죄의 용서를 빌었다. 이후 유족은 일제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했다. 장녀 현생(1902∼1959)씨도 막냇동생의 박문사 사죄를 지원했다고 알려진다. 준생씨가 1952년 부산에서 숨진 뒤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장흥 글·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