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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영의 시선] ‘내돈내뿌’는 차라리 양심적

이가영 논설위원

이가영 논설위원

2009년 하반기 미국 국무성의 초청을 받아 3주간 여러 지역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그 중엔 국무성이 ‘미국적인 도시’ 중 하나라 소개한 켄터키주 루이빌도 포함됐다. 당시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버락 오바마)이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미국인들은 한국이 오바마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했다. 자연스레 양국의 선거와 투표 문화를 주제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고무신, 버번…동서고금에 매표
‘청도’가 ‘탁도’된 돈봉투 참사도
‘세금 위로금’도 돈선거 비칠 만

그중에서도 ‘돈’에 상당히 엄격한 우리의 선거법(일명 ‘오세훈법’)에 미국인들은 관심을 보였다. ‘과태료 50배’ 조항에 따라 후보자에게 밥 한 끼 얻어먹은 농촌 부녀회원들이 100만원이 넘는 과태료 통지서를 받고 땅을 친 뉴스를 전하니 놀라워했다. 한국에선 과거 ‘고무신 선거’ ‘막걸리 선거’란 말이 있었다고 했더니 “켄터키주에도 그 비슷한 말이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버번 선거’였다. 버번 위스키로 유명한 켄터키주에서 후보자들이 유권자에게 버번 위스키를 대접하고 그 대가로 표를 받았단 얘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거사 한 귀퉁이엔 이렇듯 매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에게 청도 군수 선거는 뼈아픈 돈봉투의 기억이다. 청도의 ‘청’은 한자로 맑을 청(淸)이다. 예로부터 물길이 맑은 고장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러나 2005~2008년 4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군수 선거를 치르며 “청도가 탁도로 변했다”는 말이 나왔다. 맑은 동네가 아니라 흐린(흐릴 탁·濁) 동네가 됐단 얘기다.
 
그 선거중 압권이 2007년 군수 재선거다. 이 선거에서 당선된 정한태 후보는 유권자들에게 6억7000여만원을 뿌린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를 받은 선거 운동원 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읍·면 조직책 24명이 구속됐다. 금품을 받은 주민은 모두 5700명, 이중 1400여명이 무더기 입건됐다.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는 “당시 청도군 유권자가 3만8000명 가량으로 지지율이 비슷한 후보가 3명 나오고 투표율을 70%로 가정할 때 1만표면 당선 가능했다”며 “1만표를 목표로 1인당 5만원씩 돌리면 5억원이면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돈 선거의 유혹이 그만큼 강했단 거다. 지역구의 이런 상황과 작은 동네에서 오랫동안 함께 생활한 특성 등이 반영돼 ‘사상 최악의 돈봉투 참사’가 터졌다.
 
‘청도 충격’ 이후 사실상 돈 선거는 사라지다시피 했다.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이 부정한 정치자금을 받거나 공천을 대가로 돈을 주고받다 처벌된 경우는 종종 있지만 표를 사기 위해 대놓고 돈을 뿌리는 구습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들어 새로운 형태의 선거용 돈풀기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야당은 ‘전국민 재난 지원금’ 또는 ‘국민 위로금’을 문제삼는다. 부산민심을 핀셋 겨냥한 가덕도 신공항 사업은 부산시민들조차 ‘보궐선거용’으로 받아들인다. 다만 과거의 돈선거와 다른 건 모두 국가예산, 즉 국민 세금을 투입한다는 거다. 지금껏 있었던 유권자를 직접 상대로 한 매표는 자신의 돈을 쓰는 경우가 많았고, 대통령 선거같이 큰 판에선 기업들로부터 조달하기도 했다. 당선되면 자금 제공자에게 이익을 제공하거나 ‘본전’을 찾으려 이권에 개입한다는 측면에서 나쁜 돈이지만 적어도 세금에 손대진 않았다.
 
여권은 선거용 돈풀기가 아니라 항변하지만 ‘시점’을 보면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지난해엔 총선 직전 전국민 재난지원금 지원이 결정됐고, 올해는 4월 재·보선을 앞두고 재난지원금과 위로금 카드를 만지작대고 있다. 가뜩이나 28조 원짜리 가덕도 신공항 건설 약속과 법안 졸속처리를 놓고 비판 여론이 달궈지고 있는 마당에 문재인 대통령은 25일 직접 부산을 방문했다. 오이밭에서 갓끈 고쳐매는 격이니, 신금권·신관권 선거라는 뒷말이 무성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매표 행위를 금지하는 규정은 선거법 제112조 ‘기부행위의 정의 등’이다. 여기서 기부행위는 선거구민 등에 재산상 이익을 제공하거나 의사를 표시하는 행위로 정의했다. 모든 기부행위는 처벌 대상이지만 여러 예외조항을 뒀고, 그 중엔 정부나 지자체가 예산으로 행하는 법령에 의한 금품제공 행위도 있다. 선거법에 정통한 변호사는 “지금 정부의 각종 행태는 실질적으로 4월 재·보선을 겨냥한 기부행위로 보이지만 선거법상 빠져나갈 여지가 있다”며 “최소한 선거가 임박해서는 금지하는 등의 새 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만약 선거가 없었다면, 국민 세금으로도 모자라 나랏빚을 내 위로금을 뿌리겠다는 도박에 가까운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 자기 주머니 털어 유권자들의 표심을 사던 과거 행위는 차라리 양심적이란 느낌마저 든다.
 
이가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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