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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선물은 아무 날도 아닌 날에 아무 이유 없이 주는 것

기자
윤경재 사진 윤경재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79) 

우리의 아들과 딸이 어떻게 우리에게 왔는지 자문한다면 ‘그냥’이라고 답해야 진솔한 고백이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배우자가 ‘그냥’ 내게로 왔음에 감사하자. 존재의 선물에 기뻐하자. [사진 pxhere]

우리의 아들과 딸이 어떻게 우리에게 왔는지 자문한다면 ‘그냥’이라고 답해야 진솔한 고백이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배우자가 ‘그냥’ 내게로 왔음에 감사하자. 존재의 선물에 기뻐하자. [사진 pxhere]

 
그냥이란 말
 
네가 찾아왔을 때
아스라한 솔숲 사잇길이 또렷이 보였어
 
이젠 혼자가 아니라
좁은 건널목도 사슴의 눈으로 두리번거렸지
 
왜 하필 너냐는 질문에
‘그냥’이란 말보다 좋은 걸 찾지 못했어
 
함박눈 덮여 눈사람 만들던 날
아래 몸뚱이는 아빠가 단단히 뭉쳤고
어린 아들 닮은 얼굴은 짝짝이 눈과 코
대야 모자 너머 따사로이 풀어진
달빛이 골목 구석구석 헤살거렸어
 
아끼지 않고 비추는 뜻밖의 빛살이
곰삭은 묵은지처럼 준비된 우연이란 걸
전부를 주는 선물 같은 사랑이란 걸
 
아무 날 아무런 일없이 그냥
스스로 물음을 물었지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라
기다리던 너와 내게 찾아온 고마운 나날이었어
 
해설
지인의 아들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 일처럼 무척 기뻤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 내 아들과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터라 신랑과 각별한 정이 들었다. 더군다나 주례까지 부탁하니 더 영광스럽게 느꼈다. 어떤 내용의 주례사를 풀어야 신랑·신부에게 감동을 주며 오래 기억될지 부담된다. 지루하게 길지 않으면서 듣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싶다.
 
코로나19 사태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여행을 다닐 수 없게 된 점이다. 여행은 실제로 여행을 다닐 때보다 미리 스케줄과 장소 정보를 확인하고 준비할 때, 또 여행을 끝마치고 나중에 추억을 떠올릴 적에 더 흥분되고 미소가 떠나지 않게 된다. 사람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건 실제 벌어지는 사건의 현장에서보다 예측과 기대 그리고 회상이라는 과정이 더 기쁘고 효과적이라는 말이다. 실제와 예측, 기대, 회상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어떤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재해석해 받아들인다는 데 차이가 있다. 실제로 여행은 홍수처럼 쏟아지는 사건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예측과 회상은 능동적으로 사건을 재구성해 받아들인다는 데 차이가 있다.
 
살다 보면 정말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 자기가 이전의 자신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저 길가의 코스모스가 작년의 코스모스가 아니다”는 글귀처럼. [사진 pixnio]

살다 보면 정말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 자기가 이전의 자신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저 길가의 코스모스가 작년의 코스모스가 아니다”는 글귀처럼. [사진 pixnio]

 
지금 내 앞에 선 신랑·신부도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고 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주례가 무슨 덕담을 해주었는지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을 거다. 나도 그랬으니까. 아마 다른 결혼식 과정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남아 나중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떠올리겠지만, 내 말은 다 잊을 거다. 다 잊어도 그래도 좋다.
 
여기 신랑은 내 아들과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녀 방학 때면 여행도 같이 다녔다. 강원도 해수욕장에서 민박 방을 얻어 캠프파이어를 한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겨울에는 함께 스키장에 다니면서 아빠들 뒤에 졸졸 따라다니며 A자 코스를 그렸던 것도 생각난다. 어려서 몸에 열이 펄펄 끓어올라 한밤에 응급실을 쫓아 다녔던 일, 정글짐에서 떨어지고 팔이 부러져서 정형외과를 찾았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사내아이라서 장난치다가 얼굴이 찢겨 놀란 적도 많았다. 찬찬히 되새겨보면 힘들었던 사건사고도 많았지만 이제는 모두 내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아들과 신랑은 공부한다고 서로 집에 다니며 밥을 얻어 먹고 함께 잠자면서 베개 싸움을 한 기억이 나겠지. 한밤중에 나가 농구 게임을 하면서 올려다본 보름달과 별빛의 추억도 새록새록 떠오를 게다. 어쩌면 성적표를 감추었다가 부모 몰래 도장을 찍어 제출한 사건은 지금도 자기들만 아는 비밀로 여기겠지.
 
하지만 아빠로서 가장 강렬한 인상은 아들이 태어나던 날의 기억이다. 전날 밤 9시쯤에 입원했지만, 초산이라 언제 출산할지 몰라 염치불구하고 직장에 출근했다가 정오가 지난 12시 30분 병실을 지켰던 어머니께 전화 연락을 받고 만세 환호를 질렀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첫아들 탄생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해주었지. 아들이 태어난 서울대 병원으로 달려가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이젠 혼자 몸이 아니란 거였다. 내 어깨에 처와 아들의 건강과 행복이 달렸다는 절실함이 기쁘면서도 확실하게 다가왔다. 맞다. 이제부터는 좁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라도 조심하며 주위를 살펴야 하겠다는 각오가 책임감과 함께 밀려왔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쳐야 한다는 말의 무게를 이때처럼 확실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큰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연립주택에서 살았다. 그야말로 우리 애는 동네가 키워주는 아이였다. 차가 다니지 않는 막다른 골목에서 네발 자전거를 탈라치면 앞집과 옆집 가족들이 밀어주고 끌어주었다. 아이 엄마가 시장에라도 가면 서로 나서서 아이를 돌보아주었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엔 모두 나와 눈을 치우면서 한쪽에서는 눈사람을 굴려 뭉쳤다. 누가 더 멋지게 눈사람을 만드는지 무언의 경쟁도 벌였다. 우리 아이는 추위에도 고집스레 발갛게 언 뺨과 손으로 앙증맞게 눈 뭉치를 굴려 자기를 닮은 눈사람 얼굴을 만들어 올렸다. 서로 밖에 나와 숯과 막대기로 눈썹과 입을 만들어 주었다. 서너 개의 눈사람이 밤이 깊어 잠에 빠진 동네를 지킬 때 둥근달의 빛살이 구석구석을 어루만져주었다.
 
살다 보면 정말 잊히지 않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자기가 이전의 자신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저 길가의 코스모스가 작년의 코스모스가 아니다”는 글귀가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새 인물이 되었다는 자각이 든다.
 
출발점은 언제나 두렵고 기대에 부풀게 마련이다. 과거와의 단절이 두려울 수 있다. 회피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열매는 결코 맺지 못한다. [사진 pixabay]

출발점은 언제나 두렵고 기대에 부풀게 마련이다. 과거와의 단절이 두려울 수 있다. 회피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열매는 결코 맺지 못한다. [사진 pixabay]

 
신랑의 부모로부터 새 며느리에 대한 인상이 바뀐 사연을 전해 들었다. 신랑이 처음 소개했을 때는 뭔가 서먹서먹하고 조심스러워 진정한 모습을 잘 몰랐단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비용문제, 예식장 문제, 손님 초대문제 등으로 양가 중간에서 이야기를 전하고 일정을 조정하는 일에 아주 지혜롭고 원만하게 해결하는 걸 보았단다. 곤란한 가운데 상대를 배려하는 현명한 말솜씨와 능숙한 처리, 몸가짐에서 진짜배기를 만났다는 확신이 들었단다.
 
곡선으로 직선을 그릴 줄 아는 여인의 여유를 발견한 신랑과 시부모는 새로운 면을 알았다고 표현하겠지만, 친정 부모 입장에서는 어쩌면 달라졌다고, 변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이처럼 한 사람의 평가는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지만 결혼이라는 일생의 중대사를 앞두고 자기 옛 모습만을 고집하는 건 더욱 현명하지 못한 처사다. 달라져야 하는 게 마땅하다. 아니 과거의 나를 버리겠다는 각오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올바른 자세이다.
 
출발점은 언제나 두렵고 기대에 부풀게 마련이다. 과거와의 단절이 두려울 수 있다. 회피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열매는 결코 맺지 못한다. 결혼은 세상을 향해 떠나는 일이다. 이제는 새사람이 되어 세상 속으로 떠나겠다고 약속하는 자리다. 인생사 죽음을 빼놓고 모든 문제에는 좀 돌아가더라도 해결책이 있다. 그걸 두 사람이서 하나 되어 해결하는 게 결혼이다.
 
또 하나 부탁하는 건 서로에게 선물을 주라는 거다. 그런데 선물은 예상하지 못한 때,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받을 때 그 효과가 크다. 아무 날도 아닌 날, 아무 이유도 없이 받는 선물은 그 감동이 깊고 오래 간다. 누군가에게 사랑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이런저런 이유를 대는 사람보다 “그냥 네가 좋아”라고 답하는 사람에게 진정성과 깊은 사랑의 정도를 느끼듯이.
 
행복의 천재는 우연을 선물한다. 신도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선물한다는 걸 살다 보면 깨달을 수 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그대는 사랑을 아는 사람이다. ‘그냥’을 선물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선물로 내놓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행복해진다.
 
우리의 아들과 딸이 어떻게 우리에게 왔는지 자문한다면 ‘그냥’이라고 답해야 진솔한 고백이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배우자가 ‘그냥’ 내게로 왔음에 감사하자. 존재의 선물에 기뻐하자.
 
한의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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