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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달항아리’는 철학과 감성 결합한 최고의 브랜딩 사례

전통 아이콘 형성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에 새로 나타난 달항아리 공간. [연합뉴스]

국립중앙박물관에 새로 나타난 달항아리 공간. [연합뉴스]

달항아리는 원래 ‘달항아리’가 아니었다. 조선 후기부터 만들어졌지만 ‘달항아리’라는 이름은 20세기 초까지 없었다. 이 아름답고 시적인 이름을 창조한 사람은 현대미술 거장 김환기(1913~1974)라고도 하고 김환기의 절친이자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었던 최순우(1916~1984)라고도 한다.
 

‘달항아리’ 명칭은 1960년대 등장
좁은 굽을 슬픔으로 해석한 야나기
김환기는 자유와 아방가르드로 봐
한국미의 아이돌, 남용 자제해야

김환기는 1950년대부터 둥그런 백자 항아리를 파란 보름달과 짝지어서 그리곤 했다. 항아리를 달에 비유한 시와 수필을 남기기도 했다. 고미술상 홍기대는 이렇게 말했다. “김환기가 도자기를 사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백자 항아리 중 일제 때 둥글다고 해서 마루츠보(圓壺)라고 불렀던 한 항아리를 특히 좋아해 그가 ‘달항아리’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달항아리라는 신조어가 지면에 처음 나타난 것은 김환기의 글이 아닌 최순우의 1963년 신문 칼럼에서다. “오늘 백발이 성성한 어느 노 감상가 한 분이 찾아와서 시원하고 부드럽게 생긴 큰 유백색 달항아리 하나를 어루만져보고는 혼자말처럼 ‘잘생긴 며느리 같구나’하고 자못 즐거운 눈치였다.” 그런데 최순우의 칼럼 뒷부분에 김환기의 항아리 사랑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이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며 달항아리라는 이름과 그 미학을 정립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도 달항아리라는 이름은 바로 보편화되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그 공식 명칭은 백자대호(白磁大壺)였고 그저 백자 항아리로 불리기도 했다. 나는 1950년 이전에 창간된 신문들을 대상으로 ‘달항아리’ 단어가 나온 빈도를 조사해본 적이 있다. 80년대까지는 거의 없고 90년대에 조금씩 나타나다가 2000년대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달항아리란 이름이 널리 쓰이면서 그 백자 항아리 자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급증한 것이다.
 
2000년대 들어 달항아리에 관한 큰 사건이 몇 가지 있었다. 런던 영국박물관(대영박물관)이 한국과 협업해서 한국실을 2000년에 개관하면서 주요 유물로서 18세기 백자대호를 ‘Moon Jar(달항아리)’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 이 낭만적인 이름이 한몫해서 달항아리는 영국박물관의 인기 유물로 떠오르고 알랭 드 보통 같은 유럽 문인·예술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2005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이 개관전으로 ‘백자 달항아리전’을 연 것도 전환점이었다. 국립박물관이 달항아리라는 명칭을 전시 공식 제목에 쓴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시의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전시 도록 서문에 달항아리는 “한국미의 극치”라고 썼다. 2011년 드디어 문화재청은 국보·보물로 지정된 일곱 개 백자대호의 공식 명칭을 모두 ‘백자 달항아리’로 바꿨다. 그러면서 달항아리는 한국의 미를 대표하는 아이돌(우상)로 자리잡았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보면 최근 새로 단장한 백자실에 관람객의 힐링을 위한 달항아리 공간이 따로 있다. 달항아리 유물 뒤로 둥실 뜬 하얀 달이 물 위에 비치는 미디어아트가 상영된다. 달항아리가 아니라 ‘백자대호’ 공간이면 이런 감성 연출이 가능했을까? 또 얼마 전 방탄소년단(BTS) 멤버들이 팬들을 위해 직접 가구를 그려 넣은 ‘아미(BTS 팬덤)의 방’ 그림을 공개했는데, RM은 달항아리와 사방탁자를 그려 넣고 “푸근한 느낌의 달항아리의 곡선, 사방탁자의 직선이 어우러져 아미 여러분에게 다채로운 편안함을 선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만약 “푸근한 느낌의 백자대호”라고 했다면, 푸근하긴커녕 얼마나 딱딱했겠는가. 네이밍의 힘을 절감하게 된다.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그린 ‘아미의 방.’ RM이 그린 달항아리가 보인다. [사진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그린 ‘아미의 방.’ RM이 그린 달항아리가 보인다. [사진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하지만 내가 달항아리를 ‘현대의 산물’이라고 하는 이유는 단지 네이밍 때문만이 아니다. 달항아리에 으레 붙는 수식어 ‘소박함’ ‘백색의 미’ ‘자연스럽게 나온 일그러짐의 아름다움’은 사실 일제강점기에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가 조선백자의 특징으로 언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성립한 달항아리 미학은 한국의 예술가·평론가들이 야나기를 수용하는 동시에 극복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야나기는 상류층을 위한 사치품 대신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일상용품으로서의 공예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일본에서 민예 운동을 일으켰다. 같은 맥락에서 귀족적인 고려청자와 사대부의 문방구 조선백자보다 서민의 일상용기 백자에 주목하고 그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영국박물관의 설명대로 “20세기 전반에 서구에서 한국 도자기를 점차 높이 평가하게 된 데에는 야나기 등 일본 민예학자들이 많은 부분 기여”한 게 사실이다. 김환기와 최순우가 달항아리의 매력에 눈 뜨게 된 것도 야나기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야나기는 조선의 미를 수동적인 “비애의 미”로 규정해서 훗날 반발을 사게 됐다. 야나기는 조선 항아리가 몸체에 비해 굽이 작은 것을 가리켜 “안정도가 상실된 것”이며 지상에 몸을 붙이지 못하는 “민족이 경험한 괴로움과 슬픔”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된 것이라고 했다.
 
반면에 김환기는 달항아리의 굽이 작은 것을 “현대미술의 전위”로 여겼다. 그가 조선백자를 현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의 건물에 비긴 것은 참 절묘하다. 르 코르뷔지에 건축의 특징인 필로티(개방된 공간에 서 있는 기둥들 위에 건물을 세워 지상에서 건물을 분리시킨 것)는 김환기가 “굽이 좁다 못해 둥실 떠 있다”고 한 달항아리의 독특한 형태와 잘 맞아떨어진다. 김환기는 달항아리의 좁은 굽에서 야나기처럼 슬픔을 보는 대신 자유와 아방가르드 정신을 본 것이다.
 
지금 달항아리가 한국미의 아이콘이 된 배경에는 이런 미학적 담론의 역사가 있다. 달항아리야말로 철학과 감성을 결합한 한국문화사 최고의 브랜딩 사례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하지만 요즘은 그 잘 만들어진 브랜드에 숟가락을 얹어 아무 디자인에나 달항아리를 갖다 붙이는 사례를 종종 본다. 해외 미술관 한국실에 현대 도예가의 달항아리가 아무 맥락 없이 설치되어 오히려 초라하게 보이는 경우도 여럿 보았다. 100년의 담론 속에 휘황한 보름달처럼 솟아오른 달항아리가 기울어져 버리지 않도록 신경 쓸 일이다. 
 
영국박물관의 스타 달항아리
 사진작가 구본창이 영국박물관 달항아리를 찍은 ‘BM04’(2006). [사진 구본창]

사진작가 구본창이 영국박물관 달항아리를 찍은 ‘BM04’(2006). [사진 구본창]

“서울역을 떠나는 내 슬픔은 표현하기조차 힘들 정도다. 내 마음 한 조각을 떼어놓고 오는 기분이다.” 20세기 영국의 주요 도예가인 버나드 리치(1887~1979)는 친구인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1920년 조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이렇게 썼다. 창경궁의 이왕가박물관에 갔다가 한국 도자기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 상태였다.
 
리치는 1935년 다시 야나기와 함께 조선을 방문했고 조선백자의 “자연스러운 무심함(natural unselfconsciousness)”에 더욱 빠져들었다. 결국 몇 점을 구입해 영국으로 가져갔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런던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달항아리다. 박물관 가이드북에도 등장하는 스타 유물이다.
 
리치의 작품 철학은 ‘동서양의 결합’과 ‘산업혁명에 저항하는 수공(手工)’이었고, 거기에 달항아리를 비롯한 조선백자가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달항아리를 소개했다. 그리고 1943년에 동료 도예가인 루시 리(1902~1995)에게 달항아리를 선물했다. 그때부터 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달항아리는 리의 스튜디오에 있었다.
 
리의 노년에 엘리자베스 2세의 제부인 사진작가 스노든 백작이 그녀의 사진을 시리즈로 찍었는데, 사진에 잡힌 리의 옆에는 언제나 달항아리가 있었다. 80년대 말 잡지에서 우연히 이 사진을 본 사진작가 구본창은 항아리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이 노(老)도예가의 얼굴과 묘하게 어울리는 것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시간을 축적한 사물에 그전부터 관심이 많던 구본창은 이것을 계기로 백자 연작을 찍기 시작했다. 백자 특유의 ‘무욕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도자기 특유의 광택을 없애고 영적인 분위기가 강한 회화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 그 연작에 바로 영국박물관 달항아리가 포함되어 있고, 그 사진으로 인해 국내외 달항아리 열풍은 더욱 힘을 얻었다.
 
이처럼 ‘한국미의 아이콘 달항아리’는 외국인의 시각과 한국 예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 국내 예술가들의 탐구가 서로 반응하며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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