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의 금제관식(관 꾸미개). [사진 국립공주박물관]](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2/23/8f916fd7-21a0-4c01-af05-363b327f7aca.jpg)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의 금제관식(관 꾸미개).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50년, 졸속 발굴이 문화재과학 초석 되다
“이 무덤은 백제 사마왕과 왕비의 무덤입니다.”
1971년 7월 8일 흥분을 억누르며 김원룡 발굴단장(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말했다. 벽돌로 덮어 쌓은 아치형 무덤 입구 한쪽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직후였다. 벌떼처럼 둘러싼 기자들이 “사마왕이 누구냐”고 물었다. 한국 역대 왕조 연표를 들어 확인시켜준 공식 시호는 백제 25대 무령왕. 521년 ‘갱위강국(更爲强國, 다시 강국이 되다)’을 선포한 백제 중흥의 군주 무령왕의 무덤이 약 1500년 만에 침묵을 깬 순간이었다. 2021년은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자 무령왕의 갱위강국 선포 1500주년. “한국 고고·역사학을 바꾼 기념비적 발굴” “되풀이돼선 안 될 실패의 거울”로 동시 조명되는 무령왕릉을 통해 문화재 발굴과 보존과학 50년을 3회에 걸쳐 돌아본다.
[무령왕릉 발굴 50년, 역사를 바꾸다] ⓵
1971년 7월 8일 흥분을 억누르며 김원룡 발굴단장(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말했다. 벽돌로 덮어 쌓은 아치형 무덤 입구 한쪽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직후였다. 벌떼처럼 둘러싼 기자들이 “사마왕이 누구냐”고 물었다. 한국 역대 왕조 연표를 들어 확인시켜준 공식 시호는 백제 25대 무령왕. 521년 ‘갱위강국(更爲强國, 다시 강국이 되다)’을 선포한 백제 중흥의 군주 무령왕의 무덤이 약 1500년 만에 침묵을 깬 순간이었다. 2021년은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자 무령왕의 갱위강국 선포 1500주년. “한국 고고·역사학을 바꾼 기념비적 발굴” “되풀이돼선 안 될 실패의 거울”로 동시 조명되는 무령왕릉을 통해 문화재 발굴과 보존과학 50년을 3회에 걸쳐 돌아본다.
천마총·황남대총·무용총·쌍영총…. 신라·고구려의 고분들은 대체로 ‘총’으로 끝나는데 왜 무령왕릉은 ‘능’일까. 이런 의문을 품은 적 있다면 1500년 된 고대사 ‘블랙박스’를 열어젖힐 준비가 됐다. 그만큼 무령왕릉은 백제사를 푸는 열쇠다. 1971년 7월 5일 배수로 공사인부의 삽날 끝에 무덤 벽돌이 걸리지 않았다면 백제사, 아니 삼국사 전체가 오래도록 암흑이었을지 모른다.
“총 17점의 국보가 나왔는데, 단일무덤에서 이렇게 나온 경우가 없죠. 그 중 첫 손에 꼽는 게 지석입니다. 삼국시대 어느 무덤에도 없던 유물의 절대 편년을 제시함으로써 고고학과 고고미술사 발전의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올 상반기 무령왕에 관한 대중역사서 『끝나지 않은 신화』를 출간하는 정재윤 공주대 교수(사학과)의 설명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석은 국보 163호로 묘지석, 능석이라고도 불리는 돌판이다. 땅을 사서 무덤을 쓴다는 내용도 들어 있어 매지권라고도 불린다. 무령왕릉에선 왕과 왕비의 지석이 각각 나왔다. 왕의 지석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이름과 함께 계묘년(523년)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다. 출생, 재위, 사망 연도가 이렇게 확실한 삼국시대 고분은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삼국시대 주인공이 밝혀진 유일한 왕릉
![무령왕릉 발굴 당시 연도 상부 세부 노출 상태.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2/23/755e93e7-35da-4a3f-bda0-5824219e1a32.jpg)
무령왕릉 발굴 당시 연도 상부 세부 노출 상태.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석수(진묘수)와 지석(묘비석).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2/23/0e1cf093-4e27-46be-a194-6b9e7c933165.jpg)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석수(진묘수)와 지석(묘비석).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의 묘지석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고 적힌 부분. '사마'는 무령왕의 생전 이름이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2/23/544f7e57-fe45-493a-b296-14426a31a5dc.jpg)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의 묘지석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고 적힌 부분. '사마'는 무령왕의 생전 이름이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국보 17점 쏟아진 '백제 고분예술의 정수'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의 금귀걸이. [사진 국립공주박물관]](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2/23/36224e1c-b701-4def-807e-c9a4e7a8f716.jpg)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의 금귀걸이.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비의 베개. [사진 국립공주박물관]](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2/23/032cfcce-54d6-494c-9830-6f740699c1d7.jpg)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비의 베개.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글자를 새긴 용무늬 팔찌. 팔찌 안쪽에 대부인(大夫人)을 위해 ‘다리’라는 장인이 만들었다고 새겼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2/23/5082fe3e-f2f5-4ace-a447-6abfc1bf7a2a.jpg)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글자를 새긴 용무늬 팔찌. 팔찌 안쪽에 대부인(大夫人)을 위해 ‘다리’라는 장인이 만들었다고 새겼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6세기 한·중·일 교류 밝힌 기념비적 발굴
무령왕릉 발굴은, 그러나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이렇게 화려하고 값진 유물을 무덤에서 내보내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2시간. “쓸어담았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의 ‘초고속 발굴’이었다. 공사인부의 삽날 끝에 벽돌이 걸린 때로부터 발굴단이 손을 털고 나온 7월 9일 오전까지 불과 5일. 누가 등이라도 떠민 걸까. 1971년 7월 발굴단을 휘감았던 강박은 대체 무엇일까. 그날 밤 공주 송산리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백제 무령왕릉의 내부 모습.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은 내부 보호를 위해 1997년 영구폐쇄됐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2/23/c1ba8027-c94f-41ba-bd41-b0d486f4c549.jpg)
백제 무령왕릉의 내부 모습.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은 내부 보호를 위해 1997년 영구폐쇄됐다. [중앙포토]
〈2편으로 계속〉
취재·글=강혜란 기자, 그래픽·영상= 심정보·이세영
theother@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