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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념 없는’ 미니멀 아트 추구한 황현욱, 맹물 미역국 즐겨

예술가의 한끼

인공갤러리를 한국 현대미술의 성지로 만들었던 황현욱. [사진 황현욱 유족]

인공갤러리를 한국 현대미술의 성지로 만들었던 황현욱. [사진 황현욱 유족]

1988년 서울 대학로에 압도적인 전시공간이 들어섰다. 황현욱(1948~2001)이 대표를 맡았던 인공갤러리는 조립식 샌드위치 패널 건축물이었다. 황현욱과 비디오 아티스트이자 건축가인 박현기(1942~2000)가 함께 설계했다. 층고는 8m, 전시 벽면의 높이가 무려 6m에 달했다. 당시 국내 화랑의 전시 벽면은 높다 해봐야 3m가 고작이었다.
 

88년 대학로에 인공갤러리 열어
텅 빈 전시공간, 현대미술 성지로

대구서 김창열·박서보 등 전시 땐
고향 안동서 소박한 산나물 파티

국수·문어숙회 정갈한 맛 좋아해
시대 앞서간 화랑 경영 탓 궁핍

새로운 전시공간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감각의 작품을 촉발케 한다. 필경 미술문화를 바꾸기도 한다. 이미 화단의 중심이 됐던 단색화 화가들이 이 공간의 첫 주인공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영광을 누린 화가는 뜻밖에도 한 세대 아래의 청년작가 이기봉(1957~)이었다. 인공갤러리는 이렇게 엉뚱하면서도 산뜻한 출발을 했다. 이후 이우환, 윤형근, 김청정, 리처드 롱 등 국내외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인공갤러리를 거치면서 패널 건축물의 휑한 공간은 한국 현대미술의 성지로 자리매김했다.
  
세계적 작가 저드전 열어 미술계 충격  
 
층고가 8m, 전시 벽면의 높이가 6m에 달했던 인공갤러리. 사진은 1993년 열린 ‘리처드 롱 개인전’. [사진 황현욱 유족]

층고가 8m, 전시 벽면의 높이가 6m에 달했던 인공갤러리. 사진은 1993년 열린 ‘리처드 롱 개인전’. [사진 황현욱 유족]

1991년 5월에는 세계적인 미니멀 아트 작가인 도널드 저드(1928~1994)의 개인전이 인공갤러리에서 열렸다. 국립현대미술관도 감히 기획할 수 없었던 대형전시를 일개 화랑이 성사시킨 것이다. 국내 미술계에 충격이 컸다. 화가 윤형근(1928~2007)을 존경하던 일본의 야마구치갤러리 대표가 뉴욕과 서울을 이어주는 전시의 중개를 맡았다. 인공갤러리에서 만난 동갑내기 저드와 윤형근은 만나자마자 서로를 알아보고 의기투합했다. 윤형근은 얼마 후 저드의 초대를 받아 뉴욕 도널드 저드 파운데이션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그것은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는 발판이 됐다.  
 
저드는 대지미술가인 리처드 롱(1945~)에게 인공갤러리에서 전시할 것을 권했다. 롱은 93년 서울을 방문했다. 롱은 높고 긴 인공갤러리의 한쪽 벽면 전부를 직접 손바닥으로 흙칠을 해 가며 메워 나갔다. 바닥에는 서울 근교 석재상에서 구한 수많은 돌을 원형으로 깔았다. 호박돌을 쓴 작품은 제목을 ‘한강서클’로 했다. 견치석들은 ‘산(山)서클’이 됐다. 인공갤러리의 위상이 점점 올라갔다.
 
저드는 서울에 이만한 공간 감각을 갖춘 전시공간이 있다는 데 놀랐다. 현대미술에 대한 통찰력이 깊은 황현욱에게 매력을 느꼈다. 저드는 황현욱과 함께 안동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찾았다. 2차대전 이후 10대 후반의 저드는 미군 공병 소속으로 1년간 한국 근무를 했다. 한국의 산하는 그에게 각별했다. 환갑을 넘겨 저드는 다시 한국을 찾았다. 쨍한 늦가을 하늘로 이어진 탁트인 공간의 병산서원 체험은 그가 평생 추구한 미니멀리즘과는 또 다른 경지의 공간 감각을 열어 주었다.
 
황현욱은 안동 출신이다. 권사인 어머니를 따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현실적 삶의 번다한 장소성을 초월하여 말쑥한 정신의 공간성을 추구하는 성리학적 풍토와 프로테스탄티즘의 염결주의가 그의 정신세계를 이끌었다. 그 정신은 인공갤러리의 텅 빈 공간으로 구체화됐다.
 
1991년 ‘도널드 저드 개인전’에 모인 황현욱, 저드, 야마구치 다카시(왼쪽부터). [사진 황현욱 유족]

1991년 ‘도널드 저드 개인전’에 모인 황현욱, 저드, 야마구치 다카시(왼쪽부터). [사진 황현욱 유족]

70년 서라벌예대를 졸업한 황현욱은 70년대 중반부터 대구에서 활동했다. 74년 제1회 대구현대미술제가 열렸다. 이강소가 주도했고 황현욱, 최병소, 김영진, 이묘춘, 김기동 등이 주축이 됐다. 전국의 실험적인 미술작가들이 몰려들어 대구 시내의 화랑에서 분산 전시를 하고, 낙동강 강정에서는 개념미술의 현장작업을 했다. 나중에는 일본 작가들까지 대거 참여해 국제적인 행사가 됐다.
 
연례행사였던 대구현대미술제는 79년 막을 내렸다. 이 무렵 황현욱은 자신의 행로를 미술 작가에서 미술 기획자로 변경했다. 이론 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봉덕동 효성여대 뒷산의 조그만 골방에서 영어 공부를 기초부터 다시 하며 원서를 읽어 나갔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시내로 나와 박현기, 안승영, 권부문, 이교준, 박두영, 신용덕 등과 함께 만든 스터디 그룹에서 영어 강독을 했다. 주로 뉴욕스쿨, 현상학, 철학자 박이문 등을 공부했다.
 
대구 수화랑의 디렉터를 맡은 후 갤러리 댓과 대구 인공갤러리를 운영했다. 그리고 상경해 88년 서울 인공갤러리를 출범시켰다. 서울의 김창열·윤형근·박서보, 일본의 이우환 등이 대구 인공갤러리에서 전시를 하면 그들을 안동으로 모셨다. 안동에는 할머니가 운영하는 일원식당이 있었다. 안동은 저장음식이 발달했다. 소박한 집밥이 주 메뉴인 일원식당은 청량산과 영양 일월산에서 나는 산나물을 말렸다 물에 불린 후 무쳐서 내놓았다. 대구에서 전화로 예약하면 큰 가마솥에다 흰 쌀밥을 해 놓는다. 갓 나온 따끈한 밥 위에 얹은 맵싸한 산초열매 장아찌가 앙탈을 부렸다. 대구의 미술인 동료인 이교준·정병국·신용덕·권오봉·박현기·권부문·이광호 등도 가끔 황현욱과 함께 일원식당의 파티에 가세했다.
 
서울에 인공갤러리를 열자 독신의 황현욱은 종로구 송월동 언덕배기 원룸에 거처를 잡았다. 독립문 근방의 영천시장에서 장을 보았다. 좁은 방에 자그마한 냉장고가 있긴 했지만 그 안에는 담배갑만 가득 들어 있었다. 일용의 양식에 만족하는 황현욱은 음식 재료를 딱 하루 치만 샀고 싱싱한 상태에서 다 소비했기에 따로 냉장고가 필요 없었다.
  
평소 농담처럼 성탄절 이브에 세상 떠나
 
나중에 그의 부인이 된 김춘화에게 잘 보이려고 자신만의 레시피대로 라면을 끓여 주었다. 큼직하게 썬 감자를 먼저 넣고 익힌 다음 라면과 미역을 넣었다. 천하제일의 라면맛이 나왔다.  
 
가끔은 특이한 미역국을 끓였다. 멸치 한 마리도, 소금 한 꼬집도 안 들어간, 맹물에 미역만 투하한 싱거운 미역국이었다. 김춘화에게는 천하 최악의 미역국이었다. 밋밋한 맛의 미역국에 열중하는 황현욱의 특이한 식성에 아연실색했지만, 미역이라는 재료 본연의 맛을 느끼기 위해선 이게 최선이라는 이 남자의 설교는 그럴듯했다. 설교를 듣다 보면 어느샌가 맹물 미역국에서 거짓말처럼 푸른 바다의 갯내가 퍼져 나왔다.
 
예전에는 운송이 열악했다. 부산의 갈치가 대구쯤 오면 소금에 절어 노랗게 변한다. 입에 대면 혓바닥이 탈 정도로 강한 짠맛이 난다. 이 갈치가 내륙 깊숙이 안동까지 가면 아예 소금 덩어리가 된다. 소년 황현욱은 갈치인지 소금인지도 모를 지경의 생선을 먹고 자랐다. 그래서일까, 소금을 싫어했다.
 
그가 운영한 대학로의 인공갤러리 근처 혜화문 로터리에는 국수집이 많다. 국수를 좋아한 황현욱은 혜화동 골목을 자주 찾았다. 근처에 성균관이 있어 그런지 혜화동의 음식은 정갈하고 담백하다. 칼국수, 문어숙회의 맛은 경북 내륙의 그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대구 시절, 대구백화점 근처의 경주할매국수집에서 즐기던 칼국수처럼 풋풋한 밀가루 냄새가 났다.
 
황현욱의 까칠한 식성은 그의 화랑 경영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화려하기 마련인 여느 전시 오프닝 리셉션 파티와는 달리 인공갤러리에서 내놓은 것이라곤 보드카에 무, 배추를 썰어 놓은 게 전부였다. 작가도 군더더기 없이 본질적인 조형을 추구하는 작가들을 선호했다.  
 
80년대 당시 미니멀 아트는 한국의 대중들은 물론 미술 전문인들에게도 이해되기 힘든 미술 양식이었다. 미니멀 아트는 양념이 없는 미술이다. 감각적으로는 호소력이 미약한 미술이다. 그렇지만 그는 일관되게 미니멀 아트를 밀고 나갔다. 인공갤러리에서 전시한 작가들의 작품들은 지금에 와서는 엄청난 고가가 되었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 경영이 힘들어졌다. 너무 앞서갔다는 이유로 그는 궁핍해졌다. 96년 결국 인공갤러리를 접었다.
 
인공갤러리는 말파라는 카페로 바뀌었다. 젊은이들이 찾는 명소가 됐다. 어느 정도 경제력을 회복한 그는 대전에 비비스페이스란 공간을 만들었다. 2001년 5월 개관전으로 윤형근전을 열었다. 옛날의 동료들이 대전을 찾았다. 그러나 과로와 지병에 지친 그에게 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평소 농담처럼 “난 예수님이 태어난 날 죽을 거야”라고 했다. 그해 12월 24일 광활한 무한공간으로 그는 떠났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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