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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위샹 “애들은 애완견 아니다, 능력 갖추게 엄히 키워야”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1〉

펑위샹과 리더촨은 1남 3녀를 뒀다. 뒷줄이 장녀 펑리다. 1940년, 충칭. [사진 김명호]

펑위샹과 리더촨은 1남 3녀를 뒀다. 뒷줄이 장녀 펑리다. 1940년, 충칭. [사진 김명호]

한동안 펑위샹(馮玉祥·풍옥상)에 대한 평가는 야박했다. 은원(恩怨)이 남달랐던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찬양과 비난을 반복했다. “배신이 직업”이라는 악담도 서슴지 않았다.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1959년 여름 뤼산(廬山)에서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에게 비판받자 “펑위샹 같은 인물”이라며 맞받아쳤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달랐다. 펑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일생을 “애국자” 한마디로 요약했다. 남들은 모르는 이유가 있었다.
 

군기밀비 쓴 장남에게 주먹 날려
병기창에 보내 8주간 중노동시켜
호랑이 아버지 덕에 자녀들 성공

장제스·마오쩌둥, 펑 평가 야박
반면 덩샤오핑은 애국자로 칭송
장징궈는 펑의 딸과 연애결혼

1982년 9월 14일 베이징, 전 서북군 출신 100여명이 준비한 펑위샹 장군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식이 시작될 무렵 덩샤오핑이 참석한다는 소식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자녀들이 덩을 맞이하기 위해 나이순으로 도열했다. 펑의 친척들과 악수를 마친 덩이 입을 열었다. “푸넝(弗能·불능)이 안 보인다.” 펑위샹의 둘째 딸 펑푸화(馮弗伐·풍불벌)가 훌쩍이며 답했다. “큰언니는 3년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덩은 탄식과 함께 연신 무릎 치며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덩샤오핑·장징궈, 소련 유학 동기
 
부인 위화신과 중앙서기처 서기 시중쉰(習仲勳)을 방문한 펑훙다. 1981년 여름, 베이징. [사진 김명호]

부인 위화신과 중앙서기처 서기 시중쉰(習仲勳)을 방문한 펑훙다. 1981년 여름, 베이징. [사진 김명호]

자리에 앉은 덩샤오핑은 펑위샹의 삶을 설명했다. “일생 중 많은 시간을 국가와 인민을 위해 훌륭한 일을 많이 했다. 거대한 공과 위업을 후세에 남겼다.” 펑푸넝과의 일화도 소개했다. “모스크바 중산대학 시절, 푸넝과 장징궈(蔣經國·장경국)는 나와 같은 반이었다. 당시 두 사람은 우리 반에서 가장 어렸다. 푸넝은 장징궈의 첫사랑이었다. 가는 곳마다 붙어 다녔다. 둘이 결혼신고 할 때 나도 같이 갔다.”
 
1920년대 초, 중국은 소련과 달콤한 사이였다. 중국의 고관 집 자녀와 열혈청년들의 소련 유학이 줄을 이었다. 소련의 지원으로 설립한 황푸군관학교 교장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도 모스크바로 떠났다. 1925년 10월, 중산대학에 이름을 올렸다. 독일 유학 중이던 펑푸넝도 소련 행을 주저하지 않았다. 장징궈와 펑푸넝은 16세 동갑이었다. 중산대학의 중국인 유학생들은 극성파였다. 연애도 학업 못지않게 치열했다. 소련에 온 장제스도 푸넝을 맘에 들어 했다.
 
은퇴 후 역사 공부에 열중하는 펑위샹. [사진 김명호]

은퇴 후 역사 공부에 열중하는 펑위샹. [사진 김명호]

이날 덩샤오핑은 50여 년 전 펑위샹과의 어려웠던 시절도 회상했다. “국·공합작이 성사되자 펑 장군은 우리 당원을 서북군에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에서 3명을 보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우리는 군용열차 타고 사막을 건넜다. 내몽고에 도착해 펑 장군의 북벌선언(五原誓師)을 거들었다. 서북군은 물자 결핍으로 고생이 심했다. 50여 년 전 장군과 들판에서 찐만두 씹으며 허기 달랬던 날들이 눈에 선하다. 펑 장군은 전형적인 농민장군이었다. 사병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제 밥을 어린 사병에게 덜어주는 모습을 많이 봤다.” 펑위샹은 황푸군관학교를 부러워했다. 덩샤오핑과 함께 서북의 황푸나 다름없는 중산군사학교를 세웠다. 1927년 공산당과 결별한 장제스가 중공당원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거의 인간사냥 수준이었다. 다른 군벌들은 장제스 눈치 보느라 더 가혹했다. 덩샤오핑의 목숨도 풍전등화였다. 펑은 불안해하는 덩샤오핑을 안심시켰다. 예의를 갖춰 떠나보냈다.
  
펑, 국민당 고관들 자녀교육 비판
 
펑위샹의 베이징정변에 실병력을 투입한 후징이(胡景翼). 망명객 신익희 선생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사진 김명호]

펑위샹의 베이징정변에 실병력을 투입한 후징이(胡景翼). 망명객 신익희 선생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사진 김명호]

펑위샹은 자녀교육에 성공했다. 어릴 때부터 가혹할 정도로 엄하게 다뤘다. 국민당 고관들의 자녀 교육을 혹독히 비판했다. 당시 중국에 와있던 서구인들의 영향으로 애완견을 애지중지할 때였다. “애들을 애완견처럼 예뻐만 하고 돼지처럼 먹이기만 하는 세태가 한심하다. 애들은 개나 돼지가 아니다. 능력을 갖추도록 엄하게 키워야 한다. 근본과 평민의식을 망각하는 애들은 부모 책임이다.” 부하들에게도 지시했다. “우리 애들 부를 때 샤오제(小姐) 같은 용어 쓰지 마라. 나도 너희들처럼 평민 출신이고 애들도 평민 자식이다. 그냥 이름 불러라. 어기면 노예 취급당할 각오해라.” 장남 펑훙궈(馮洪國·풍홍국)에겐 특히 엄했다. 부관이 지출하는 기밀비로 산 원숭이 털모자 쓰고 열차 1등석 탄 것을 알자 분노했다. 방문 걸어 잠그고 다그쳤다. “내가 원래 뭐하던 사람인 줄 아느냐?” “벽돌 기술자 출신입니다.” “다시 말해봐라.” “사병 출신입니다.” 말이 떨어지자 주먹이 날아왔다. 꿇어앉자 훈계와 주먹이 사정없이 날아왔다. “너는 근본이 뭔지 모르는 놈이다. 네 조부와 아비는 빈한한 집안 출신이다. 고급 모자와 1등석이 말이 되느냐.” 펑위샹은 밖에서 부관이 제 잘못이라며 빌고, 부인 리더촨(李德全·이덕전)이 문을 두드려도 막무가내였다. 평소 존경하는 큰형수가 나타나자 문을 열었다. 형수가 떠나자 부관에게 지시했다. “병기창에 데리고 가라. 8주간 중노동 시켜라.”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마친 훙궈는 부친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사병들과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전쟁터를 누볐다. 펑위샹은 아들 덕에 호부무견자(虎父無犬子), 호랑이 아버지에게 개 같은 자식 없다는 소리 들을 때마다 싱글벙글했다.
 
세계적인 재미 물리학자 펑훙즈(馮洪志·풍홍지)와 전 북해함대 부사령관 펑훙다(馮洪達·풍홍달)도 펑위샹의 아들이었다. 딸과 며느리도 빼어났다. 해군총의원 부원장을 역임한, 중국이 자랑하는 면역전문가 펑리다(馮理達·풍리달)는 리더촨 사이의 장녀이고, 며느리 위화신(余華心·여화심)은 시아버지 일생을 정리해 펑위샹의 진면목을 세계에 알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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