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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망명 때 즐긴 와인, 고향 체코선 ‘참을 수 없는 위선’

와글와글 

유럽을 기차로 여행하다 보면 지역별로 노숙자 풍경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 기차역 앞에서 마주친 노숙자들의 손에는 포도주병이 들려 있고, 알프스산맥 넘어 독일과 네덜란드 노숙자들은 맥주를 마시고 있다. 아일랜드와 영국 스코틀랜드 노숙자들은 맥주병 혹은 위스키병을 들고 있는 반면에 북유럽과 러시아에서 만난 노숙자들은 보드카를 즐긴다.
 

밀란 쿤데라 『향수』
여주인공이 귀향 후 포도주 접대
‘국민 술’ 맥주 먹던 옛 친구들 외면
술로 인해 되레 이방인 취급당해

술을 동·서 문화적 정체성과 연결
포도주, 쿤데라 소설의 단골 소재

밀란 쿤데라의 소설 『향수』는 술을 정체성에 연결해 풀어나간 작품이다. 여주인공 이레나는 파리에서 오랜 망명 생활 뒤에 고향 체코 보헤미아를 방문한다. 옛 친구들을 위해 레스토랑에 보르도 와인을 12병이나 준비해 놓았지만 아무도 포도주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마침내 한 친구의 입에서 “나는 맥주가 더 좋아”라는 솔직한 말이 나오자 참석자들은 모두 맥주를 주문하기에 이른다.
  
맥주는 동유럽, 포도주는 서유럽 상징
 
와글와글 삽화

와글와글 삽화

“보헤미아에서는 좋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을 뿐 아니라 여간해서는 오래된 포도주를 간직하지도 않는다. 이레나는 보르도 포도주 상자를 주문해서 분별없는 행동을 저지른 것, 멍청하게도 자신과 그들을 갈라놓는 모든 차이를 드러낸 것을 자책했다.”
 
맥주는 이레나가 태어난 보헤미아 지방의 문화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반면, 포도주는 프랑스 문화를 대변한다. 맥주가 보헤미아의 ‘소박함과 진실성을 표시하는 성스러운 음료’였다면, 프랑스 포도주는 ‘유복함과 위선, 예절을 차리는 코미디’라고 고향 친구들은 받아들인 것이다. 체코에서도 포도주는 생산되지만 주로 동쪽 모라비아 지방에서 생산되고, 체코의 ‘국민 술’은 어디까지나 맥주다. 라거맥주의 상징 필스너 우르켈, 버드와이저 상표의 시초인 부드바르 등 맥주에 관한 체코인의 자부심은 결코 독일에 뒤지지 않는다.
 
“이레나는 맥주에 대한 기호를 잃어버린 것을 후회했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한 모금씩 홀짝홀짝 술을 마시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맥주를 좋아하면 으레 그렇듯이 한꺼번에 벌컥 들이키는 습관을 잃어버렸다.”
 
술로 인해 그녀는 고향에서 오히려 더 이방인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오랜 이민 생활 뒤 한국을 찾았지만 낯섦을 경험한 것과 비슷한 이치다. 서로가 무지한 탓으로, 『향수』라 번역된 이 소설의 불어 원제목도 ‘IGNORANCE’, 무시 혹은 무지라는 뜻이다. 소설 속에서 맥주와 포도주는 각각 동(東)과 서(西)를 상징한다. 유럽에서 서쪽은 민주화와 경제적 번영, 문화적 풍부함을 뜻하지만, 동쪽은 정치적 독재와 경제적 낙후 그리고 문화적 후진성을 의미한다. 프라하 지식인들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다. 쿤데라의 또 다른 소설 『느림』에서는 프랑스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한 체코 학자의 발언을 통해 이 같은 정서를 항변하고 있다.
 
“동구라 말하지 마시오. 당신도 아시다시피, 프라하는 파리만큼이나 서구적인 도시요. 카렐대학, 14세기에 설립된 이 대학은 신성로마제국 최초의 대학이었소.”
 
프라하는 분명 체코어를 쓰는 슬라브 민족이 사는 곳이지만, 지리적으로는 중부유럽에 있고 오랫동안 합스부르크 제국의 독일어 문화권에 놓여 있었다. 이 도시의 모순을 대표하는 작가가 프란츠 카프카다. 그는 프라하에서 태어난 체코인이지만 체코인이 아니었고, 유대인의 아들이지만 유대교도는 아니었고, 독일어로 글을 썼지만 독일인도 아니었다. 카렐대학 졸업생이지만 체코어가 아닌 독일어로 강의를 들었다. 『변신』 『성』 같은 작품에는 이처럼 복합적이고 모순된 이 도시의 특성이 녹아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라하는 모스크바가 주도하는 철의 장막의 일원이었다.
  
포도주는 소속감 잃은 자의 자유 영혼
 
쿤데라의 인생에는 카프카와 다른 방식으로 프라하의 모순이 녹아 있다. 좌절된 ‘프라하의 봄’ 이후 작품 출판이 금지되고 국적도 박탈당한 뒤 1975년 파리로 망명했다. 이후 그의 국적은 프랑스가 되었고, 모국어인 체코어가 아닌 불어로 작품 활동을 해왔으며, 최근에 체코 국적이 회복되어 이중국적자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무거움과 가벼움, 동과 서, 저항과 도피라는 대칭 코드를 에로틱한 언어로 묘사해 그를 일약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다니엘 데이루이스와 줄리에트 비노슈가 주연한 영화로도 인기를 끌었는데, 이 소설에서도 포도주는 종종 등장한다.
 
“그녀가 그를 두 번째 불렀을 때, 포도주와 잔 두 개가 벌써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포도주와 ‘두 개의 잔’은 규범이 아닌 유혹, 억압이 아닌 자유, 이성이 아닌 감성의 메타포다. 지성적이고 진지하면서도 에로틱한 감각을 놓치지 않는다는 데 이 소설의 매력이 있다. 각기 다른 성격의 남녀 네 명 가운데 한 명인 사비나는 미술, 자유, 도피의 코드를 대변한다.
 
“배반, 그것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선생님에게서 들어 왔다. 그런데 배반이란 무엇인가? 배반은 대열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배반은 대열에서 이탈하여 미지를 향해 출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비나는 미지를 향해 출발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했다.”
 
포도주는 쿤데라의 초기 작품 『농담』에서부터 『불멸』 『느림』 『향수』에 이르기까지 단골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데, 자유로운 영혼을 의미하기도 한다. 대열에서 빠져나와 소속감을 잃은 자에게 붉은색 포도주보다 더 좋은 친구가 있을까?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를 지낸 인문여행작가.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me,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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