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영덕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상륙작전에 투입됐던 문산호 실제 모형을 재현했다. 2020년 6월 개장했다.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해변. 1950년 9월 14∼19일 한국군 상륙 부대가 북한군과 격전을 벌인 전승지다. 지난해 이 해변 남쪽 끝에 거대한 군함이 들어섰다. 이름하여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상륙작전에 투입됐던 ‘LST 문산호’의 실제 모형을 재현한 기념관이다. 지난해 6월 5일 개장했고 11월 16일 정식 개장식을 했지만, 코로나 사태로 한두 달 문을 닫았고 홍보도 제대로 못 했다. 그럼에도 알음알음 방문한 사람이 8만8000명에 이른다(2020년 12월 31일 기준).
전승지(戰勝地)란 싸움에서 이긴 곳을 뜻한다. 과연 장사리는 승리의 현장인가. 장사 해변에 상륙한 한국군 772명 중 718명이 학도병이었다. 이들 소년은 입대한 지 18일 만에 작전에 투입됐다. 상륙작전 공식 전사자만 139명이고 부상자는 92명이다. 무엇보다 소년들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기만 작전인 줄 모르고 장사리에 상륙했다. 소년들이 동해안에 상륙한 이튿날,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그들은 인천상륙작전의 희생양이었다. 영덕군청의 관련 기록과 전승기념관의 전시자료를 토대로 장사상륙작전을 재구성했다.
명부대

영덕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 학도병 조각상 뒤로 문산호 모양의 전승기념관이 보인다.
명부대는 8월 27∼30일 경남 밀양에서 기초군사훈련을 했다. 밀양에서도 학도병을 모집했다. 명부대 대부분이 대구와 밀양의 학생인 까닭이다. 명부대는 9월 1일 부산으로 이동해 훈련을 이어갔다. 9월 10일 육군본부가 작전명령 174호를 내렸다. 주요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9월 13일 동해안 영덕지구로 상륙해 북한군 제2군단의 후방을 교란하라.’
9월 13일 오전 부산 육군본부 연병장.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신성모 국방부 장관 등 한국군 최고 수뇌부가 참석한 가운데 출정식이 열렸다. 군 최고 수뇌부가 출정식에 참석했다면 매우 중요한 작전이었을 텐데, 작전에 투입된 병력의 93%가 16∼19세 소년이었다. 소년들이 군인이었던 기간은 길어야 18일이다. 그들에겐 군번도 계급도 없었다.
상륙작전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상륙작전 현황 모형. 문산호가 좌초돼 입안하지 못하자 병사들이 나무에 줄을 묶어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갑판 위 전경. 실제 문산호를 재현했다.
자격 미달 소년들을 상륙작전에 투입한 것이 첫 번째 잘못이었다면, 현장 상황을 면밀히 살피지 않고 작전을 결행한 것이 두 번째 잘못이었다. 아니다. 어차피 소년들은 인천상륙작전의 사석(捨石)으로 투입되었다. 바둑에서 버리는 돌은 가벼워야 한다. 명부대 안에서 작전명령 174호의 진짜 목적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기만이란 걸 알고 있었던 사람은 이명흠 대위를 비롯한 극소수 간부뿐이었다.
장사리의 소년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안에 있는 전시물. 소년들이 추위와 굶주림, 공포 속에서 떨고 있는 모습이다.
부산에서 출발하기 전 명부대엔 소련제 모신나강(Mosin Nagant) 소총 한 자루와 보급품 1㎏, 미숫가루 6봉지가 배급됐다. 소련 총을 지급한 건 북한군으로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모신나강 소총은 1891년 개발된 장총으로 이후 개량된 것이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의 생존자 증언 영상.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고생은. 아무 지원도 없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어요.” “굶다시피 했죠. 식량이란 것은 얘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학도병 생존자들의 증언이다.
탈출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갑판 위에서 내려다본 장사 해변과 전승기념공원.
“5분을 시간 준다고 이러더라고. 빨리 타라고. 5분 지나니 다 안 타도 그냥 떠나버렸어.” “밧줄을 끊고 출항하니까 남아있는 사람들이 아우성치고.” “아프죠. 마음이 많이 아팠죠.” 학도병 생존자들의 증언이다.
명부대는 9월 20일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부산에서 학도병은 장사리에 상륙한 이튿날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됐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다. 10월 5일 명부대 학도병은 비로소 입대명령과 군번을 받았다.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 즉 명부대는 10월 12일부로 유격사령부 제1유격대대로 호칭이 변경됐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의 참전용사 명단. 이름 옆의 군번은 작전이 끝난 뒤 받은 것이다. 이름이 확인되지 않아 비워놓은 글자도 있다.
감췄던 역사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의 무덤. 해변에서 발견된 유해를 모아 무덤을 만들었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에는 예산 324억원이 들어갔다. 바다 위에 문산호 모형의 기념관을 지었다. 지상 5층 기념관의 1, 2층에 상륙작전 기록과 참전용사 증언 영상이 전시돼 있다(입장료 성인 3000원). 위령탑 주위로 전승기념공원도 마련됐다. 송림 안에 작은 무덤이 하나 있다. 주변에서 수거한 유해를 모아서 만든 무덤이다.

영화 '장사리 : 잊혀진 영웅들' 포스터
장사상륙작전의 공식 전사자는 139명이고 부상자는 92명이다. 그러나 전승기념공원 전시물에도 기록이 제각각이다. 희생자가 300명이 넘는다는 기록도 있다. 행방불명자 처리도 불분명하고, 탈출 작전 당시 해안에 남겨졌던 39명의 행방도 알려진 게 없다.
심지어 참전용사 명단도 부실하다. 전승기념공원 참전용사 명단을 보면 일부 글자를 비운 이름이 수두룩하다. 한 생존자는 지역방송 인터뷰에서 “전사자 가족 중 제 가족이 장사리에서 죽은 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군번도 계급도 없는 소년들이 어느 날 사지(死地)에 던져진 사건이었다. 전승기념관 생존자 영상에 정수민 참전용사가 남긴 증언을 옮긴다.
“시체 다 못 찾았어요. 여기 묻혀있는 사람들 현재 있습니다. 몇이나 묻혀있는지 모르겠어요.”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생존자 증언 영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