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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3] 무악재, 400년 전 ‘이괄의 난’ …폭설·출퇴근 땐 교통난

해발 112m. 서울 무악재의 높이다. 1000m대를 호령하는 백두대간 고개들에 비하면 ‘고작’이라는 수식어가 붙을법하다. 하지만 통일로 덕에 넓어진 제 어깨보다, 지하철 3호선에 내준 제 속살 깊이보다 더 쌓인 이야기들이 있다. 
지난 12월 21일 퇴근길 차들이 무악재에서 홍제로 넘어가고 있다. 무악재가 6차선 도로로 넓혀진 건 1966년 11월이다. 김홍준 기자

지난 12월 21일 퇴근길 차들이 무악재에서 홍제로 넘어가고 있다. 무악재가 6차선 도로로 넓혀진 건 1966년 11월이다. 김홍준 기자

서울의 고개는 230여 개. 그중 무악재를 한겨울에 들이미는 이유는, 이 계절과의 인연 혹은 악연 때문이다. 무악재는 기습 폭설이 내리면 차가 오도 가도 못하는 서울의 ‘준령’으로 꼽힌다. 11월~2월에 청나라의 말발굽에 밟혔고, 독립문 건립과 도로 확장 기념식을 지켜봤다. 고갯마루에 다리가 놓인 것도 겨울이다. 

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3 > 무악재
겨울에 얽힌 사연 많은 112m 고개
독립문 이맛돌 글씨 이완용·김가진설
1966년에 도로 폭 6m→35m 넓혀

 
무악재 서쪽의 안산 뒤로 지난해가 졌고, 동쪽의 인왕산 너머에서 새해가 떴다. 무악재는 북쪽으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이곳 독립문이 영은문을 갈음했다. 야심의 문이자 탈바꿈의 문이기도 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 야심의 문
해발 80m 독립문. 무악재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독립문은 독립협회 주도로 1897년 11월 20일 세워졌다. 이진현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사는 “독립문은 애초에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해 만들어졌고, 이후 시대 상황에 따라 독립의 대상을 달리했다”고 밝혔다. 
 1930년에 펴낸 『일본지리풍속대계(日本地理風俗大系)』에 수록된 독립문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에서는 '독립문은 청(淸)나라 사신(使臣)을 접대하던 영은문(迎恩門)과 모화관(慕華館)을 허물고, 자주독립국으로서의 면모를 선양하기 위해 세운 기념문'이라고 쓰고 있다. [사진=서울시]

1930년에 펴낸 『일본지리풍속대계(日本地理風俗大系)』에 수록된 독립문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에서는 '독립문은 청(淸)나라 사신(使臣)을 접대하던 영은문(迎恩門)과 모화관(慕華館)을 허물고, 자주독립국으로서의 면모를 선양하기 위해 세운 기념문'이라고 쓰고 있다. [사진=서울시]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은 “독립문은 남대문·동대문·경회루 등과 함께 일제 강점기에서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건물”이라고 말했다. 일제는 1928년에 거금 4100원을 들여 독립문을 수리했고, 건립 40년도 안 된 1936년에는 고적 제58호로 지정했다.

 
노 원장은 “당시 일본은 청나라를 몰아내고 한반도를 점하기 위한 야심으로 독립문을 철저히 이용했다는 게 정설”이라며 “그렇다면 당시 독립협회 회원들은 일본이 내세운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에 현혹돼, 이용당했다는 걸 미처 인지 못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독립문은 1979년 금화터널 고가에 자리를 내주고 75m 서북쪽으로 옮겼다. 독립문 사거리 한복판 지하 40cm에 ‘독립문지’라는 표시를 남겼다. 그 위를 차들이 사정없이 밟고 지나간다.
 
1979년 성산대교를 잇는 금화터널 고가 구간 공사로 독립문이 헐려 75m 서북쪽으로 이전했다. 서울시는 문화재 관계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립문을 옮기면서 그 자리에 '독립문지'란 기념 동판을 지하 40cm에 묻었다. [중앙포토]

1979년 성산대교를 잇는 금화터널 고가 구간 공사로 독립문이 헐려 75m 서북쪽으로 이전했다. 서울시는 문화재 관계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립문을 옮기면서 그 자리에 '독립문지'란 기념 동판을 지하 40cm에 묻었다. [중앙포토]

‘독립문’ 석각편액을 누가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완용(1858~1926)설과 김가진(1846~1922)설이 있다. 둘 다 당대의 명필로 꼽힌다. 1924년 7월 14일 자 동아일보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 귀족 영수 후작 각하올시다’라고 적었다. 
 
이완용은 건물의 현판 글씨를 쓰는 벼슬인 서사관(書寫官)을 지냈다. 거액(100원)의 기부금을 냈고 독립협회 위원장·회장을 지냈으며 독립문 정초식에서 연설도 했다. 김가진도 독립협회 회장을 지냈지만 ‘독립문’ 글씨를 썼다는 기록은 없고 후손들의 증언만 있다. 
 
권상호 동방문화대학원대학 교수는 “불편하지만, 당시 독립협회에서의 기여도와 서체로 보면 독립문 이맛돌 글씨를 쓴 이로는 이완용에 무게가 실린다”고 말했다. 독립문 속사정은 복잡하다. 서대문구 현저동 941번지, 독립문 아치 사이로 서대문형무소가 눈에 들어온다. 이 풍경은 독립문 건립 배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조화롭기도, 이율배반적으로도 보인다. 뒤편 벼랑에 걸친 집들처럼 아슬아슬하다.  
 1920년대 노점이 즐비한 의주로의 풍경. 멀리 독립문과 무악재가 보인다. [사진=서울시]

1920년대 노점이 즐비한 의주로의 풍경. 멀리 독립문과 무악재가 보인다. [사진=서울시]

 
‘고개 밑 동네’를 뜻하는 현저동(峴底洞)에는 1950~60년대 다닥다닥 붙은 무허가 집들이 즐비했다. 무악재에서 나고 자라, 40여 년 된 노포 ‘진미통닭’을 운영하는 박상우(74)씨는 “현저동에는 거름을 퍼가게 한 ‘똥골’이라는 곳도 있었다”고 전했다. 
 
현저동 일부였던 큰길 너머가 종로구에 편입되면서 무악동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1970년대에 재개발을 거친 현저동은 다시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안산(296m) 자락에 기대며 번성했던 다세대주택들은, 박완서 작가의 표현대로 정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무악재 바로 밑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은 현재 재개발을 놓고 시름 중이다. 고개 밑이라 해서 현저동(峴底洞)이라 이름 붙은 이곳에 대해 박완서 작가는 '집들도 층층다리처럼 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이상한 동네'라고 표현했다. 김홍준 기자

무악재 바로 밑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은 현재 재개발을 놓고 시름 중이다. 고개 밑이라 해서 현저동(峴底洞)이라 이름 붙은 이곳에 대해 박완서 작가는 '집들도 층층다리처럼 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이상한 동네'라고 표현했다. 김홍준 기자

1624년 2월, 이 안산에서 조선군 간에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의 공신 이괄(1587~1624)이 정월에 난을 일으켰다. 그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 역사는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또 다른 분석도 있다. 최동군 지우학문화연구소 대표작가는 “서인은 인조반정을 함께 한 남인을 배제하고, 실제 반정을 이끈 이괄을 견제하면서 무고(誣告)했다”며 “낮은 논공행상에도 북방을 지키던 이괄은 위협을 느끼자 난을 일으킨 것”이라고 밝혔다. 

  
이괄은 평안도 영변에서 출병, 17일 만에 한성을 점령했다. 인조반정 때 한차례 왕을 갈아치운 이괄은 다시 왕을 바꿀 야심이었다. 인조는 공주까지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신)했다. 파죽지세 이괄 반군의 운명이 갈린 곳이 이곳 무악재다. 
 
이상훈 육사 군사사학과 교수는 “무악재 아래에 있던 이괄군은 안산과 고개 위쪽의 관군만 파악하고, 신촌 쪽에서 뒤로 치고 오는 관군의 존재를 몰랐다”며 “바람도 관군이 조총과 화살을 쏘기에 유리하게 서풍으로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그 결과 “와서 전투를 구경하라”며 자신만만하던 이괄 군은, 남산에서 인왕산까지 ‘백로 떼처럼’ 모인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궤멸한다. 
인왕산(앞)과 안산 사이를 지나는 무악재. 서쪽으로 해가 지고 있다. 김홍준 기자

인왕산(앞)과 안산 사이를 지나는 무악재. 서쪽으로 해가 지고 있다. 김홍준 기자

인왕산(앞)과 안산 사이를 지나는 무악재. 박완서 작가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한국전쟁 직후 인왕산에 올라 무악재를 훤히 보는 장면을 묘사한다. 지금은 아파트에 가려져 무악재가 잘 보이지 않는다. 김홍준 기자

인왕산(앞)과 안산 사이를 지나는 무악재. 박완서 작가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한국전쟁 직후 인왕산에 올라 무악재를 훤히 보는 장면을 묘사한다. 지금은 아파트에 가려져 무악재가 잘 보이지 않는다. 김홍준 기자

이괄은 광희문과 삼전도를 통해 경기도 광주로 도주한 뒤 부하들에게 목이 베어 죽었다. 이 접전은 무악재의 다른 이름을 따 안현(鞍峴)전투로 부른다. 최 작가는 “이괄의 난은 북쪽에 거대한 전력 공백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이괄군 일부가 후금으로 피신해 조선의 병력 공백을 알려준다. 그 뒤 병자호란. 인조실록 1636년 12월 14일자는 청 군대가 양철평(현재 불광동)까지 진입하고 있음을 적고 있다. 이 교수는 “이후의 자세한 진격 루트는 기록에서 찾기 어렵지만, 청나라는 무악재를 넘어 한성을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청의 군대가 조선의 X자 모양 간선 도로망 하나인 의주로(한성~의주)를 이용했다는 말이다.
  
# 탈바꿈의 문
한성에서 의주로 향하는 첫 번째 고개가 무악재다. 1488년 한성을 찾은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은 무악재에 대해 ‘하늘이 만든 관문 하나가 삼각산을 잇대고 있으니, 말 한 필만 통할 만하여 험준하기가 더할 수 없다’고 적었다. 
1966년 11월 무악재 도로 확장 기념식이 열렸다. 고개를 3m 낮추고 측면의 암석을 10m 깎았다. 사진 중간 위로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쓴 '무악재' 기념비가 제막식을 앞두고 흰천에 가려져 있다. [중앙포토]

1966년 11월 무악재 도로 확장 기념식이 열렸다. 고개를 3m 낮추고 측면의 암석을 10m 깎았다. 사진 중간 위로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쓴 '무악재' 기념비가 제막식을 앞두고 흰천에 가려져 있다. [중앙포토]

박정희 대통령 친필로 새겨진 '무악재' 기념비. 1966년 11월 도로 확장 때 세워졌다. 김홍준 기자

박정희 대통령 친필로 새겨진 '무악재' 기념비. 1966년 11월 도로 확장 때 세워졌다. 김홍준 기자

1966년 3월 3일 자 중앙일보는 ‘영천고개(무악재)는 하루 평균 교통량 2만대에 연간 교통 증가율이 전국서 제일 높은 50%. 러시아워의 만원 버스가 안간힘을 쓰고, 트럭 두 대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형편’이라고 전한다. 같은 해 인왕산 쪽 바위 10m를 깎고, 고개를 3m 낮췄다. 도로는 6m에서 35m로 넓어졌다. 11월 22일에 넓어진 무악재 도로 개통식이 열렸다. 
 
박상우씨는 “우리 가게 앞으로 골목이 두 개 있었는데, 그게 다 헐리고 도로가 넓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쓴 '무악재' 기념비는 헐리고 금 간 상태로 고갯마루를 55년째 지키고 있다. 
1982년 4월 지하철 3호선 공사 중 발파작업에 의한 지반침하로 상수도 송수관이 터졌다. 이때 지나가던 버스가 20m 아래로 떨어져 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앙포토]

1982년 4월 지하철 3호선 공사 중 발파작업에 의한 지반침하로 상수도 송수관이 터졌다. 이때 지나가던 버스가 20m 아래로 떨어져 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앙포토]

이곳 지하철 3호선 공사는 난제 중의 난제였다. 1982년 4월 8일 발파작업을 하다 독립문역 앞 도로가 내려앉아 지나가던 버스가 20m 아래로 떨어졌다. 10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은 초대형 붕괴 사고였다. 기습 폭설에 의한 교통 마비로 종종 조명받는 곳도 무악재다. 양쪽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에 눈이 곧잘 얼기 때문이다. 1982년에는 폭설과 혹한 시 통제되는 서울 8개 도로 중 한 곳으로 무악재가 지정되기도 했다.
 
안산에서 2017년 12월에 들어선 ‘무악재 하늘다리’를 건너 인왕산. 해가 저문다. 한양도성을 따라 내려온다. ‘딜쿠샤(힌두어로 이상향을 뜻하는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의 가옥)’ 옆 연립주택 파란 대문을 만났다. 막다른 골목서 성곽길로 탈출할 수 있는, 인왕산을 찾는 이들에게는 ‘비밀의 문’이다. 
독립문 사거리의 작은 한옥 골목. 75년 째 무악재에서 살고 있는 박상욱씨는 ″한옥으로 지은 부잣집들이 이곳 행촌동과 (남쪽) 건너편 교북동에 있었다″고 말했다. 교북동 한옥 골목은 재개발로 사라졌다. 김홍준 기자

독립문 사거리의 작은 한옥 골목. 75년 째 무악재에서 살고 있는 박상욱씨는 ″한옥으로 지은 부잣집들이 이곳 행촌동과 (남쪽) 건너편 교북동에 있었다″고 말했다. 교북동 한옥 골목은 재개발로 사라졌다. 김홍준 기자

무악동으로 내려섰다. 일제 강점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이들에게 온기를 전해주던 ‘옥바라지 골목’은 흔적이 없다. 번듯한 주상복합 건물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이보다 남쪽, 행촌동 양잠소가 있던 대신고 옆에 기와집 몇 채가 남아있다. 서쪽 바로 건너편이 독립문이다. 독립문에서 출발해 행촌동이니, 고개 밑에서 고개 밑으로 U턴한 것이다. 주상복합 건물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간다. 이 문, 무악재에 앞으로 펼쳐질 또 다른 ‘문’일까.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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