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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죽을 게 아니라면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여러분, X됐습니다.
 

희망 거론조차 조심스러운 새해
고통 감추는 막연한 낙관 버리고
현실 응시해야 진짜 희망 열린다

더 센 놈이 옵니다. 김현미 다음 변창흠, 추미애 다음 박범계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국발 변이 코로나 말입니다. 감염력이 70%나 높다고 합니다. 이놈이 아니더라도 방역의 댐이 허물어질 위기인데, 이제 ‘변이 팬데믹’을 걱정해야 할 지경입니다.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면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는 새해 희망에도 물음표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언제 들어온다는지 알 수 없는 백신은 희망고문만 더하는 느낌입니다. 이르면 2월 국내 접종이 가능하다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영국 정부의 승인에도 불안합니다. 미국·EU조차 아직 신뢰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긴 터널의 끝이 보인다”는 우리 대통령의 말보다는 “아직 최악이 오지 않았다”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말이 더 솔직해 보입니다.
 
죄송합니다. 새해 벽두 글머리를 쌍스러운 욕으로 시작하다니요. 사실 흉내 좀 내봤습니다. 배우 로버트 드니로가 2015년 뉴욕대 티시예술대 졸업생들 앞에서 했던 축사 말입니다. 드니로는 ‘당신들은 해냈습니다’란 첫마디 다음 곧장 욕(and you’re fucked)을 이었습니다. 열정 하나로 졸업장을 딴 예술인을 기다리는 차가운 현실을 지적했습니다. 오디션 등에서 거절당하는 게 일상이 될 삶 말입니다. 그의 욕은 뻔한 희망 이야기보다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유머 속에 100% 공감이 담겼습니다.
 
‘F 워드’ 쌍욕으로 시작하는 작품이 또 있습니다. 소설 ‘마션’ 입니다. 영화로 보신 분도 많겠지만 화성에서 낙오된 한 탐사대원의 생환기입니다. 최근 케이블TV에서 다시 보면서 새삼 꽂혔습니다. 홀로 버려진 주인공 앞의 황량하고 붉은 화성 벌판이 코로나19가 만든 기괴한 세상과 닮았습니다.
 
소설의 첫 문장은 “아무래도 X됐다(I am pretty much fucked)”입니다. 점잖지 못한 시작이지만 작품은 유쾌합니다. 억지스럽게 희망을 길어올리지도 않습니다. 그저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갈 뿐입니다. 우주선 연료를 태워 수소와 산소를 합성하는 방법으로 물을 만들고, 대원들이 남기고 간 인분을 화성 흙에 섞어 감자를 키우고, 십수 년 전 버려진 무인 탐사선(패스파인더)을 찾아내 지구와 통신하고…. 생존의 무기는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냉철한 과학이었습니다. 지구로 돌아온 주인공은 후배 우주 탐사대원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그곳에서 죽을 게 아니라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문제가 생기면 또 해결하라.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지구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감히 희망을 이야기하기 힘든 겨울입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입니다. 고단한 1년을 간신히 버텨왔지만 앞으로 펼쳐질 시간은 더 엄혹할지 모릅니다. 근거 없이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곧 풀려날 것이라는 기대로 버텼다가 좌절한 포로들이 처음부터 그런 기대조차 갖지 않은 포로보다 더 일찍 죽었다는 베트남전 미군 이야기 말입니다. 더구나 그 희망이 아직도 K방역을 들먹이며 자기 자랑에 바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다면 더 의심해 봐야 합니다. 정부는 막연한 낙관 대신 명확한 계획을 국민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방역 비판을 정치 공격으로 여긴다면 정말이지 희망이 없습니다. 안 그래도 과학이 아니라 종교로 문제를 풀려는 사람들 때문에 질렸던 지난해였습니다.
 
과학이 답이라면, 연대는 힘입니다. 방역 수칙을 지키는 것은 K방역의 자부심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이웃의 삶을 위해서입니다. 영화 ‘마션’의 배경 음악 중 하나가 스웨덴 그룹 아바가 부른 ‘워털루’입니다. “워털루-도망치고 싶지만 그럴 순 없어. 워털루-내 운명은 너와 함께라는 걸 알아.”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필요한 건 희망입니다.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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