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헬렌 레디, 숀 코너리, 알렉스 트레벡, 커크 더글라스,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마라도나, 존 르 카레.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죽음이 삶에 성큼 다가온 2020년, 세계의 많은 스타들도 유명을 달리했다. 여론의 뜨거운 주목을 받은 이들도 있지만 팬데믹의 혼란 속에서 조용히 떠나간 이들도 많다. 뉴욕타임스(NYT)ㆍ워싱턴포스트(WP)ㆍ이코노미스트 및 자서전 등을 종합해 10인의 부음을 전한다.

밀턴 글레이저.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글레이저를 모를 수는 있지만 그가 디자인한 이 로고를 모를 순 없다. ‘I♡NY.’

지난 8월 뉴욕의 한 전시장에 설치된 'I♡NY' 대형 로고. 로이터=연합뉴스
뉴욕시 브롱크스에서 나고 자란 글레이저는 봉사하는 마음으로 비용을 받지 않고 무료로 작업했다. 그 공로로 2010년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에게 훈장을 받기도 했다. 영감을 어떻게 받았는지에 대해 글레이저는 생전 인터뷰에서 “당시엔 사람들이 ‘난 OO를 사랑해’라는 말을 하는 게 유행이었고, 그걸 적용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뉴욕 로고로 가장 유명하긴 했지만 글레이저는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디자이너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밥 딜런의 앨범 작업으로 두각을 나타낸 그는 반(反) 엘리트주의를 표방하며 사회 문제에도 적극 목소리를 냈다. 그는 자서전 『불찬성의 디자인』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은 곧 좋은 시민의 역할과 같다”며 “민주주의에 참여하고, 시대의 소명을 인식하고 이를 행하고 의견을 피력하는 것, 그게 좋은 디자이너”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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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 여사는 검은 색 마스크를 착용했는데, 이는 애도의 뜻뿐 아니라 그레코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기도 했다. 그레코는 항상 검은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라 ‘검은 새’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레코의 어린 시절은 평탄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와중 독일군에 저항한 프랑스 레지스탕스 소속이었던 모친을 전쟁 중에 잃고 파리로 상경했다. 일찌감치 노래를 시작했고, 그레코의 어둡고 굵으면서 흡입력 있는 목소리로 두각을 나타냈다. 곧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느 보봐르 등 유명 작가와 장 콕토 등 영화감독과 친분을 쌓았다.
그가 즐겨 불렀던 노래 ‘파리의 하늘 아래’ 가사 중 일부는 아래와 같다. “파리의 하늘 아래, 노래들은 새처럼 날아다니지 (중략) 노트르담 성당 가까이에선 비극도 자주 일어나지만, 파리에 남는 건 희극뿐이지. 모든 건 잘 해결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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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소비에트연방 간의 냉전이 한창이던 때 정보 요원으로 재직하면서 1959년 데뷔작 『죽음의 유혹』을 냈다. 이후 1963년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로 이름을 알린 뒤 1964년부터 전업 작가로 생활했다. 현업에서 쌓은 디테일로 스파이 소설의 새로운 장을 개척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영국인 특유의 유머 감각도 발휘한 그는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자서전을 쓸 계획이 있냐는 질문을 받고 “끔찍한 일”이라며 “무슨 허구의 거짓말로 자서전을 꾸밀지가 벌써 떠오른다”고 눙쳤다. 아무도 그를 모르는 영국 시골에 별장을 짓고 글을 쓰는 걸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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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는 호주에서 연예계에 종사하는 부모 슬하에서 자라며 4살 때부터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심리학을 전공하다 본격 가수의 길을 걸었다. 당시 페미니즘 운동에 동조한 레디가 공동 작곡한 노래가 ‘나는 여자다’라고 한다. 그는 당시 빌보드북에 “여성 운동을 하면서 여성들에 대한 긍정적이고 힘찬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찾아봤는데 없더라”며 “그래서 내가 직접 썼다”고 말했다.
시카고 트리뷴은 그를 “70년대 팝의 여왕”이라 불렀고, 빌보드지는 그를 2011년 “가장 영향력 있는 남녀 가수 100명 중 28위”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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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벡은 특유의 차분함과 지적인 이미지로 ‘제퍼디!’의 간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역사부터 천문학까지 다양한 소재의 지식을 다루는 이 프로그램의 책임 프로듀서인 마이크 리처드는 CNN에 "트레벡은 곧 우리 프로그램의 얼굴이자 동의어였다"고 추모했다.
캐나다 출신으로 오타와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에서 토론 동아리를 하며 방송 진행자로서의 꿈을 키웠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와 NBCㆍCBS에서 커리어를 쌓다 ‘제퍼디!’에 낙점됐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난 평생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며 살아왔는데 아직도 성취는 멀었다”면서도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죽을 때조차 답을 구하지 못하는 게 인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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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타계 직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보수 성향 앤 배럿을 후임으로 지명하면서 미국 정계에도 파장이 일었다. 긴즈버그는 이념의 대척점에 서있던 보수성향 대법관 앤터닌 스칼리아와는 절친한 사이를 유지했다. 오페라에도 일가견이 있던 긴즈버그를 기린 작품으로 ‘스칼리아/긴즈버그’가 쓰여졌을 정도다. 그가 차별에 맞서며 외쳤던 ‘나는 반대한다’는 그의 생애를 다룬 저작과 영화의 제목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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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가 낳은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 평생 500편 넘는 영화의 음악을 작곡한 그는 7월 5일 92세를 일기로 천국으로 떠났다. 그가 참여한 영화는 눈으로 보는 영화를 뛰어넘었다. 그는 영화에 소리로 색을 입히는 마술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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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na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