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복지정책의 확대와 일탈의 유혹
선한 의도만으로 면책되지 않아
정치혁명보다 어려운 정책혁신
정치관료보다 프로 정책전문가를
한때 저소득층 노인들과 결식청소년들을 위해 정부가 음식점이나 편의점에서 쓸 수 있는 쿠폰을 나누어준 적이 있다. 좋은 정책 의도였지만 결과는 달랐다. 결식청소년들이 식당에서 쿠폰 내는 것을 창피해하고, 노인들은 이동이 불편하여 쿠폰 활용이 어려웠다. 대신 이들이 쿠폰을 모아 할인해 팔기도 하고, 편의점에서 술이나 담배를 사기도 했다. 이 문제점을 민간단체인 행복나눔재단이 풀었다. 결식청소년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에게 쿠폰 대신 행복도시락을 직접 배달하는 것이었다. 도시락 업체도 사회적 기업이 하도록 지원했다. 현재 행복나눔재단은 1년에 400만개 가까운 행복도시락 배달을 지원하고 있다.
정책은 의도 못지않게 결과가 중요하다. 외교정책 분야의 석학인 조지프 나이(Joseph S. Nye) 하버드대 명예교수가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도덕의 중요성을 분석한 책 『Do Morals Matter?』을 올봄에 출간했다. 흔히 외교정책은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보지만 도덕이 매우 중요했다고 분석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도덕도 단순히 정책 의도만이 아니라 정책수단과 결과까지 도덕적이어야 좋은 정책이라는 다층적 분석을 제시했다.
1996년 대학설립준칙주의는 대학입학의 문을 넓혀주고 지방대학을 육성하자는 좋은 정책 의도를 갖고 시작됐다. 그런데 1996년은 1년에 백만명이 넘던 출생아 수가 60만명대로 떨어지는 저출산 추세가 시작된 해이다. 그런데도 대학설립준칙주의 정책이 추진된 이유는 무엇일까? 정책집행과정에서 국회의원들은 지역구 대학유치에 앞장섰고, 교육부 고위관료들은 신설된 지방대학 총장으로 선임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때 지방대학 8곳의 총장이 교육부 전직 관료들로 채워졌다. 이제 대입지원자수가 2019년 53만명에서 2024년 37만명으로 급감하여 대학들의 폐교가 눈앞에 있다. 20여 년 전 대학설립준칙주의를 내세워 대학설립에 앞장섰던 당시 정치인과 관료들은 정책수단이나 정책 결과에 대한 정책실패의 도덕적 책임을 자인해야 한다.
선한 정책 의도만으로 모든 것이 면책되지는 않는다. 정책 결과가 나쁘면 아무리 좋은 정책 의도라도 정책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무능함의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엄청나게 확대되는 복지예산의 좋은 정책 의도가 집행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비효율과 나쁜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지 꼼꼼히 챙겨야 한다.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는 좋은 정책 의도가 인국공 사태를 야기했고, 대학 강사들을 보호한다는 좋은 정책 의도가 시간 강사들을 대학에서 퇴출시키는 정책 결과를 낳았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도 선한 의도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시장의 균형상태를 인위적으로 깨트리는 정책 수단은 잘못되었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국가를 만들겠다고 덤벼든 오만한 정책 운영이 결과적으로 부동산 가격 폭등과 전세대란과 징벌적 세금징수라는 고통을 많은 국민에게 안겨주고 있다. 자연상태로 물이 흐르는 것을 인위적으로 막아 환경을 파괴했다고 이명박 정부의 4대강사업을 극렬하게 비난했지만 부동산 시장에서 돈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을 인위적으로 막아보겠다는 이번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부동산 4대강사업’이 되었다.
정책은 현실을 반영한 철저한 기획과 결과에 대한 치밀한 시뮬레이션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정치관료를 배제해야 하고 프로페셔널한 정책전문가가 정책을 담당해야 한다. 선의만 갖고 덤벼드는 정책 운영의 무능함은 차라리 정책 집행을 시작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이 정부가 정책 혁신이 정치 혁명보다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했으면 좋겠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