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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단의 테러리스트’ 황창배, 요리도 ‘카레 된장찌개’ 파격

예술가의 한끼

황창배의 ‘무제’, 한지에 혼합재료, 144x100㎝, 1990년. [사진 황창배미술관]

황창배의 ‘무제’, 한지에 혼합재료, 144x100㎝, 1990년. [사진 황창배미술관]

그림이든 인생이든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 미술계의 걸물 황창배의 지론이었다. 그가 나타나면 아무리 우울한 좌중이더라도 금방 웃음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국 화단에서 황창배(1947~2001)만큼 다양한 활동을 한 미술가도 드물다. 신이 여러 사람에게 고루고루 재능을 나누어 주지 않고 한 사람에게 몰아서 줄 때가 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황창배다.
 

동양화 틀 깬 자유분방 화풍
실험적인 요리, 그림 빼닮아

운동 만능에 연극 출연·연출
소고기 소금구이와 회를 즐겨

전각 스승 이기우 딸과 결혼
연애 땐 멕시칸 사라다에 와인

황창배는 1966년 연건동 캠퍼스의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다. 당시의 서울대 미대는 회화과(동양화·서양화), 조소과, 응용미술과를 다 합쳐 한 학년이 70명에 불과했다. 황창배의 입학동기생 중에 남학생은 21명밖에 되질 않았다. 단과대학 체육대회가 열리면 숫자가 적은 미술대학 남학생은 거의 모든 종목에 출전하는 만능선수가 되어야만 했다. 여기서 발군은 황창배였다.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미식축구까지 했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ROTC 군복무 ‘괘씸죄’로 소위 제대    
 
화단의 테러리스트로 불린 황창배. [사진 황창배미술관]

화단의 테러리스트로 불린 황창배. [사진 황창배미술관]

비슷한 시기를 함께 다닌 서울대 미대생들에게 황창배는 연극인으로 기억된다. 66년 서양화 전공의 최종률(1947~)과 황창배, 신입생 둘이서 미대 연극반을 만들었다. 이 둘은 마치 연극을 하러 대학에 입학한 사람인 듯 잇달아 여러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미대 연극반 창립공연이 66년 11월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열렸다. 장 아누이 작의 앙띠고느였다. 여기서 황창배는 해설자로 무대에 등장했다. 굵은 목소리가 압도적이었다. 67년 5월 미대 연극반 제2회 공연이 미대 근처 동숭동 문리대 시청각실에서 열렸다. 레온카발로 작의 팔리앗치였다. 황창배는 연출과 주인공을 맡았다.
 
그해 12월 입센의 ‘인형의 집’을 공연했다. 68년 5월에는 서로이언 작의 ‘혈거부족’에서 황창배는 대왕 역을 맡았다. 6월에는 미대 살롱 드라마에서 이근삼 작의 원고지를 연출했다. 10월에는 미대 정기공연에서 안네 프랑크 작의 ‘안네의 일기’(박정기 연출)에 출연했다. 69년 5월에는 보르헤트 작의 ‘문 밖에서’(박정기 연출)를, 7월에는 압슈타인 작의 ‘송금’(황창배 연출)을, 10월에는 버나드 쇼의 ‘악마의 제자’(장소현 연출)를 공연했다. 12월 말에 드라마센터에서 서울대 총연극회 정기공연이 열렸다. 도스토옙스키 작 엘베르 카뮈 각색의 ‘악령’이었다. 문리대의 심양홍이 주도했는데 미대에서는 황창배, 박영욱 등이 출연했다.
 
황창배 주변에는 친구들이 들끓었다. 서울대 미대에서 가까운 동대문 창신동이 본가였다. 부친은 한의사였다. 친구들이 몰려가면 어머니께서 밥을 지어 주셨다. 연극반은 황창배 등의 맹활약으로 미대학생들의 중심적인 동아리가 됐다.
 
프로필이 섬세했던 민정기, 근육질의 임옥상, 대부의 말론 브랜도의 대사를 입에 달고 다니던 황창배의 경복고 후배 황인기, 가수 현경과 영애의 박영애, 가수 김민기 등 재기발랄한 동기들과 후배들이 미대 연극반에서 활동했다.
 
연극 ‘혈거부족’에서 대왕 역을 맡은 황창배(가운데), 1968년 5월. [사진 황창배미술관]

연극 ‘혈거부족’에서 대왕 역을 맡은 황창배(가운데), 1968년 5월. [사진 황창배미술관]

3학년 겨울방학 때 황창배는 조소과의 최인수 등 동기 5인과 함께 용산역을 출발해 경주로 고적답사를 떠났다. 몰골은 빛나는 청춘이나 행색은 무일푼이었다. 청년 화학도(畵學徒)들에게 경주는 별천지였다. 그리스 미술의 본령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이 먼 곳 석굴암까지 와 있었다. 벅찬 감동에 흥분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겨울 불국사 앞의 텅 빈 여관을 찾아 비현실적인 싸구려 가격으로 숙박을 협상하는 일도, 버스비 대신 노래로 퉁 치자고 차장 아가씨를 설득하는 일도 인물이 훤한 데다 붙임성이 좋은 황창배의 몫이었다. ‘앞마을에 순이 뒷마을에 용팔이 열일곱 열아홉 처녀총각’으로 시작하는 서울대 미대 용팔이들의 합창이 시골 버스 안에서 울려 퍼지면 차장 아가씨는 앞마을 순이가 된 양 얼굴을 붉혔다. 결국 차비는 공짜.
 
ROTC 장교로 복무할 때도 군대에서 연극 연출을 했다. 상관이 연출에 간섭했는데 황창배가 말을 듣지 않았다. 괘씸죄로 진급을 못 했다. 그 덕에 남들은 다 중위로 제대하는 ROTC 장교를 황창배는 소위로 제대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극단 가교에서 활동했다. 연극과 미술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는 미술로 마음을 굳히고 73년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해 12월 미대 정기공연의 ‘신의 기실’이란 작품에 연출을 맡았다. 장교용 트렌치코트를 입고 나타나 후배들을 지도했다. 그의 마지막 연극 활동이었다.
 
황창배의 전각 ‘붓이 그림을 끌고 다 니는구나’. [사진 황창배미술관]

황창배의 전각 ‘붓이 그림을 끌고 다 니는구나’. [사진 황창배미술관]

이 무렵 황창배는 서예가 철농 이기우로부터 전각을 공부했다. 철농의 집은 낙원상가 아파트였다. 철농에게는 이화여대 재학생인 딸 이재온(현 황창배미술관 관장)이 있었다. 둘의 눈맞춤도 은근했지만 철농의 부인이 티가 나게 황창배를 챙겼다. 데이트 장소는 명동 오비스캐빈이었다. 홍민, 장현, 양희은 등이 무대에서 연주하는 노래를 들으며 ‘멕시칸 사라다’에 애플와인을 마시면 최고의 호사였다. 황창배는 길을 걸으며 ‘두 개의 작은 별’이란 노래를 미래의 부인에게 가르쳤다. 이 둘은 75년에 결혼했다.  
 
황창배는 74년부터 82년까지 명지전문대에서 근무했다. 학교에서 짜장면을 배달시키면 군만두에 고량주 한 병을 잊지 않았다. 연구실에는 늘 오이며 고추장을 갖다 놓았다. 542번 버스를 타고 신촌으로 나와 같은 학교 교수인 대학동기 최인수와 함께 저녁을 하곤 했다. 월급을 타면 우선 외상값을 갚고 부인과 함께 방산시장의 실비집에 가서 소고기 소금구이를 먹었다. 광장시장의 횟집도 즐겨 찾았다. 진로가 만든 화이트 와인 샤토 몽블르의 광고에는 탤런트가 아닌 화가 황창배가 모델로 등장했다. 실력과 쇼맨십을 겸비한 황창배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경희대를 거쳐 이화여대 교수로 있다가 91년 학교를 그만두었다.
 
황창배는 요리만큼이나 주방기구에도 관심이 많았다. 백화점에 가면 꼭 주방기구 코너에 가서 서성거렸다. 그릇 사는 걸 좋아했다. 부인이 그럴듯한 프라이팬이나 냄비를 사면 탐을 내어서 작업실로 가져갔다. 볶음요리를 할 때는 소금을 골고루 치는 게 아니라 어떤 곳은 많이, 어떤 곳은 아주 적게 친다. 그래야 하나의 요리에서 다양한 느낌의 맛을 즐길 수 있다는 게 황창배의 지론이었다. 심지어 된장찌개에 카레를 넣으면 어떨까도 실험해 본다. 다 된 요리는 큰 그릇에다 깻잎을 깔아 장식한 다음 먹음직스럽게 플레이팅을 한다. 항아리를 땅속 깊이 묻고 동치미를 담그기도 했다. 요리의 방식과 배치 그리고 실험정신이 황창배의 그림을 똑 닮았다. 자신이 한 음식을 맛있다고 하면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80년대가 되자 황창배 신드롬이 일었다. 그는 화단의 스타이자 테러리스트였다. 오랫동안 지탱해 오던 동양화의 틀이 황창배에 의해 하나둘 깨져 갔다. 그때만 해도 서양화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아크릴물감을 황창배는 거리낌 없이 썼다. 동양화의 필수인 하도(下圖)를 무시하고 캔버스 위에 얹힌 재료들의 물성에 배인 그림의 진상(眞相)을 손과 붓의 자유자재한 운용에 의해 화면 위로 즉발적으로 드러나게 하였다.
 
황창배는 기본기가 탄탄한 화가였다. 일필휘지로 대상의 본질을 잡아내는 그의 데생 실력은 미대 동기생들을 절망에 빠트리게 할 정도였다. 누구보다 격을 갖춘 그였기에 파격으로 나아갈 수가 있었다. 마침 민화의 재발견 열풍과 맞물려 자유분방한 그의 그림은 후학들의 새로운 길잡이가 돼 주었다.
  
1997년엔 분단 후 화가 첫 방북도
 
97년에는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북한문화유산 조사단’ 단원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보름간 평양 일대와 개성, 구월산, 일대를 답사했다. 황해도 정방산에 올라선 일망무제로 펼쳐진 재령평야를 그렸다. 남북분단 후 남한의 화가가 북한을 방문해 그림을 그린 건 황창배가 처음이었다. 현장에서 소품으로 제작한 것, 돌아와서 나중에 제작한 그림들을 모아서 이듬해 선화랑에서 전시했다. 반향이 컸다. 많은 실험과 가능성을 남기고 2001년에 졸했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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