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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한양도성

강기헌 산업1팀 기자

강기헌 산업1팀 기자

문명은 석공의 손에 빚을 지고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가 대표적이다. 조선의 시작을 알린 것도 그들이었다. 18.6㎞에 이르는 한양도성도 석공의 작품이다. 서울시는 지난 12일 남산 회현자락 한양도성 유적을 시민들에게 공개한다고 밝혔다. 100여년 동안 땅속에 묻혀 사라진 줄 알았던 도성의 일부다. 이번에 공개하는 유적은 조선 건국 초기인 1396년 쌓은 것이다.
 
조선의 왕들에게 도성 정비는 중요한 과제였다. 태조·세종·숙종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진행했는데 성돌 모양으로 축조 시기를 구분할 수도 있다. 도성이 축성된 태조 때의 성돌은 거칠다. 수도 한양과 궁궐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는 작업이 속도전으로 이뤄져서다. 두 번째 토목공사는 세종 4년(1422년)에 진행됐다. 성의 견고함을 유지하기 위해 바닥에 큰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 올렸다. 기초를 튼튼히 한 것이다. 그 위로 둥글둥글한 작은 돌을 켜켜이 쌓아 올렸다. 세종은 태조 때 썼던 성돌을 재활용했다. 아버지 태종이 숨지고 4년 만에 모든 권력을 손에 쥔 세종은 도성 보수를 위해 전국에서 32만 명을 동원했다. 태조 때 동원된 인부(11만명)의 3배에 이른다.
 
임진왜란 이후인 숙종 30년(1704년)에 재정비한 성돌은 정사각형이다. 세종 때와 비교하면 성돌의 크기가 커졌다. 성인 4명이 들어야 할 정도로 무겁다. 왜란의 기억이 성돌을 키웠다.
 
서울시가 유적을 공개한 한양도성 남산구간(4.2㎞)은 아픈 손가락이다. 남산구간을 따라서 걷다 보면 아쉬움이 크다. 여장(女墻) 대부분이 콘크리트와 돌로 만들어졌다. 그만큼 유실된 곳이 많다. 남산지구와 장충지구 성벽 2.6㎞는 1970년대 복원 사업이 진행됐는데 남산3호터널 공사장에서 나온 석재 7000㎥를 사용했다.
 
한양도성은 자유총연맹·타워호텔(현 반얀트리)로 연결되지만 이곳에 도성은 없다. 한양도성 성돌 일부가 자유센터와 타워호텔 축대로 쓰였다. 두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 한양도성 일부를 헐어내고 여기에서 나온 성돌을 축대에 사용했다는 사실이 2007년 문화재청 조사에서 밝혀졌다. 김수근이 의도적으로 도성을 훼손한 것일까. 확인된 건 없다. 역사는 세월 순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한양도성이 던지는 질문은 가볍지 않다.
 
강기헌 산업1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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