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악산 북측면 개방…’김신조 루트’ 가보니
1968년 1월 공비 31명 30㎏씩 무장
임진강-파평산-삼봉산-노고산-북한산
시속 10㎞로 이동, 청와대 턱밑 침투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사건' 이후 52년 만인 2020년 11월 1일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된 북악산 곡장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양도성. 김홍준 기자

장홍근 중앙일보 기자가 1968년 1월 22일 새벽 홍제파출소에서 찍은 김신조 모습. 장 기자는 검열에 대비해 사진 몇 장을 찍고 파출소를 재빨리 빠져나갔다. 장홍근 기자
북악산 새 길이 소문을 타고 떴다. 김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북악산이 아름다운 곳인데, 늘 미안한 마음이었고 뒤늦게 시민의 품으로 돌아와 다행”이라고 말했다. ‘김신조 루트’는 북악산에서 북쪽으로 약 39km 떨어진 곳에서 시작한다. 차로 3시간 거리를, 31명의 무장 공비들은 4박5일에 걸쳐 침투했다. 김 목사와의 인터뷰를 곁들여,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1·21 사태 1년 전인 67년에 몇 개의 징후가 보였다. 북한은 그해 1월,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겨울에 휴전선을 통해 간첩을 남파했다. 눈에 발자국이 남을 수 있어 꺼리던 방식이었다. 또 8월에 민족보위성 정찰국 직속의 대남공작 특수부대 ‘124군 부대’를 창설했다. 4월, 8월에는 북한군이 한국군과 미군을 습격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를 통해 북한의 게릴라식 동계 작전을 예상했다. 68년 1월 6일 박 대통령은 ‘대간첩 비상치안회의’에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1월 17일 오후 10시, 북한 124군 소속 31명이 군사분계선 철조망을 절단하고 남측으로 넘어왔다. 경기도 연천 고랑포에서 10㎞를 앉은걸음·포복·정지·은폐를 반복하며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넜다. 고랑포 지역은 임진강이 얼어붙는 최적의 침투 코스였다. 그들이 입은 카키색 한국군 복장에는 26사단 표식이 붙었다. 각자 개머리판을 접을 수 있는 소총과 실탄 300발, 수류탄 등으로 무장했다. 이들의 당시 모습은 서울 종로 경찰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그들은 기자가 찾았을 때 사람 한 명 보지 못했을 만큼, 현재도 적막한 파평산(496m)을 지나갔다.

파평산은 김신조 일행이1968년 1월 17~18일 임진강을 건넌 뒤 처음 지난 산이다. 김홍준 기자
19일 밤 고령산 앵무봉(622m)을 통과, 양주 노고산을 거쳐 북한산에 다다랐다. 21일 밤으로 잡힌 청와대 타격과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위해 그들은 30㎏ 군장을 찬 채 시속 10㎞의 초인적 속도를 냈다.

1968년 1월 17일 북한 124군 소속 31명은 임진강을 건너 20일 이곳 북한산 진관사에 이르렀을 때 지도에 없는 절이 눈앞에 나타나자 당황했다. 그들은 사진 왼쪽으로 난 계곡을 따라 사모바위 쪽으로 이동했다. 김홍준 기자
1011년 세워진 진관사는 한국전쟁의 포화에 스러졌다. 마침 진관사는 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재건 공사 중이었다. 이 때문에 진관사는 이들이 갖고 있던 한국전쟁 당시를 기준으로 만든 지도에 누락됐을 가능성이 크다. 김 목사는 “진관사에 대해서는 북에서 전혀 교육을 못 받았고, 진관사에서 개가 짖어대 위치가 노출될 것 같아 모두 불안해했다”고 밝혔다.

북한산 비봉 능선 상의 사모바위(왼쪽)와 비봉(오른쪽 튀어나온 바위)는 1968년 1월 20일~21일 북한 124군 소속 31명이 지난 곳이다. 그들은 비봉 밑의 승가사를 거쳐 세검정, 자하문 고개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며 사모바위 뒤로 보이는 북악산 등으로 도주했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사모바위 밑에 설치된 북한 124군 부대원 마네킹. 이들 31명은 임진강을 건너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뒤편까지 진출해 군경과 총격전을 벌였다. 김홍준 기자
20일 오후 2시, 국방부는 송추 부근에서 북한 특수부대의 유실물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서울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잘 걸리지 않던 감기를 앓았다. 21일 오후 9시 30분, 북 특수부대원들은 무기를 휴대한 채 세검정으로 내려섰다. 상명대 삼거리를 지나 창의문(자하문) 고개에 다다랐다. 김씨는 “당시 남한의 경찰이나 군인을 겁내지 않았다”고 밝힐 정도로 31명은 자신만만했다. 경찰이 검문을 했다. 옥신각신하다 종로경찰서장인 최규식이 그들의 총탄에 쓰러졌다. 오후 10시 쯤이었다. 김신조는 경복고 후문으로 뛰었다. 다른 대원들도 세검정, 북악산 등으로 흩어졌다.
김씨는 “이미 우씨 4형제를 놔주고 나서 실패를 직감했다. 난 미리 도주로를 북한과 가까운 북쪽의 북악산이 아닌, 반대편인 남쪽으로 잡아놓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만약 내가 북악산으로 향했다면 분명 지금 이렇게 인터뷰조차 못하고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북악산의 호경암과 1·21 소나무에는 교전 흔적이 남아있다. 세검정에서 붙잡힌 김씨는 “생포 당한 게 아니라, 투항했다”고 줄곧 말해왔다. 기자가 ‘체포’라고 말하자 ‘투항’이라고 고쳐 주기도 했다. 그는 “당시 나이가 27살이었는데, 살고 싶은 마음이 오더라”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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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앙일보 손석주 사회부 기자와 장홍근 사진부 기자는 홍제파출소로 연행된 김씨를 인터뷰하는 특종을 터뜨렸다. 손 기자가 “왜 왔나”고 묻자 김씨는 “청와대를 까러 왔다”고 대답했다. 장홍근 기자는 사진을 찍고 바로 파출소 밖으로 나갔다. 군경에 필름을 뺏길 것을 염려해서였다.
![김신조(맨 왼쪽)가 군경에의해 사살된 무장공비 시체를 확인하고 있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011/16/fdf2e3d3-0ae9-45ab-a8bc-f7101c4c1cc5.jpg)
김신조(맨 왼쪽)가 군경에의해 사살된 무장공비 시체를 확인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신조를 비롯한 31명의 북한 공작원 중 일부가 1968년 1월 21일 북악산에서 군경과 교전을 벌였다. 북악산의 이 소나무는 당시 15개의 총알이 박혀, '1·21 소나무'라고 부른다. 김홍준 기자
하지만 김 목사는 “그때 함께 내려온 사람인 것 같은데, 확실치 않아서 확인을 요청한 정부 관계자에게 그 사람이라고 단언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북한 소식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박재경은 총정치국 부총국장을 끝으로 활동이 뜸한데, 지난해 5월 반제노병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 받고 노병 관련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1월 10일 북악산 청운대 입구 철문을 통해 들어오는 탐방객들. 사진 오른쪽 위는 1968년 '김신조 사건' 이후 52년 만인 2020년 11월 1일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된 곡장 전망대이고 뒤에 보이는 산은 김신조 일행이 이곳에 오기 전 넘어온 북한산이다. 김홍준 기자
![김신조 목사가 지난 8월 실미도 부대와 관련해 진행된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1968년 1월 21일의 청와대 습격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011/16/38f1d189-1550-4f9a-97bc-a9c3cd7a30c2.jpg)
김신조 목사가 지난 8월 실미도 부대와 관련해 진행된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1968년 1월 21일의 청와대 습격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