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길들여지기 강요하는 사육사회
궤변은 정의의 언어로 둔갑하고
586세력은 무오류로 신화화하는
그들만의 신세계는 어디로 가나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는 ‘피해 호소인’이 있다고 주장하니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집단학습 기회”(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가 맞고, 8·15 광복절 집회 주동자는 코로나19 방역을 망치려는 “살인자”(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라고 욕해도 싸다. 전·월세 대란과 집값 폭등은 가짜뉴스이며, 월성 1호기 원전·라임과 옵티머스 펀드 사기·울산시장 선거 개입 등 정권의 구린내 나는 의혹을 파헤치는 건 죄다 정치적 수사다. 윤석열 검찰총장을 내쫓아야 검찰 개혁이 완성되니 추미애 법무장관의 광인전략을 이해해주자. “문재인 정부에선 권력형 비리가 없어졌다”고 하니 세종에 비견되고, 그 세종을 상대하는 독재자는 계몽군주로 대접할 만하다.
처음엔 말장난으로 들리던 이런 뻔뻔하고 파렴치한 언어유희에 어느덧 동화되고 있다. 나치의 히틀러는 “끊임없는 반복만이 군중의 기억 속에 개념을 심어준다”며 선전선동을 독려했다. 눈 뜨면 식언과 망언을 반복해 듣도록 정신적 고문을 가하면 결국 진실로 착각하는 학습효과가 발생한다. 우리의 양심과 상식이 퇴화하고 있는지 다들 의심해야 한다.
586운동권은 무오류라는 허구를 믿으라는 신화 사육도 당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족반역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문 대통령)다. 3만 달러 시대를 위해 땀 흘린 경제 현장의 사람들은 민주화에 기여한 바 없고 토착 왜구이거나 그 후손들이다. 그런 허접한 나라에서 ‘586 정의의 사도들’의 희생과 투쟁 덕분에 민주화가 성취됐고, 그 바탕 위에 경제 번영과 정치 자유를 누리게 됐다는 가공의 논리를 주입한다. 그래서 저들은 법 위 군림하는 초법자이며 무한대의 특권과 보상을 누릴 자격이 있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586 영웅 신화는 다름의 자유를 봉쇄한다.
댓글 조작으로 대선에 개입한 김경수 경남도지사에 대한 유죄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판결”(민주당)이다. 김경수의 결백과 무죄를 확신하기에 “대법원에서 바로잡힐 것”(이낙연 민주당 대표)이라며 사법부에 무언의 압력을 넣는다. 어떤 친정권 인사는 “김경수 멋진 친구, 피고인으로 사는 것이 훗날 훈장이 될 것”이라며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중국 문화혁명 때 “부모가 영웅이면 자식은 호걸”이라고 했다던데, 21세기 대한민국에도 혈통론이 부활할 조짐이다. 586의 자식들이 대학에 특혜 입학할 길을 열어놓고 권력과 학력의 세습제 사회를 다진다. “흙수저들아, 열공하면 뭐하냐! 차라리 데모를 해라”는 군중의 자괴감과 반항심을 위정자는 두려워해야 한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는 한마디로 신세계다. 올더스 헉슬리는 획일적 전체주의 사회를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로 풍자했다. “정말 능률적인 전체주의 국가는 억압할 필요조차도 없게 노예들이 노예의 삶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썼다. 이 정권이 지향하는 신세계는 맹목적 지지와 내 편으로만 사육하는 이분법의 사회다. 선택적 정의와 내로남불이 뉴노멀이 되는 세상은 비열한 신세계다.
우리의 진보주의자들이 파시즘적 포퓰리스트 트럼프의 재선을 내심 바랐다는 건 자기부정이지만 공공연한 비밀이다. 김정은의 친구라는 이유뿐 아니라 트럼프가 지향한 꿈이 유사했기 때문일 수 있다. 빈부와 인종 등 대립과 양극화를 부추겨 권력을 쟁취하고 백인우월주의와 미국 우선주의를 펼치는 게 트럼프의 신세계였다. 그 꿈은 일단 좌절됐지만, 유권자 47% 7200만명이 트럼프를 지지했다는 건 충격적이다. 문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율 40%는 우리식 신세계에도 많은 군중이 미련을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 백악관 앞에는 “당신은 잘렸어(You’re fired)”라고 쓰인 포스터가 내걸렸다. 트럼프의 패배와 함께 그의 신세계가 좌초했다는 조롱이다. 배타적 기득권층과 그 추종자들만을 위한 차별적 신세계를 거부한 게 미국 민주주의의 복원력이다. 순둥이로 사육되는 우리에게 비열한 신세계를 자를 의지와 능력이 있을까. 바이든의 말에 코끝이 시큰하다. “우리는 적(enemy)이 아니다.”
고대훈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