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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중용, 산업 결합 예측…‘초통찰력’ 시대를 리드했다

초일류 삼성 만든 이건희 전 회장

2011년 7월 29일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 열린 선진 제품 비교 전시회에 참석한 고 이건희 회장(아래 오른쪽에서 셋째). [사진 삼성전자]

2011년 7월 29일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 열린 선진 제품 비교 전시회에 참석한 고 이건희 회장(아래 오른쪽에서 셋째). [사진 삼성전자]

28일 수원의 가족 선영에 영면한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은 혁신경영으로 그룹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렸다. 그가 회장에 취임한 1987년 12월 삼성그룹 전체 매출액은 9조9000억원 정도에 불과했다. 그 후 그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2014년, 그룹 매출액은 338조6000억원으로 급증했다. 27년 사이 34배로 커진 것이다. 같은 기간 삼성그룹 시가총액 역시 9000억원에서 318조8000억원으로 354배로 불어났다. 그 사이 일본의 소니 등 한국 기업을 한 수 아래로 대하던 경쟁자들은 삼성전자가 자신들을 추월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특히 이 전 회장이 미래 먹을거리로 낙점하고 집중적으로 키운 반도체는 삼성전자를 넘어 한국 경제를 먹여 살리는 수출품이 됐다.
 

신경영부터 마하경영까지
150억 어치 불량 애니콜 화형식
품질경영 실천 후 ‘국민폰’ 탄생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27년 혁신으로 시총 354배 키워

“우린 아직 1.5류” 디자인 혁명
사내 어린이집 등 여성 배려도

이 전 회장은 경영 환경이 급변하고 대내외 악재가 불거지는 고비 때마다 미래를 내다보고 혁신을 강조하며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그룹 경영진에게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꾸라”고 강조하면서 경각심을 일으킨 1993년 프랑크푸르트 신(新)경영 선언이 대표적이다. 이 전 회장은 이때 선언을 ‘품질경영’ 실천으로 이어갔다. 당시 삼성전자 가전 부문에는 높은 불량률 탓에 위기 신호가 켜져 있었다. 이 전 회장이 품질경영을 강조한 이후 회사 측은 세탁기 생산라인을 시작으로 불량품이 나올 때마다 모든 작업을 멈추고, 원인을 파악해서 조치한 다음에야 재가동하는 ‘라인 스톱’ 제도를 실시했다.
 
이런 덕에 1993년 삼성전자의 제품별 불량률은 전년 대비 30~50% 수준으로 낮아졌다. 이 전 회장은 만족하지 않았다. 1995년 3월 삼성전자의 경북 구미 공장 한켠에 이 전 회장 지시로 무선전화기 ‘애니콜’ 등의 제품 15만점이 쌓였다. 이윽고 직원들이 해머를 들어 제품을 때려 부수거나, 아예 불을 붙여 태워 없앴다. 이 화형식은 ‘품질 개선에 전념할 테니 믿어 달라’는 이 전 회장의 대국민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당시 삼성전자 무선전화기 사업부의 제품 불량률은 11.8%에 이르렀다. 품질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완제품 생산을 추진한 탓이 컸다. 이 전 회장은 150억원어치의 제품 15만점을 수거해 전량 폐기처분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애니콜은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까지 ‘국민 무선전화기’로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 무렵 이 전 회장은 디자인 혁신을 강조하는 ‘디자인경영’에도 사활을 걸었다. 1995년 삼성디자인스쿨(SADI)을 설립한 이 전 회장은 1996년 신년사에서 “21세기 기업의 마지막 승부처는 디자인”이라며 디자인 혁명의 원년을 선언했다. 기술력을 지닌 삼성전자 제품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지 못하고 있는 데는 뒤처진 디자인이 작용하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삼성전자는 제품의 내구성뿐 아니라 디자인을 중시하고 시장 동향과 소비자 수요를 더 체계적으로 조사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이 전 회장은 2005년 밀라노에서 주요 경영진을 불러 모아 “우리 디자인은 아직도 1.5류”라며 제2의 디자인 혁명을 주문했다. 당시 그는 “진열대에서 제품이 고객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평균 1초도 안 걸린다”며 “짧은 순간 고객의 발길을 붙잡지 못한다면 마케팅 싸움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밀라노 선언 직후 삼성전자는 2006년 ‘보르도 TV’를 내놨다. 이 제품은 ‘TV는 사각형’이라는 당대 통념을 깬 새로운 디자인으로 출시 16개월 만에 500만대가 팔리면서 ‘평판 TV의 새로운 디자인 가치를 제시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보르도 TV를 앞세운 삼성전자는 소니를 누르고 세계 TV 시장 1위에 올랐다. 그로부터 14년 연속 세계 TV 시장 왕좌는 삼성전자 몫이었다. 1971년 단 1명이던 디자이너는 현재 1500명 이상으로 늘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디자인 조직을 갖춘 삼성전자는 미국과 영국 등 7개국에 글로벌 디자인 연구소를 두고 있다.
 
이 전 회장은 자신과 더불어 회사를 이끌 인재를 찾아 적재적소 배치하는 데도 힘썼다. 특히 ‘천재경영’과 ‘여성경영’에 나섰다. 생전에 그는 “21세기엔 탁월한 천재 하나가 직원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성별이나 학력 등으로 사람을 차별해 배제하면 그의 숨은 능력을 다 끌어 쓰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계했다. 이에 삼성그룹은 1995년 7월 국내 기업 중 최초로 ‘열린 채용’을 시작했다. 1996년엔 삼성경영기술대학을 설립하는 등 인재 양성에도 공을 들였다.
 
삼성그룹의 3대 인재 양성 프로그램으로 통하는 ‘SVP’ ‘SLP’ ‘SGP’ 도입을 결정한 것도 이 전 회장이다. SVP는 연간 두 차례의 신입사원 입문교육과 연 1회 하계 수련회, SLP는 우수 평가를 받은 관리자급 직원의 국내외 2년 파견 등이, SGP는 임직원의 해외 생활을 돕는 지역 전문가 제도가 주요 내용이다. 이 전 회장은 2002년 경영진을 소집해 초일류를 뜻하는 ‘S급’ 핵심 인력 확보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성과주의로 그룹 전체의 경쟁력을 끌어올릴 것을 재차 주문했다. 삼성그룹은 같은 직급이더라도 능력이 뛰어난 S급은 연봉이 4배까지 많도록 대우하게 됐고, 이는 총수 부재 상태에서도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 전 회장의 여성경영 또한 남달랐다. 출산과 육아로 공백기가 있는 여성 직원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진급 등에서 불리한 ‘유리 천장’에 고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전 회장은 능력 있는 여성이 많은데 이를 외면하면 국가적 손해라고 봤다. 그의 지시로 삼성전자는 1990년 사내에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어린이집 문을 여는가 하면, 2001년 여성상담소를 설치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올해 나온 삼성전자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 따르면 그 결과 2009년부터 10년간 매니저(과장) 이상 간부 중 여성 비율이 7.5%에서 14.7%로 크게 늘었다.
 
투병 생활 직전까지도 이 전 회장은 혁신경영의 끈을 놓지 않았다. 2014년 신년사에선 “초일류 기업으로 남으려면 체질·구조를 다시 한번 바꿔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른바 ‘마하(Mach)경영’을 역설했다. 제트기가 음속(1마하=초속 340m)을 돌파하려면 설계 단계부터 엔진과 소재, 부품까지 모두 바꿔야 하듯이 경쟁력을 지키려면 체질과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자동차·전자 합쳐 새 사업 기회 생긴다”…커넥티드카 예견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은 취임 10년째이던 1997년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라는 에세이집을 펴냈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저서였다. 이 책은 그가 공식석상에서의 언행으로 드러낸 것 외에 평소 인생관과 경영관 등을 담고 있다.
 
이 전 회장은 대기업도 작은 기업처럼 기민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봤다. “작은 조직일수록 환경 적응이 빠르고 기동력이 좋다. 우리나라 대기업들도 조직을 쪼개서 자율·분권·현장화해야 한다.” 그러면서 선택과 집중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어느 기업도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다. 경쟁사에 비해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찾아 차별화되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리더십을 논하면서 자아성찰을 하기도 했다. “5%의 사람은 리더가 하는 말만 들어도 믿는다. 그러나 95%의 사람은 실제 행동을 봐야 믿는다. 리더가 솔선수범해야 조직원이 따르고, 그 조직에 생기가 돈다.” “용어를 통일하고, 특유의 용어를 만들고, 용어의 질을 높이는 것. 이것이 조직의 효율을 높이고 조직을 한 방향으로 향하게 만든다.” “신바람은 인간적으로 대우해서 ‘이 회사, 이 조직이 내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야 절로 나는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면모도 보인다. “실패는 많이 할수록 좋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 실패하지 않는 사람보다 무언가 해보려다 실패한 사람이 훨씬 유능하다. 이들이 기업과 나라에 자산이 된다.” 그러면서도 위기는 늘 경계했다. “위기는 내가 제일이라고 자만할 때 찾아온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다. 남이 먼저 변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변화는 없다.”
 
특유의 통찰로 먼 미래를 미리 내다보기도 했다. “업의 개념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누가 먼저 정확하게 변화하는 업의 개념을 잡느냐가 기회 선점의 관건이다.” 자동차와 전자 분야가 만난 오늘날의 ‘커넥티드카’ 열풍 등을 예견한 것처럼 보이는 대목도 있다. “이제 산업 간 구분은 무의미하다. 자동차가 전자가 합치고 중공업과 전자가 합친다. 새로운 사업 기회도 생긴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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