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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리콴유·탁신, 재해·전쟁 나 떠돌던 ‘객가’ 후예

[중국 기행 - 변방의 인문학] 객가와 토루

푸젠성 난징현에 있는 톈뤄컹촌 마을의 객가 토루. 네 개의 원형 토루와 하나의 사각형 토루가 모여 있어 사채일탕(四菜一湯)이라 불린다. [사진 윤태옥]

푸젠성 난징현에 있는 톈뤄컹촌 마을의 객가 토루. 네 개의 원형 토루와 하나의 사각형 토루가 모여 있어 사채일탕(四菜一湯)이라 불린다. [사진 윤태옥]

중국의 민족과 족군 분류에서 객가(客家)라는 갈래가 눈에 뜨인다. 객가인들은 장시성·푸젠성·광둥성이 교차하는 지역에 많이 산다. 이 지역을 따로 구분하여 객가 조상의 땅(客家祖地)이라고도 부른다. 객가조지 이외에 홍콩, 마카오는 물론 쓰촨성과 대만에도 많다. 동남아와 서양으로 이주한 화교도 많았다.
 

객가, 한족 8개 민계 중 한 갈래
왕조 교체기에 생긴 대규모 유민
중국에 7400만, 해외 3000만 거주

객가인의 집체주택 ‘토루’ 볼 만
못도 못 박을 정도 튼튼한 방어성

중국에서 객가는 민족으로는 한족에 속한다. 한족을 다시 8개 민계(民系)로 나누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객가이다. 다른 민계는 전부 지명인 데 비해, 이들은 객이라는 타자화된 뜻글자를 사용하는 것도 예사롭지는 않다. 조상은 중원에서 온 한족 혈통이지만, 객이라는 명칭처럼 또 하나의 변방민으로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객가의 조상들은 기아와 전란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유민들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운위되는 대규모 유민이 바로 그들이다.
  
진시황~청조 후기 큰 혼란 여섯 번
 
중국 역사에서는 여섯 차례의 대규모 유민이 발생했다. 진시황이 전국 칠웅의 여섯 나라를 전쟁으로 멸망시키는 과정, 한나라 말기에서 위진남북조에 걸쳐 북방민족이 대거 남하하여 중원을 차지하던 시대, 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과 오대십국, 거란과 여진에 눌리다가 몽골에 멸망한 송대, 명말청초의 혼란기, 그리고 청조 후기의 태평천국의 난 등이다. 이들 유민의 역사 때문에 객가의 역사는 진시황 시대부터라고는 하지만 실제 하나의 족군으로 형성된 것은 남송 시대인 것으로 보는 게 다수의 견해인 것 같다.
 
개인 소유의 토루안정보. 푸젠성 싼밍시 인근에 있는 이 토루는 지붕이 뒤로 가면서 한 칸씩 높아지는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사진 윤태옥]

개인 소유의 토루안정보. 푸젠성 싼밍시 인근에 있는 이 토루는 지붕이 뒤로 가면서 한 칸씩 높아지는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사진 윤태옥]

객가인은 중국에 7400만, 외국에 3000만 정도로 거주한다고 알려져 있다. 객가인들은 객가 출신의 유명인사 덕분에 더 유명해지기도 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태국의 잉락과 탁신 전직 총리 남매, 대만의 리덩후이 등이 객가인 출신이다. 중화민국의 쑨원, 신중국의 덩샤오핑도 그렇다. 객가인들의 토루(土樓)도 우리의 시선을 잡아당긴다. 토루는 그들의 전통 살림집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건축양식이다.
 
톈뤄컹촌(田螺坑村·푸젠성 장저우시 난징현 소재) 마을엔 네 개의 원형 토루와 하나의 사각형 토루가 한데 모여 있다. 마을 뒷산에서 내려다보면 식탁에 늘어놓은 요리접시처럼 보여 사채일탕(四菜一湯)이라고도 부른다. 토루로 걸어 들어가면 중원과 변방의 요소가 뒤섞인 그들만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음미할 수 있다. 객가인들은 집단으로 이주하고 정착한 내력으로 인해 대가족 또는 집체성 요소가 강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토루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대가족 집체주택이란 것이다. 훗날 늘어날 가족을 염두에 두고 당장의 필요보다 큰 집을 짓기도 한다. 개개의 방들은 표준화·통일화해 있다. 한 칸의 1층에서 꼭대기까지를 한 가구가 사용하는 게 보통이다. 4층이라면 1층은 주방, 2층은 식량저장고, 3층은 침실, 4층은 침실 겸 창고로 사용한다. 소농사회의 종법제도에 따라 가운데 마당에는 조당(祖堂)을 지어 공동의 조상을 모신다. 그러나 가가호호의 경제활동과 일상생활은 독립되어 있다.
 
둘째 특징은 군사적 방어성이다. 안으로는 넓게 열리고 쉽게 뭉치는 구조이지만, 밖으로는 상당히 폐쇄적인 구조이다. 외벽은 점성이 있는 홍토(紅土)에 석회, 자갈을 섞은 다음 절구공이 비슷한 공구로 일일이 두들기고 다져서 쌓아 올린 것이다. 중요한 부위에는 찹쌀밥이나 흑설탕을 넣어 점성을 더욱 높인다.  
 
진성루라 불리는 원형 토루. [사진 윤태옥]

진성루라 불리는 원형 토루. [사진 윤태옥]

이런 재료를 사용하면 못을 박기 어려울 정도로 단단해진다. 하단은 두께가 150cm 정도로서 웬만한 공격으로는 파손되지 않는다. 꼭대기 층에는 토루 전체를 한 바퀴 돌며 외부의 적을 감시할 수 있는 복도를 만들고 복도 곳곳에 작은 창이나 사격 구멍을 만들었다. 대문은 10~20cm 두께의 목판으로 만들고, 바깥 면에는 철판을 입히기도 한다. 안쪽에는 빗장 이외에, 굵은 기둥 두 개를 직각으로 받쳐 외부의 강한 충격에도 열리지 않게 한다. 대문 위의 3, 4층에는 밖으로 돌출된 공간을 만들어 대문을 공격하는 적들에게 끓는 물을 쏟아부을 수도 있게 했다. 마당의 우물도 필수적이다. 봉쇄를 당해도 장기간 버틸 수 있는 식수원이다.
 
대륙은 황제에게는 자부심을 과시할 수 있는 거대한 통치영역이고, 출세하려는 이들에게는 기회의 광장이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민초들에게는 몸을 숨기기도 힘든 고초의 현장일 수도 있다. 한 곳에서 발생한 전란이나 재난이 그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먼 곳까지 심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황제가 가까우면 세금과 노역이 더 커지고, 그곳에서 멀어지면 도적떼들이 관군보다 먼저 들이닥치곤 했다. 객가인들의 일상도 이러했을 것이다. 이런 상시적인 난국에서도 소박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지혜를 품고 있는 토루가 있었다. 푸젠성 중부 싼밍시(三明市) 동남쪽 40㎞ 거리에 있는 안정보(安貞堡)라고 하는 개인 소유의 토루였다.
  
도적떼 출몰 땐 마을 사람들 피난처 되기도
 
안정보는 건축면적만 1만㎡나 되고, 방이 350개나 된다. 9m 높이의 외벽이 좌우 45m, 전후 70m를 감싸고 있다. 택호는 아예 보(堡)라는 군사용어를 사용한다. 전면의 좌우 모서리 양쪽에는 포루(砲樓)가 호위장군처럼 당당하게 돌출돼 있다. 게다가 지붕이 뒤로 가면서 한 칸 한 칸 높아지는데 처마의 끝선은 날렵하고 뾰족하게 뽑아 올렸다. 거대한 거북이가 등짝에 날카로운 가시를 꽂고 입을 굳게 다문 채 적들을 응시하는 모양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약점 잡아 공격할 곳이 없어 보인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안정보는 이 지역의 유지였던 지점서(池占瑞)와 그의 아들이 1885년 완공한 것으로 지관성(池貫城)이라 불리기도 한다. 안정보는 평시에는 지씨 일가의 살림집이지만, 도적떼가 나타나면 촌락의 모든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공동의 피난처로 지은 것이다. 지씨 부자는 성채와 같은 토루를 짓기 위해 자금성까지도 찾아보았다고 한다.
 
실제로 도적떼들이 쳐들어온 게 수차례였고, 그 가운데에는 보름 가까이 포위한 채 격렬하게 공격한 적도 있었으나 이를 모두 막아냈다고 하니 그 방어력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었던 것이다. 건축의 내력과 함께 대문 좌우에 걸린 대련이 내 눈에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安于未雨綢繆固(안위미우주무고)
貞觀沐風謐静多(정관목풍밀정다)
 
비가 오지 않을 때 미리 단단히 준비했기에 편안하고, 수고로이 노력하였기에 평안하여 바른 도리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장의 설명문에는 지씨 부자를 향신이라고만 했으니 크게 출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적떼가 쳐들어오면 마을 사람들을 전부 자기 집으로 피난하게 했으니 참으로 큰 덕이 아닐 수 없다.
 
공동체에 고난이 닥치면 누군가는 한 끼 식사를 내주고, 누군가는 하룻밤 숙박을 베풀고, 누군가는 한 계절의 생존을 도와주고, 누군가는 고난의 근본원인을 막아내는 일을 떠맡게 되는 게 사람다운 것이 아닐까. 덜 힘든 사람이 더 힘든 사람을 위해 자신의 재산과 능력을 기꺼이 베푼 것은, 아마도 인간사회가 조금씩이나마 발전해 가는 원동력일 것이다. 향신이라 칭호밖에는 없었지만 그의 베풂은 동시대를 살던 이웃을 넘어 멋진 건축유물을 통해 낯선 외국인에게까지 전해졌으니 결코 ‘향신의 덕’만은 아닌 듯싶다.
 
윤태옥 중국 여행객
중국에 머물거나 여행한 지 13년째다. 올해는 국내에서 역사기행을 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경계를 걷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엠넷 편성국장, 크림엔터테인먼트 사업총괄 등을 지냈다. 『중국 민가기행』『중국식객』『길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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