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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 빼고 물감·팔레트…" 산 100곳서 붓질하는 여자

여자는 북한산 족두리봉으로 이어지는 바위에 털썩 앉았다. 깔개도 없이 “바위가 따뜻하니 좋네요”라고 말했다. 파란 배낭에서 하얀 종이를 꺼냈다. 물감과 팔레트가, 붓과 물병이 용수철처럼 계속 튀어나왔다. 그는 손가락으로 4B 연필을 돌돌 돌리면서 멀리 바라봤다. 
'하이킹 아티스트' 김강은씨가 지난 9월 17일 북한산 족두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깔개도 없이 앉은 그는 "바위가 따뜻해서 좋다"고 말했다. 김현동 기자

'하이킹 아티스트' 김강은씨가 지난 9월 17일 북한산 족두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깔개도 없이 앉은 그는 "바위가 따뜻해서 좋다"고 말했다. 김현동 기자

송나라 곽희의 삼원법에 따름일까. 평원에 있듯 수평으로 멀리 보고(평원), 고원의 관점으로 아래서 위로 훑으며(고원), 산 뒤를 살피듯 깊게 들여다본다(심원). 연필 끝은 곡선을 쏟아 냈다. 탕춘대 능선, 인왕산이 종이에 떴다. 남산자락을 살짝 펼치다 N서울타워를 세웠다.

'어반 스케처' 김강은
영하 6도 치악산서도 그림 그려
거칠어도 현장서 그리는 게 생생
팬티, 조개 껍데기 수거해 아트로


 
김강은(30)씨는 산에서 산을 그린다. 그 그림을 소셜미디어(SNS)로 공유한다.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3만3000명이다. 최근에는 한 여가생활 애플리케이션의 모델이 됐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산전수전을 기록한『아홉수, 까미노』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지난달 17일 기자도 바위에 털썩 앉아 그와 얘기를 나눴다.
 
# 정상 가야 한다는 압박 없이 어디서건 그려 
배낭이 무겁지 않나.
김밥 세 줄이 1㎏인데 딱 붓·팔레트·연필 등 그림 도구 키트의 무게다. 김밥 두 줄 빼고 그림 도구를 챙긴다. 그림을 그리면 몰입감에 배고픔도 사라진다. 누가 와서 업어 가도 모른다. 컨디션에 따라 더 작은 팔레트, 작은 붓으로 바꾸기도 한다.
'하이킹 아티스트' 김강은씨가 산에서 그림을 그릴 때 쓰는 도구. [사진=김강은]

'하이킹 아티스트' 김강은씨가 산에서 그림을 그릴 때 쓰는 도구. [사진=김강은]

최근 유행하는 어반 스케치(urban sketch)를 산으로 가져왔다.
2017년부터 산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홀로 또는 친구들과 여럿이서다. 당시에는 어반 스케치라고 칭해도 되는지조차 몰랐다. 어느 공간에서건 현장에서 그림을 그려 SNS를 통해 공유한다는 게 어반 스케치라면, 나도 어반 스케처 아닐까.
어반 스케치의 중요한 덕목 하나는 자유다. 어느 곳에서나 그릴 수 있는 자유, 어느 도구를 써도 된다는 자유, 형식의 자유다. 시장이나 골목·산어귀에서 연필·붓·펜·목탄 심지어 나무젓가락 끝에 묻은 잉크를 써도 된다. 정선의 진경산수화처럼, 강세황의 남종화풍처럼,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처럼 그려도 된다. 어반 스케치는 또 ‘현장’을 중요하게 본다. 김씨는 산이라는 무대에서 작은 화폭을 채운다. 하지만 꼭 화폭을 채우지 않을 자유도 있다.

 
줄곧 산에서 그리는 이유는 뭔가.
산에서 멈춰야 할 곳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 꼭 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사라진다. 그러면 자유로워진다. 100대 명산을 염두에 두고 그리고 있다. 그 100대 명산은 산림청이, 어느 아웃도어 기업이 정해준 게 아니다. 내가 스스로 정하는 명산이다. 자신의 마음에 들면 뒷산도 명산이 된다. 현재 산 60여 곳에 올라 한장 한장 그렸다.
한겨울 산속에서도 그리나.
추우면 장비가 많아져 배낭이 무거워진다. 김밥 한 줄 더 걸면 된다(웃음). 한겨울 영하 6도 치악산에서 물감을 종이 위에 칠하자 1초도 안 돼 얼어붙더라. 붓도 얼면서 종이에 착 달라붙어 애먹었다. 춥더라도 현장에서 그린다. 사진 찍어 집에서 그걸 보고 그리면 더 잘 그릴 수는 있다. 하지만 거칠어도 산에서 그리는 게 더 생생하다. 그림에 당시의 마음이 온전히 묻어 들어간다.
'하이킹 아티스트' 김강은씨는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산에서 쓰레기를 수거한다. 버려진 벽시계를 '발굴'하기도 한 이들은 스스로를 '클린 하이커'라고 부른다. [사진=김강은]

'하이킹 아티스트' 김강은씨는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산에서 쓰레기를 수거한다. 버려진 벽시계를 '발굴'하기도 한 이들은 스스로를 '클린 하이커'라고 부른다. [사진=김강은]

'하이킹 아티스트' 김강은씨가 친구들과 산 속 바위 틈에서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다. LNT(Leave No Trace·흔적 남기지 말기)를 함께 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클린 하이커'라고 부른다. [사진=김강은]

'하이킹 아티스트' 김강은씨가 친구들과 산 속 바위 틈에서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다. LNT(Leave No Trace·흔적 남기지 말기)를 함께 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클린 하이커'라고 부른다. [사진=김강은]

# 쉽게 그리는 그림은 새로운 메시지 전달법

닉네임이 ‘하이킹 아티스트’다.
나도 미대 출신이지만, 예술의 문턱은 높지 않다고 본다. 좋아하는 걸 어떤 방법으로 구현하면 그게 예술이다. 아티스트, 즉 예술가는 누가 내려주는 작위가 아니다. 나는 클린 하이커이자 정크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그가 말한 클린 하이커와 정크 아티스트는 연관돼 있다. 지난 2년 6개월간 380여 명과 800㎏ 넘는 쓰레기를 산에서 수거했다. 산 정상에서 패총을 이룰 정도의 꼬막 껍데기가, 계곡에서는 남성 팬티·바지가 나왔다. 땅에 살짝 묻힌 여성 단화를 봤을 땐 섬뜩했다. 벽시계를 ‘발굴’하고는 까닭 모를 눈물이 났단다. 이 쓰레기들을 모아 정크 아트를 꾸민다. 김씨는 이를 ‘일종의 살풀이’라고 표현했다.

김강은씨가 친구들과 산에서 수거한 쓰레기로 정크 아트를 만들었다. [사진=김강은]

김강은씨가 친구들과 산에서 수거한 쓰레기로 정크 아트를 만들었다. [사진=김강은]

정크 아트에 풍자가 깃들었다.
사람들의 이기심이 버린 것들이니까. 담배 피우는 모습이나 돼지로 해학적 표현을 하기도 한다. 산에서 많은 걸 배운다. 배워서 남 주려고 한다. 그림은 예술이라며 어려워하는 하는 사람들에게 재능 기부를 하려고 한다. 그림은 예쁠 필요는 없다. 그림은 이제 자기를 표현하는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그는 29일부터 11월 1일까지 지리산에 머무른다. 30일부터 시작하는 '지리산 지키기' 프로젝트에 참가한다. 트레일 러너, 하이커 등 18명 중의 한 명으로, 자연 훼손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비대면으로 진행되는 이 프로젝트는 #savethejiri 해시태그로 참여할 수 있다.

 김강은씨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 40여 분 만에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김현동 기자

김강은씨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 40여 분 만에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김현동 기자

그는 쓱쓱 물감을 칠한 뒤 만세 자세로 '새로운 메시지 전달법'을 보여줬다. 가로·세로 19✕14㎝ 종이 위, 기운생동(氣韻生動)이다. 코로나 시대, 혼자이되 더불어 하며 나누려는 그는 여행의 새로운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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