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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정은경 "1500명 사망" 말한 순간, 국가백신 대응 이미 실패했다

백신 불신에 전염병 창궐하는 필리핀의 길 가려고 하나

정부는 지난 26일 만 62~69세를 대상으로 독감 무료접종을 시작했다. 지난달 초 무료접종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른 아침부터 긴 줄이 생겼으나 백신 공포로 접종률이 떨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첫날 접종은 지난해에 비해 반토막이 났다. [뉴스1]

정부는 지난 26일 만 62~69세를 대상으로 독감 무료접종을 시작했다. 지난달 초 무료접종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른 아침부터 긴 줄이 생겼으나 백신 공포로 접종률이 떨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첫날 접종은 지난해에 비해 반토막이 났다. [뉴스1]

“백신의 안전성이 문제가 아니라 정부의 대응방식이 혼란을 키웠다. 이대로 가면 지난 수십 년간 공들여 쌓아놓은 신뢰를 무너뜨려 장기적으로 국민 안전을 크게 해칠 우려가 있다. 뎅기열에서부터 홍역과 소아마비 등 온갖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는 필리핀의 비극이 우리 얘기가 될 수도 있다.”
 

백신 공포는 정부 불신서 비롯
87만→45만 첫날 접종 반토막
검증된 독감 백신도 설득 못하는데
코로나 백신 이상반응 땐 어떻게

독감 백신 접종 후 사망 신고가 줄을 이으면서 백신 접종의 안전성과 속도 조절을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전문가들이 빠뜨리지 않고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걱정 하나가 있다. 백신 자체의 부작용보다는 신뢰 잃은 정부가 불러올 공중보건의 위기다. 쉽게 예를 들자면, 코로나19 백신이 나왔는데 백신을 못 믿어 아무도 맞지 않으려 한다면 우리 사회는 코로나 대응에 막대한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백신 신뢰도가 높아 백신 접종률 역시 매년 최고 수준을 유지해온 한국에서 왜 이런 우려가 터져 나오는 걸까. 적잖은 전문가들은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의 설화(舌禍)에 가까운 미숙한 커뮤니케이션에서 그 답을 찾는다. 질병관리본부 출신인 충남대병원 공공보건의료사업단 김영택 교수는 “백신에 대한 높은 신뢰는 엄청나게 큰 사회적 자산”이라며 “최근의 일부 미숙한 대응이 이런 자산을 갉아먹는 부정적인 영향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됐고,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봤다.
 
“65세 이상 고령자 중 독감 예방접종 후 7일 이내에 사망한 수는 지난해 1500여 명 정도로 추정한다. 예방접종과 관련 없는 사망자 숫자다.”
 
부검 후 보건 당국이 자살로 규정짓긴 했지만 접종 이틀 만에 건강한 고교생이 사망하면서 촉발된 독감 백신 공포가 잦아들기는커녕 오히려 확산하자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지난 24일 긴급 브리핑에 나서 이런 생경하고도 놀라운 숫자를 내놓았다. 앞서 22일엔 국감에 출석해 “독감으로 연간 3000명 이상이 사망하기 때문에 고령의 고위험군은 접종하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지난 22일 국감에서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독감 백신 관련 자료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2일 국감에서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독감 백신 관련 자료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의 잇따른 고령자 사망이 백신과 무관하고 백신 접종을 하지 않았을 때 위험이 더 크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제시한 숫자였지만 이 발언의 후폭풍은 컸다. 방역 당국 수장의 입에서 15명, 30명도 아니고 수천 명에 달하는 엄청난 사망자 수가 툭 튀어나오자 불안이 잠잠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불안감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정부가 불안을 부추긴 셈이다.
 
관련 기사에는 ‘코로나 사망이 500명이 채 안 되는데 독감으로 3000명씩 죽으면 겨울마다 락다운(봉쇄) 해야 하지 않나’라거나 ‘독감과 비교하면 코로나는 병도 아닌데 뭐하러 마스크를 쓰고 다니냐’는 비판적인 댓글이 수없이 달렸다. ‘1500명이나 죽었으면 백신이 아니라 독약’이라거나 ‘노인청소백신’ ‘독극물로 국민을 살상했다는 자백’ ‘국민 목숨이 언제부터 숫자놀음이 됐나’라는 격한 반응에선 불안을 넘어 성난 민심을 엿볼 수 있었다. ‘작년에는 왜 발표를 안 했나’ ‘이런 통계가 사실이라면 사고 직후 나왔을 텐데 한참 뒤에 나온 걸 보니 소설을 쓴 게 아닌가’라는 의구심도 있었다.
 
문제는 일반 국민만 몰랐던 게 아니라 전문가들에게도 낯선 데이터였다는 점이다. “우리 보건 당국이 이런 데이터까지 확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돼 신뢰도가 올라갔다”(국제백신연구소 송만기 박사)는 소수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평소 투명하게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다가 온갖 잡음이 일어난 후에야 아무도 모르던 숫자를 꺼내 든 게 혼란을 더 키웠다고 지적했다.
 
마상혁 창원파티마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대한백신학회 부회장)는 “평소 방역 당국이 현장의 전문가들과 정보를 거의 공유하지 않는다”며 “특히 이번 정부 들어 감염병 대응에 자꾸 정치색이 끼면서 정부와 가까운 전문가 그룹에 대한 불신마저 생긴 터라 국민 설득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영택 교수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그는 “평소에 질병관리청이 이런 얘기를 전문가들에게라도 꾸준히 해왔다면 모를까 상온 유통 사고에다 백색 침전물 문제 등 관리 부실로 인한 백신 불안감이 높아진 상황에서 갑자기 이 숫자가 얹어지니 정부 신뢰가 떨어지는 역효과만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백신 효과가 없다는 연구결과까지 홈페이지에 다 올려놓을 정도로 투명하게 모든 정보를 공개한다”며 “우린 관련 연구가 빈약한데 그마저도 공개를 꺼리고 제대로 된 소통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니 백신 공포가 퍼지는 것”이라고도 했다.
 
전문가들의 우려처럼 백신에 대한 신뢰 자본이 무너지면 이번 독감의 경우에서 보듯 다른 모든 백신에 대한 거부로 이어질 위험성이 크다. 이미 그런 조짐이 어렴풋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26일 시작한 만 62~69세의 하루 무료 접종자 수는 45만 명(전체 대상자 499만 명)으로, 지난해의 절반 수준(65~74세 87만 명)에 그쳤기 때문이다. 신종플루가 유행했던 2009년이나 우리보다 앞서 겨울을 겪은 호주의 사례 등에 비춰볼 때 백신 이외의 다른 감염병이 유행하면 통상 접종률이 50% 이상 많아지는데 올해는 오히려 예년보다 저조한 상황이다.
 
김 교수는 “독감 예방주사는 자발적 참여를 통해 일정 수준으로 접종률을 높여야만 효과를 볼 수 있기에 세금을 쓰는 국가 접종 사업으로 접종률을 높이려 노력하는 것”이라며 “안전하다는 믿음을 줘야 접종률도 올라가는데 정부가 접종률을 높이겠다는 욕심이 앞서 전문가의 제안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접종을 강행하다 보니 오히려 접종률이 떨어지는 것”으로 해석했다.
 
국제백신연구소 송만기 박사는 당장의 독감 백신 공포보다 코로나19 백신 출시 이후를 더 걱정한다. 독감 백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어서다. 송 박사는 “전 국민 접종 얘기까지 나오는 마당에 수천만 명 단위의 대규모 접종을 시작하면 지금과 비슷하거나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데 만약 며칠 새 수백 명의 사망자가 쏟아져 나오면 대응책이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실제로 이미 지난 수십 년 동안 접종 과정을 거쳐 안전성이 검증된 독감 백신도 이런 혼란을 겪는다면 임상 기간이 짧은 코로나19 백신은 완전히 다른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그는 “신종플루 때부터 전문가 그룹에서는 이미 제기됐던 문제”라며 “지금처럼 사망이 이어질 경우를 대비해 데이터를 축적, 공개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통계상 유의미한 수치인지 빠르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뎅기열 백신 부작용으로 100여 명 사망한 필리핀의 후폭풍
뎅기열 백신을 맞은 학생들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필리핀에선 백신 공포가 퍼졌다.

뎅기열 백신을 맞은 학생들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필리핀에선 백신 공포가 퍼졌다.

백신에 대한 신뢰는 과학적 증거(백신 안전성)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사회심리적 요인 역시 접종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백신 접종률이 떨어지면 집단면역이 형성되지 않아 백신이 목적만큼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백신 효능은 정부에 대한 신뢰에 크게 좌우한다고도 볼 수 있다. 다행히 한국은 보건 당국에 대한 신뢰가 매우 높은 편이라 지금까지는 백신 수용성이 높은 국가에 속했다. 이게 무너지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너무나 크다. 필리핀의 비극이 우리에겐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필리핀 정부는 2016년 4월 공공 면역 프로그램을 도입해 초등학생 89만명을 대상으로 뎅기열 백신(뎅기박시아) 무료 접종을 실시했다. 백신이 출시되자마자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이뤄진 대규모 접종이었다. 전문가 그룹에서 부작용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지만 선거를 앞둔 아키노 정부는 이를 무시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백신 접종을 권고했다는 게 주요 이유였다. 하지만 부작용으로 어린 학생 100여 명이 사망한 후인 2017년 말에 이르러서야 접종을 중단했다.
 
백신에 대한 신뢰가 훼손되면서 이후 뎅기열만 창궐한 게 아니다. 원래도 높지 않았던 백신 접종률이 더욱 떨어지면서 한동안 진정됐던 홍역과 소아마비가 다시 발생했다. 각국 백신 전문가들이 백신 자체의 안전성 이외에 국민 설득을 주요한 과제로 보는 건 이런 이유다. 한국 질병관리청이 불안해하는 국민들에게 “무조건 괜찮다”만 반복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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