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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칼럼] 이건희 회장이 남기고 간 숨은 이야기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979년 문을 연 서울 장충동의 신라호텔 본관 외벽은 붉은 타일로 장식돼 있다. 하지만 전체 23층 가운데 아래쪽과 위쪽 타일의 색깔이 미세하게 다르다. 마감 공사 도중에 삼성그룹의 자금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급전을 변통해 수입을 재개했지만 시간차로 인해 똑같은 타일은 구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가장 비슷한 색상으로 위쪽을 마감했다고 한다. 당시는 제2차 오일쇼크 등 국내 1위의 삼성조차 돈 가뭄을 겪는 격동의 시기였다. 그제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이건희 회장이 취임할 무렵의 삼성을 “싸구려 TV와 전자레인지를 팔던 회사”라고 표현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일부는 이 회장 흠결을 비판하나
한국이란 변방에서 세계 초일류
기업을 키워낸 업적만으로도
그런 그늘 충분히 덮지 않을까

26년에 걸친 이 회장의 신경영 성과를 굳이 열거할 생각은 없다. 그 업적은 “삼성은 이제 스마트폰, TV, 컴퓨터 칩의 세계적 거인이 됐다”는 외신 기사들에 모두 녹아 있다. 이 회장 타계 이후 신경영의 장면들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 우선 350시간이 넘는 1993년의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열띤 강연이 대표적이다. 반도체에서 스택(stack) 공법을 선택한 것도 유명한 장면이다. 전문 경영인들이 처음 시도하는 위험부담에다 비용 문제로 망설이자 이 회장이 결단을 내렸다. “길게 보고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지하로 파는 것보다 위로 쌓는 게 쉽지 않겠습니까?” 메모리 반도체에서 일본 도시바의 기술 종속에서 벗어나 세계 1위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95년 불량 휴대전화 15만 대를 불태운 ‘잿더미 위에서 피어난 애니콜 신화’도 기억에 생생하다. 여기에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 삼성은 이 회장이 취임한 다음 해인 88년, 아날로그 무선전화에 뛰어들었다. 반도체가 처음 흑자를 내면서 숨통이 트인 것이다. 그러나 ‘넘사벽’인 모토로라에 밀려 7년간 적자행진을 거듭했다. 보통 기업이라면 접어도 몇번이나 접었을 사업이다. 하지만 이 회장은 “언젠가 손에 무선전화를 하나씩 들 날이 올 것”이라며 뚝심으로 버텼다. 오너 경영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저력이었다. 삼성은 결국 94년에야 ‘한국 지형에 잘 터지는’ 애니콜로 판세를 뒤집었다. 모토로라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1등 자리에서 밀려났다.
 
이 회장은 유명한 영화광이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보고 가장 좋아했던 영화는 ‘벤허’라고 한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전차경주. 멧살라는 사정없이 말을 후려치고, 벤허는 채찍 없이 달린다. 벤허는 경주 전날에 네 마리 말을 어루만지며 용기를 북돋워 주고 공감을 나눈다. 결국 승자는 벤허였다. 이 회장은 “멧살라가 1급 조련사였다면 벤허는 차원이 다른 특급 조련사”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른바 ‘벤허 리더십’이다.
 
외부에서는 삼성을 향해 ‘황제경영’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삼성에는 5~10년씩 장수하는 CEO들이 즐비했다. “삼성을 월급쟁이의 천국으로 만들겠다”는 이 회장의 약속은 빈말이 아니었다. 윤종용·진대제·황창규·이기태·최지성·권오현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중요 사안은 비서실과 협의하지만 의사결정은 사장들이 자율적으로 했다”고 입을 모은다. 이 회장이 인재를 까다롭게 발탁하되 한번 앉히면 믿고 맡겼다는 뜻이다. 마치 영화 벤허처럼….
 
이어도 해양과학기지는 방공식별구역 논란이 나올 때마다 한국 영토임을 알리는 보석 같은 존재다. 이 기지는 1993년 김시중 과학기술처 장관에 의해 처음 추진됐다. 하지만 경제기획원이 예산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는 수 없이 ‘헬기장+잠수함 관광’의 민간 프로젝트로 방향을 틀었으나 한진관광과 삼성 계열 관광회사도 난색을 표했다.
 
다음은 김 전 장관이 남긴 회고담이다. “7개월여 뒤 갑자기 삼성중공업 사장이 찾아왔어요. 128억원을 부담해 사업을 모두 책임지겠다는 겁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독일 출장을 다녀온 이건희 회장이 뒤늦게 보고받고 크게 야단쳤다는 거예요. ‘장관이 개인 욕심으로 하겠느냐. 나라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아예 삼성중공업이 맡아라’고 했답니다. 어찌나 고마운지…” 그 후에도 반전은 꼬리를 물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삼성과 갈등하면서 이어도 사업은 다시 표류했고, 결국 해양수산부 장관 출신의 노무현 대통령이 완성했다.
 
이 회장은 누구보다 먼저 변화와 위기를 진단해 내고 선명한 경고 신호를 보낸 인물이다. "우리나라 정치는 4류, 관료와 정부는 3류, 기업은 2류다”(1995년) "중국은 쫓아오고 일본은 앞서가고, 한국 경제는 샌드위치 신세다”(2007년)…. 삼성을 넘어 우리 사회 전체에 큰 울림을 던진 메시지들이다. 그제 CNN도 삼성의 성명을 인용해 ‘이 회장은 진정한 선지자’라고 보도했다.
 
원희룡 제주 지사는 "우리가 세상을 넓고 멀리 볼 수 있게 된 것은 거인의 어깨 덕분이었다”며 이 회장을 기렸다. 일부에선 이 회장이 드리운 그늘을 탓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이란 변방에서 세계 초일류 기업을 키워낸 것만으로도 그런 흠결을 덮고 남을 만큼 크고 넉넉한 거목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마 앞으로 우리 사회가 길을 잃거나 어려움에 부닥치면 누구보다 먼저 그를 기억하고 떠올릴 것이다. 이 회장의 영면을 기원한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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