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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순의 한반도평화워치] 종전 선언, 외투 벗는다고 봄이 오는 건 아니다

종전 선언과 한·미 동맹

노태우 대통령이 1992년 2월 17일 정원식 총리(사진 맨 오른쪽)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북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노태우 대통령이 1992년 2월 17일 정원식 총리(사진 맨 오른쪽)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북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이 9월 22일 유엔 연설에서 ‘비핵화의 길을 열기 위한’ 한반도 종전 선언을 제안한 지 3주 만에 정부 입장이 정리됐다. “종전 선언과 비핵화가 따로 갈 수 없다는 건 상식”이라는 것이다. 서훈 안보실장이 지난 16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을 만난 후 내놓았다. 문 대통령이 제시한 ‘입구론’보다는 ‘병행론’을 강조하고 있다. 폼페이오도 21일 같은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상식’에 속하는 일을 왜 미국까지 가서 확인해야 했는지 의아스럽다. 앞날을 위해 짚어봐야 한다.
 

현재 한반도 안보 근간은 ‘북핵 vs 미국 핵우산’의 균형
전쟁이 끝났다고 선언하면 미군이 주둔할 이유 허물어져
종전 선언은 비핵화 외에 남북 경계선 확정 등 선행 필요
안보는 실험 대상이 아니므로 성급한 낙관주의 경계해야

첫째, 대통령의 제안 이전에 청와대와 내각에서 충직한 토론이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정부의 의사 결정 과정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의문이다. 둘째, 한국은 미국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온다는 인상을 더 굳혔다. 특히 “조선반도 주인인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은 미국만 상대하면 된다”는 북한의 논리를 강화해 주었다. 셋째, 한국이 이런 종전 선언에 매달리는 순간 미국은 방위비 같은 문제의 협상 지렛대로 삼고, 북한도 대남 카드로 활용코자 한다. 이런 당연한 이치를 굳이 무시했다.
 
대통령의 종전 선언 제안과 지난달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던진 “한·미 군사·냉전 동맹의 평화 동맹으로의 전환”은 같은 맥락이다. 70년에 걸친 전쟁을 끝내는 것은 모두의 염원이다. 이 목표에 다가가려면 종전과 동맹의 본질적 토론이 필요하다.
  
종전 선언 추진할 환경 크게 악화
 
대통령은 종전 선언으로 평화에 대한 서로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의 확인이 아니라 ‘전쟁을 끝내겠다’는 의지의 확인은 지금까지 수차 반복되었다.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와 2000년 북·미 공동 코뮈니케, 그리고 2018년 판문점 남·북 정상 공동선언과 싱가포르 북·미 정상 공동성명에서 모두 그런 의지를 확인했다. 의지는 이미 확인 단계를 넘었다.
 
종전 선언이 하나의 구호가 된 데는 배경이 있다. 2006년 9월 한·미 장관급 회담에서 비핵화와 평화협정의 구도에 합의하고 양국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어서 그해 11월 하노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할 경우’ 김정일 위원장과 종전 선언에 서명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미국의 기존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국내 일각에서 ‘핵 폐기’는 건너뛰고 ‘종전 선언’만 조명하기 시작했다.
 
이후 2007년 10월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비핵화보다는 종전 선언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정부 안팎에서 ‘비핵화 없는 종전선언’은 그 가능성을 넘어 위험한 구상으로 지적되었다. 당시 미국은 한국 정부의 임기 말에 미칠 정치적 함의도 고려했다. 심각한 내부 토론을 거쳐, 그해 10월 말 노무현 대통령은 “북핵 불능화를 넘어 핵 폐기 절차가 합의되어야 종전 선언이 가능할 것이다”고 입장을 정리했다. 13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이달 서훈 안보실장과 폼페이오가 밝힌 입장과 오버랩된다.
 
2000년 10월 10일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부장 겸 총정치국장(오른쪽 사진 왼쪽)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예방하고 면담했다. 북·미는 당시 적대 관계 청산을 담은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했다. [중앙포토]

2000년 10월 10일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부장 겸 총정치국장(오른쪽 사진 왼쪽)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예방하고 면담했다. 북·미는 당시 적대 관계 청산을 담은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했다. [중앙포토]

그동안 종전 선언을 추진할 환경은 크게 악화하였다. 무엇보다 핵 개도국이던 북한은 핵 보유국이 되었다. 미·중은 충돌로 가고 있다. 지금 한반도 안보의 근간은 ‘북한의 핵 vs 한·미 동맹에 의한 미국의 핵우산’이라는 균형이다. 어떤 설명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났다고 선언하고 나면 미군이 주둔할 이유는 허물어진다. 종전을 선언해도 북한이 미군 철수를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람들이 있다. 방북한 남측 인사들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단 한 번도 공개적으로 그런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종전 선언 주장은 결국 핵 보유 북한과 비핵 남한이 ‘평화롭게’ 살아보겠다는 뜻이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설마 핵을 터뜨리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런데 북한은 이미 핵 보유국 위상을 여러 방면으로 사용하고 있다. 북한은 이달에도 대남 타격용을 위시한 각종 신형 무기를 과시했다. 개성 연락사무소 폭파나 우리 국민의 해상 살해를 넘어 더 노골적으로 나와도 핵무기라는 뒷배 때문에 응징하기 어렵다. 북한의 군사 도발과 테러 행위의 두꺼운 기록들을 직시해야 한다.
  
주한미군 철수 여론 부채질할 수도
 
전쟁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끝난다. 종전을 선언하려면 비핵화 외에도 남·북의 경계선 확정과 평화 관리 계획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난 30년간 행동 계획의 합의에 실패하고 있다. 답답하다고 마차를 말 앞에 세울 수는 없다. ‘종전’은 평화조약의 제1조에 ‘선언’하는 것이다. 전쟁이 실제로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해서 우선 제1조만 쓰자고 할 수는 없다. 국가의 안보는 실험 대상이 아니다. 외투를 벗으면 봄이 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맡기기에는 나라의 미래가 너무 크게 걸려 있다.
 
다음 주 미국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더라도 비핵화와 종전 선언의 입장은 여전할 것이다. 미국보다는 한국 자체의 판단이 더 중요하다.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 때문에 주한미군 철수는 어려울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주로 뉴욕이나 워싱턴 같은 대도시 식자층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여론 조사에 따르면 미국민의 60% 이상이 미군의 해외 파병에 반대한다. 현실적 대안 없이 종전 선언과 한·미 동맹의 변화를 외칠 경우, 미국 내 주한미군 철수 여론을 부채질할 수 있다.
 
대남 타격용 신형 무기 옆에서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 운운하는 김정은, 북한의 무력 증강에 대비하겠다면서 종전 선언에 매달리는 문재인,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지만, 제재는 강화하겠다는 트럼프는 공통점이 많아 보인다. 지금이라도 한국 대통령이 두 사람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한·미 동맹 약화시키는 행동은 지혜롭지 못해
국가 관계를 규정하는 최상급은 ‘동맹’이다. 동맹은 정치·군사적 실체이지만 경제와 문화를 포함한 다면적 상호 이익을 수반한다. 한·미 동맹에 ‘냉전’‘평화’‘전략’ 같은 수식을 덧붙이면 국내 정치적 함의를 띨 수 있다.
 
동맹에는 공동의 적을 징벌하기 위한 공세적 동맹과 침략의 억지와 격퇴를 위한 방어적 동맹이 있다. 현존 동맹은 주로 후자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대표적이다. 2차 대전 후 소련의 팽창에 따른 냉전 산물로 1949년 탄생했다. 지금도 유럽의 안전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반면 한·미 동맹은 냉전이 아닌 열전(熱戰)의 산물로서 아직 연기가 모락거리는 휴화산 위에 놓여있다. 게다가 지난 23일 시진핑 주석의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70주년 연설은 한국전을 미·중 전쟁으로 부활시켰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토를 비하하면서 올해 7월 주독 미군의 3분의 1을 철수키로 결정했다. 독일도 대응하여 자체 국방력을 키우고 있다. 독일은 지난해 국방 예산을 전년보다 10%나 늘렸다. 핵무기 제조가 가능한 민수용 고농축 우라늄도 보유 중이다. 그럼에도 독일은 나토의 가치에 이의를 달기보다는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크람프 카렌바우어 국방장관은 최근 카네기 평화재단 보고서에서 나토가 독일 안보의 ‘최고 좌표’(ultimate frame of reference)라고 강조했다.
 
이론적으로 한·미 동맹의 대안은 중립의 길, 충분한 자체 방어 능력 구축, 동북아의 모든 국가가 참여하는 다자안보체제 수립이 될 것이다. 중립은 현실적으로 논외의 영역이다. 자체 방어 능력은 핵 역량 구축을 포함하여 긴 과정을 요한다. 다자안보체제가 대립적 동맹을 해체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이상적이지만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 과거 6자회담에서 극히 초보적 논의가 있었지만 북핵 협상의 좌초와 미·중 갈등으로 요원한 과제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먼저 한·미 동맹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동맹의 신뢰성이 약화될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과 약화를 초래할 행동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상반된 길이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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